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속에서 소외감 느끼고 
욕망의 충족 후 허탈감으로 
더 강한 자극을 찾아야 하는 
영혼의 상실에서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나를 찾아서 내 속에 있는 
보물을 발굴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찾아가는 여행
그 여행의 내비게이션은 바로…

현대는 물질문화의 단맛에 푹 빠져있다. 보이고 들리는 것이라고는 거의 오감을 즐겁게 해주는 것들이다. 눈만 뜨면 보는 폰도 텔레비전도, 돈과 경제 정치 그리고 음식 여행 성문제 스포츠 등으로 도배돼있다. 일반 대중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심지어 성직자까지도 물질문명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영혼은 방황하고 있다. 인류가 그간 이루어 놓은 영혼적인 금자탑은 졸지에 무너지게 됐다. 

기계화되고 비도덕화 된 사회와 이미 돈신주의와 물신주의에 중독되어 버린 영혼 없는 지도자들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이런 타락의 불꽃이 사회를 태우고 화염의 지옥으로 만든다. 이런 사회에서 도무지 나는 나를 느낄 수 없다. 대중 속에 살면서 소외감을 느끼고, 욕망의 충족 후에 오는 허탈감으로 더 강한 자극을 찾아야 하는, 영혼의 상실에서 무엇을 얻고 깨달을 수 있겠는가.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나를 찾아서 내속에 있는 보물을 발굴하는 것이다. 내가 나를 찾아가는 여행을 해야 한다. 그 여행의 나침판과 내비게이션은, 이 길을 먼저 간 분들의 영혼을 경험하는 것이다. “너 자신을 알라”고 한 소크라테스의 영혼도,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 한 공자의 영혼도,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목 박혀 인류의 죄를 대속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혼도, 다 인류의 갈 길을 밝힌 등불이고 빛이었다. 

여기서 몇 가지를 더 소개해 보자. 부처님은 고대인도 가비라국 왕자로 태어나셔서, 부귀공명에서 한 가지도 부족함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 실존의 참 가치와 불법승 삼보라는 영혼의 보물을 얻기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출가하셨다. 부처님의 말씀대로 과거에도 미래에도 더 이상의 이런 고통이 없을 것이라는 고행을 통해 무상정등정각을 깨달으셨다. 부처님의 출현으로 그 법을 얻어먹고, 얼마나 많은 중생들이 구제받고 인간답게 살게 되었는가. 

참으로 고맙지 아니한가. 설중단비(雪中斷臂)라는 말이 있다. 선종의 제2조인 혜가가 눈 내리는 날, 달마대사 앞에서 팔을 자르면서까지 법을 구하려 했다. 혜가의 단비구법에서, 그 치열하고 극진했던 구도정신을 엿볼 수 있지 않은가. 이런 구도정신에서 견성성불이 이루어지고 영혼적인 인간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근대에는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라는 저서가 ‘인간이 무엇으로 살아야 하는가’를 느끼게 한다. 그는 유대인으로 나치스에 체포,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3년간 포로생활을 하였다. 그 아우슈비츠 3년간은 그야말로 끝없는 절망과 고통 속에서, 혐오감과 공포 동정심 같은 것을 더 이상 느낄 수 없는 감정의 진공상태인 ‘실존적 공허’ 속에 있었다. 

그럼에도 수용소에서 ‘포기한자’와 ‘포기한지 않은 자’들의 심리적 차이가 현실에서 큰 변화로 나타났다. 삶을 ‘포기하지 않은 자’ 들 중에는 남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도 나타나고, 죽음 속에서도 자기를 성찰하며, 인간의 존엄성과 위대함을 드러냈다. 그는 이것을 체험했다. 그 비참한 인간 이하의 생활 속에서도, 삶을 의미 있고 목적이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아무도 빼앗아 갈 수 없는 영혼의 자유였다. 이러한 영혼의 활동을 통하여 그들은 고통을 참고, 절망에서도 내적 성취를 이룰 수 있었다. 그것이 의미 있는 삶이고 목적 있는 삶이었다. 

[불교신문3428호/2018년10월3일자] 

김찬일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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