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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불사(佛事)에 한국불교 생명이 걸렸다”<기원정사처럼 성역화불사 캠페인 4> 각황사부터 조계사까지… 총본산의 역사

조계종 총본산 성역화불사 추진위원회는 지난 5월부터 모연캠페인 ‘기원정사처럼 성역화불사’를 진행 중이다. 부처님께 사찰을 보시하기 위해 금화로 땅을 덮었던 수닷타 장자처럼, 조계종 총본산의 땅 한 평을 100원짜리 동전으로 덮을 수 있는 금액 60만원을 약정하고 한국불교중흥을 위한 모연에 동참하는 캠페인이다.

본지는 성역화불사 추진위원회와 공동캠페인을 진행하며 조계종 총본산을 장엄하는 여법한 불사에 함께하고 있다. 이번 시간엔 조계사 모태인 각황사부터 현재까지 이어지는 과정과 의미를 조명하고자 한다. 일제 식민지배 상황에서 각황사 불사와 총본산 대웅전 건립은 한국불교의 전통과 자주성을 세우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1916년 현재 서울 수송공원 자리에 위치한 각황사 모습.

-사대문 안 처음 세워진 절 ‘각황사’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조계종총본산 ‘조계사’의 역사는 일제 치하에 있던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불교의 자주화와 민족자존 회복’을 염원하는 스님들에 의해 각황사(覺皇寺)라는 이름으로 창건됐다. 지금의 수송공원 자리에 세워진 각황사는 조선시대 억불정책으로 인한 ‘도성 내 사찰 폐지’ 이후 사대문 안에 만들어진 최초의 사찰이다. 

갑오개혁의 영향으로 1895년 억불정책의 상징인 ‘승려 도성출입 금지’가 해제됐으나 당시 사대문 안에 절은 한 채도 없었기 때문에 각황사는 그만큼 큰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와 함께 근대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당이자 일제하 최초의 포교당이라는 가치를 갖는다. 당시 불교계 숙원 사업이었던 사대문 안 사찰 건립은 침체됐던 불교를 일으키려 했던 노력의 결실이었다.

각황사 창건은 1909년 12월 전국 승려대표 150여 명이 그 당시 동대문 밖에 있던 유일한 사찰 원흥사에 모였던 것이 계기였다. 이들 스님은 원종(圓宗) 설립 인가에 맞춰 한성부 안에 불교총합소를 설치하기로 결의했다. 이어 사대문 안에 원종 사찰을 창건하는 것을 숙원사업으로 정하고 1910년 4월 다시 모여 필요한 비용 30만원을 모으기 위해 진력한다.

사대문 안 최초의 절 각황사
전국 스님·불자 정성으로 건설
불법포교 중심 도량 역할 담당

일제 민족말살 맞서 세운 태고사
“이번 사업 한국불교 운명 달려”
총본산 건립에 스님·불자 노력

“비구 중심 정체성 회복하자…”
정화운동 산실 조계사로 이어져

각황사 창건을 위한 전국에 있는 스님들과 불자들의 관심은 뜨거웠다. 강원도 각 사찰에서는 6000원씩 모아 정성을 보탰다.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 등 각 사찰에서도 백미 1000석을 불사금으로 보시했다고 한다. 각황사 불사를 위해 이렇게 전국 사찰에서 모인 불사금이 백미 2000석과 8만원(현재 약 40억원)에 달했다고 한다. 

당시 <대한매일신보>와 <황성신문>에 따르면 “각황사 터로 박동(현재 종로구 조계사 근처)의 예전 동녕위궁(동녕위는 순조의 맏딸 명온공주와 혼인한 김현근을 가리킴)자리를 3천원에 매입했으며, 10월 초에 건축을 마무리 해 1910년 10월26일과 27일에 봉불식을 열었다”고 전해진다.

각황사는 각종 법회와 강연, 다양한 행사 등을 진행하며 도성 사람들을 대상으로 불법 포교를 펼쳤다. 일요학교도 열고 수계식도 개최해 불자 양성에 힘을 쏟았다. 불교 연극을 비롯해 각종 문화 행사를 주최하면서 적극적인 문화 포교에도 앞장선다. 

500년 만에 도성 안 포교가 가능해진 이후 각황사는 활기가 넘쳤다. 이런 각고의 노력이 더해져 1912년 부처님오신날 봉축행사에 수천 명이 몰려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아울러 수도권 지역 인근 스님들이 각황사에 불법을 배우러 찾아왔다는 기록도 존재한다. 명실상부한 한국 불교 중심 사찰 역할을 맡은 것이다.

"조선불교의 생명이 이번 사업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일제의 민족말살정책에 맞서 총본산 건설위원회 대표였던 지암스님은 이와 같이 불사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사진은 1938년 조계종 총본산 조계사(당시 태고사) 대웅전 창건 당시 모습.

-한국불교 전통·역사 계승 ‘태고사’

그러나 강력한 일제의 탄압 속에서 각황사도 외침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한국불교 전통을 지키기 위한 불교계의 눈물겨운 노력은 태고사 창건으로 이어진다. 일제는 1930년대 후반부터 우리 민족정신을 없애버리기 위해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한다. 우리 민족과 동고동락을 함께한 불교계도 이를 피해갈 수 없었다. 

일제는 각황사를 일본사원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다. 이에 맞서 불교계는 자주적인 한국불교를 세우겠다는 원력으로 1938년 각황사를 헐고 지금의 조계사 자리에 부처님 도량을 세운다. 한국불교의 법통을 태고 보우스님에게서 찾는다는 뜻으로 태고사(太古寺)로 명명했다. 한국불교의 전통과 역사를 계승하는 의미에서 북한산 태고사를 이건하는 형식으로 지어졌다. 이 때 총본산으로 지금의 대웅전을 건립했다.

총본산 건립 또한 스님들과 불자들의 정성스러운 마음과 보시행으로 원만히 회향할 수 있었다. 이는 지난 2016년 동국대 불교학술원에서 마련한 ‘지암 이종욱스님의 편지를 통해 새롭게 보는 조계사 창건 과정’이라는 주제의 간담회에서 밝혀졌다. 당시 월정사 주지이면서 총본산 건설위원회 대표였던 지암스님이 영축산 도인으로 추앙받았던 경봉스님에게 총본산 건설 추진의 어려움을 호소하며 분담금을 지원해준 것에 대해 감사를 표했다는 내용이 간담회를 통해 알려졌다.

1954년 조계사 일주문에 현판을 부착하는 스님들 모습.

당시 총본산 건설사업으로 10만원이 책정됐으나 실제 투입된 액수는 19만원으로 난관에 봉착했던 것이다. 당시 1만원이 현재 5억원으로 환산되므로 총 100억 원의 대작불사였던 셈이다. 비용이 예상을 뛰어넘자 지암스님은 경봉스님에게 편지를 보내 분담금 납부 등을 독려한 것이다.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37년 5월5일 보낸 편지의 일부분이다. “조선불교의 생명이 이번 사업 여하에 달려있습니다.” 지암스님의 이와 같은 간절함은 현재 조계종 총본산의 위엄을 만들게 했다.

-정화운동의 산실 ‘조계사’

해방이 되자 태고사는 일제강점기 영향으로 왜색화 된 불교를 척결하는 정화의 산실로 거듭난다. 1954년 비구중심의 정체성을 회복하자는 불교정화운동이 펼쳐지면서 태고사는 현 조계사(曹溪寺)로 개칭된다. 1990년대를 지나면서 종단 개혁불사의 중심에 있었으며, 2005년에는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을 완공해 역사문화의 중심지로 자리매김했다. 현재는 한국불교의 대표종단인 조계종의 총본산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불교신문3430호/2018년10월10일자]

이성진 기자  sj0478@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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