중생과 함께하는 불법 보여주는 친근한 민중 신앙

 

칠성도는 북두칠성 그린 ‘불화’ 
밀교 도교 영향 일월성신 신앙
중국불교와 다른 한국불교 특징

독성도, 부처님 제자 독성존자 
산신도, 산왕 호랑이를 의인화
소박하면서 우리만의 토착불교  

①고려시대 조성된 치성광여래왕림도, 미국 보스턴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사찰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이 바로 부처님을 모신 대웅전이다. 휘황찬란한 단청으로 장식된 대웅전 안에는 금색으로 개금하여 찬란한 빛을 발하는 불상을 비롯하여 갖가지 채색의 불화와 기물(器物) 등이 즐비한 것이 마치 불국토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대웅전 밖의 저편 구석, 발품을 팔아 언덕을 올라가면 대웅전과 달리 소박하고 아담한 건물이 눈에 띄는데 그곳이 바로 칠성도과 독성도, 산신도를 봉안한 전각이다. 그곳에 가면 염주를 굴리며 무엇인가를 읊조리는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 두 손을 모으고 하염없이 절을 하는 아낙네의 모습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화려하게 단청한 웅장한 대웅전도 아닌, 거대한 불상이 놓이지도 않은 사방 한 칸의 좁은 전각에서 그들이 그토록 절실하게 기원하는 것은 무엇일까. 아마도 가족의 건강과 안녕, 자녀의 대학합격, 안산(安産)같은 소박한 바램일 것이다. 이처럼 칠성과 독성, 산신은 비록 석가모니나 아미타불같은 부처는 아니지만 서민들이 가장 즐겨 찾고 기댈 수 있는 친근한 민중신앙의 대상으로 오랫동안 우리 곁에 자리잡고 있다. 

칠성도와 독성도, 산신도는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 안에 각각 봉안되거나 삼성각(三聖閣)에 칠성도를 중심으로 좌우에 독성도와 산신도가 봉안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전각의 중앙에 봉안되는 칠성도는 말 그대로 칠성, 즉 북두칠성을 그린 불화이다. 맑은 밤이면 언제든 볼 수 있는 북두칠성은 인간에게 가장 친근한 별자리 중의 하나로, 일찍부터 여행의 길잡이로, 때로는 인간사 모든 것을 주관하는 권능을 가진 별로 믿어져 왔다. 불교이전 이미 민간신앙(무속)과 도교에서도 북두칠성에 대한 신앙이 발전했다. 사람이 죽으면 칠성판에 시신을 뉘인다거나 무속에서 행하는 굿거리 중 칠성굿의 존재는 북두칠성이 우리 생활 속에 얼마나 깊숙이 들어와 있었는가를 잘 보여준다. 

그런가 하면 장군총, 삼실총, 무용총, 사신총, 장천1호분 등 고구려 벽화고분에는 해, 달과 함께 북두칠성이 그려져 있어 고대인들에게 북두칠성의 존재가 단지 하늘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별이 아니라 죽은 이의 영혼을 내세로 인도하는 여행의 길잡이로 인식되었던 것 같다. 

불교에서는 밀교가 발전하면서 점성술과 도교의 영향 하에 일월성신(日月星辰)을 신앙화하였다. 북두칠성은 각각 의인화된 부처(如來)로서, 북극성(北極星)을 여래화한 치성광여래(熾星光如來)를 중심으로 하여 재앙을 물리치고 질병을 다스리며 득남을 기원하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이에 <북두칠성연명경(北斗七星延命經)>, <북두칠성염송의궤(北斗七星念誦儀軌)> 등의 경전이 번역, 편찬되었을 뿐 아니라 이를 도상화한 불화도 제작되었다. 대영박물관에 소장된 치성광여래 및 오성도(熾盛光如來及五星圖, 897년)와 돈황석굴 제61굴의 입구 남벽에 그려져 있는 치성광여래이십칠수도(熾盛光如來二十七宿圖, 10세기경)는 소가 끄는 마차에 타고 있는 치성광여래와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별들을 함께 그렸다. 

북두칠성을 그린 것은 아니지만 불교에서 별들을 신앙화하였음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에 이르러 도교에서 북두칠성에게 제사지내는 초제(醮祭)가 활발하게 개설되었고, 고구려벽화에서와 같이 다채롭지는 않지만 양릉(陽陵)과 현릉(玄陵), 칠릉동7호분(七陵洞七號墳), 파주 서곡리 고려벽화묘 등 고분에 여전히 북두칠성을 그리는 전통이 이어져 왔다. 따라서 북두칠성에 대한 불화 역시 다수 제작되었으리라고 생각되지만 현재 남아있는 작품은 많지 않다. 

미국 보스톤미술관에 소장된 치성광여래왕림도(熾聖光如來往臨圖)는 소가 끄는 마차에 타고 있는 치성광여래를 중심으로 북두칠성과 구요성(九曜星), 12궁(12宮), 28수(28宿) 등을 그렸다. 중국 치성광여래도의 형식을 많이 따르고 있으면서도 중국불화와 달리 북두칠성을 함께 그린 것으로 보아, 북두칠성에 대한 우리만의 돈독한 신앙을 엿볼 수 있다.

②여수 향일암 독성도, 조선후기 만들어졌다.

조선시대 후기에 이르러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하는 과정에서 칠성을 본격적으로 신앙하는 전통이 생겨난 듯, 조선후기의 사찰에는 대부분 칠성각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의 칠성도는 치성광여래와 그들 둘러싼 천체의 별들을 함께 그리던 고려시대 칠성도와 달리, 중앙에 금륜(金輪)을 든 치성광여래와 일광보살(日光菩薩), 월광보살(月光菩薩) 등 치성광삼존을 중심으로 좌우에 필성(弼星)과 7여래, 도인형(道人形)의 칠원성군(七元星君), 삼태육성(三台六星), 28수, 자미대제(紫微大帝) 등을 배치하였다. 간단히 치성광삼존만을 묘사한 것에서부터 여러 권속들을 모두 묘사한 형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이 있으며, 본존과 권속들을 모두 한 폭에 묘사하는 경우와 본존 1폭, 권속 2폭 등 3폭, 또는 본존 1폭, 칠성 각 1폭, 기타 권속들 2폭 등 10폭 내지 11폭으로 나누어 그리는 경우도 있어 그 형식은 상당히 다양한 편이다. 이러한 형식의 칠성도는 조선시대 초기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태안사 칠성도(1739년), 천은사 칠성도(1749년), 대흥사 칠성도(1745년), 선암사 칠성도(1749년), 쌍계사 칠성도(1850년), 송광사 칠성도(1867년), 신륵사 칠성도(1892년) 등을 꼽을 수 있다.

삼성각에는 칠성도 외에 독성도와 산신도가 함께 봉안되곤 한다. 이중 독성도는 부처님의 제자로 남인도의 천태산(天台山)에서 수행하는 독성존자(獨聖尊者)의 모습을 그린 것으로, 독성각 안에 단독으로 봉안되거나 산신도, 칠성도와 함께 삼성각 내에 봉안된다. 독성은 ‘빈두로파라수’로 음역되는 부처님의 제자로서, 석가모니의 수기를 받아 남인도의 천태산에서 수도하다 부처님이 열반한 후의 모든 중생들의 복덕(福德)을 위하여 출현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독성(獨聖), 수독성(修獨聖) 또는 나반존자(那畔尊者)라 부르기도 한다. 독성도는 천태산을 배경으로 늙은 비구가 석장을 짚고 앉아있고 그 옆에서 시동이 차를 끓이는 모습을 작은 화폭에 간단하게 그린 것이 대부분이다. 현존하는 작품은 대개 19세기 이후의 것임을 볼 때 독성을 단독으로 신앙하는 전통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성립된 듯하다. 

독성도와 함께 삼성각 안에 봉안되거나 따로 산신각(山神閣), 산왕각(山王閣) 등에 봉안되는 산신도는 산왕(山王)으로 신앙되던 호랑이를 의인화하여 그린 것이다. 맹수 가운데 가장 무서운 짐승인 호랑이는 예로부터 산의 신령(神靈)으로 믿어져 왔으며 차츰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신격화되었는데, 불교에서 이를 불교의 체계 속으로 받아들여 신앙의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중국에서는 일찍이 수나라 때 천태산 국청사(國淸寺)에 절의 수호신으로 산왕각을 세우고 산신을 봉안한 이래 당나라 때부터 그 신앙이 이어져 왔다. 

③창녕포교당 산신도, 1897년 작품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까지는 산신에 대한 신앙은 없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 불교가 민간신앙과 결합, 토착화하는 과정에서 산신에 대한 신앙이 유행하여, 사찰에는 대개 산신각을 세워 상과 불화를 봉안하고 있다. 산신도는 깊은 산과 골짜기를 배경으로 기암괴석(奇巖怪石) 위에 백발이 성성한 노인 모습의 산신이 동자를 대동하고 앉아있고, 산신 옆에는 호랑이가 쭈그리고 앉아있는 모습을 그렸다. 때로는 단군의 모습과도 같고 때로는 선비와도 같은 산신의 모습이라든지 백수의 왕인 호랑이를 마치 고양이처럼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것에서 두려움의 대상을 해학적으로 받아들였던 옛 조상들의 익살과 재치를 보는 듯하다.

비록 부처나 보살은 아니지만 항상 중생의 곁에서 그들의 소박한 바램을 이루어주는 칠성과 독성, 산신은 바로 중생과 함께 하고자 하였던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그대로 보여주는 존재이자 한국화된 토착불교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

[불교신문3430호/2018년10월10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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