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세기말 18세기초 대표하는 최고의 승려 장인

전체 외형은 천판 ‘반원형’ 
반원형으로 불룩하게 솟아
종구 쪽 가면서 넓게 퍼져
수타사종 김룡사종 등 조성

사인 비구가 조성한 대표적인 범종들. 괄호 안은 조성 연대, 높이, 소장 사찰. 수타사종(1670년, 110cm, 홍천 수타사).

17세기 후반부터 18세기 초반을 풍미했던 대표적인 승려장인 사인비구(思印比丘)는 그가 제작한 범종의 특징을 통해 그 계열을 삼막사종(三幕寺鐘, 1625)을 제작했던 죽창(竹猖), 정우(淨祐), 신원(信元), 원응(元應) 비구(比丘)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집단의 우두머리 장인[首匠]이 바로 사인(思印)과 태행(太行)으로 서운암종(瑞雲庵鐘,1667), 운봉사종(雲峰寺鐘,1670), 수타사종(壽陀寺鐘,1670), 청룡사종(靑龍寺鐘,1674), 개암사종(開岩寺鐘,1689)까지 제작을 하게 되지만 이후에는 태행 비구가 빠진 대신 사인과 담연(淡衍), 청윤(淸允), 조신(祖信) 등이 새로운 장인 집단을 이루며 희방사종(喜方寺鐘 :1683), 통도사종(通度寺鐘,1688)을 제작한다. 

사인비구가 제작한 범종의 전체적인 외형은 천판이 반원형으로 불룩하게 솟아있고 종구(鐘口) 쪽으로 가면서 넓게 퍼져 종신이 마치 포탄을 반으로 자른 것 같은 모습이다. 용뉴는 목을 구부린 험상궂은 용두(龍頭)와 목 뒤로 꼬리가 휘감긴 음통이 부착되고 상대 아래에 바로 붙여 연곽(蓮廓)을 배치하며 종구(鐘口) 쪽에 하대(下帶)를 두어 장식한 외형적 특징을 통해 전형적인 한국 전통형 범종을 따른 것을 볼 수 있다. 

수타사종(壽陀寺鐘,1670)과 같은 해에 만들어진 김룡사종(靑龍寺鐘,1670), 그리고 그보다 4년 뒤에 제작된 청룡사종(靑龍寺鐘,1674)에는 4개의 당좌를 배치하기도 하였다. 수타사종은 김룡사종과 거의 동시에 함께 만들어져 외형이나 문양에서 매우 흡사한 점을 볼 수 있는데, 특히 중앙에 연화좌를 두고 그 사방에 연판이 길게 뻗어 나온 독특한 모습의 당좌가 두 점 모두 동일한 점에서 같은 문양판을 반복 사용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사인 비구의 작품 가운데 대표적인 몇 점의 범종을 살펴보면 우선 강원도 홍천 수타사에 소장된 수타사종을 들 수 있다. 불룩하게 솟아오른 천판 종의 정상부에는 험상궂게 표현된 한 마리의 용이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용의 목 뒤쪽에 붙어있는 음통에는 용의 몸체가 휘감고 있는 사인비구 특유의 표현이 확인된다. 

종신의 상부에는 상대처럼 표현된 문양대를 두어 원형 테두리 안에 범자문(梵字文)을 둥글게 돌아가며 시문하였다. 이 바로 아래의 네 방향에 연곽을 배치하였고 연곽대에는 잎이 넓은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연곽 내부에 표현된 9개씩의 연뢰(蓮)는 돌출되지 않고 납작한 별 모양의 화형(花形)으로 도식화시킨 점도 사인비구 범종에 보이는 특징적인 형태이다. 또한 이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구름 위에 연꽃가지를 들고 있는 구름 위에 서있는 보살상을 1구씩 배치하였는데, 이러한 모습은 앞서의 쌍계사 종의 보살입상과 거의 동일하여 승장 계열의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종신의 중단쯤에는 2단으로 1670년에 공작산(孔雀山) 수타사(水墮寺) 종으로 만들었다는 명문이 양각되었는데, 지금의 수타사(壽陀寺)란 명칭과 달리 당시에는 수타사(水墮寺)란 표기로 기록된 점을 알 수 있다. 종신의 하단 종구(鐘口) 쪽으로 넓게 표현된 하대에는 연화당초문을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청룡사종(1674년, 높이 182cm, 안성 청룡사).

이보다 4년 뒤에 만들어진 청룡사종은 앞서의 두 범종과 외형과 문양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여전히 단용의 용뉴를 갖추고, 둥글고 높은 천판과 종구가 좁아진 종형을 표현하였다. 종신에 장엄된 도안의 구성도 동일한데, 천판 밑에 원권의 범자를 주회하였고, 그 아래로 연곽, 보살입상, 위패 등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또한 종구에도 연화당초문을 시문하고 있다. 그러나 수타사종과 김룡사종에 보였던 연화를 표현한 독특한 모습의 당좌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한편 <관성현대덕산정광사사적실록(觀城縣大德山定光寺事蹟實錄)>에 따르면 사인은 지금의 북한에 위치한 함경도 정광사(定光寺)에서 1676년에 대종(大鍾) 중종(中鍾), 운판(雲板) 등을 제작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당시 제작한 작품이 현재까지 남아있는지 확인할 수 없으나 사인만이 혼자서 주종작업을 진행하였다는 내용을 통해 더 이상 태행과 공동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를 통해 사인과 태행은 1674년부터 1676년 사이쯤 각자 독자적인 활동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희방사종(1683년, 높이 97.4cm. 서울 화계사).

이후 사인은 담연(淡衍), 청윤 淸允) 등을 이끌고 독립 수장으로서 활발한 주종 활동을 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서울시 화계사 소장 희방사종(喜方寺鍾,1683)이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이 종은 천판 밑으로 주회된 원권의 범자, 그 아래에 연곽과 위패형(位牌形) 장식, 그리고 하대에 연화당초문까지 두른 전례를 따르고 있지만 낮고 편평한 천판과 종구가 벌어진 종형은 앞서의 공동 제작된 작품과 정반대의 모습을 갖추었다. 따라서 이렇게 갑자기 변화된 특징을 보이는 것은 희방사종을 만든 시점부터 사인 나름대로의 작품 경향을 드러낼 수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사인의 범종 양식은 1683년 이후에 제작하는 작품에서부터 보다 뚜렷한 개성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통도사종(1686년, 높이 146.5cm. 양산 통도사).

1688년에 만들어진 통도사종(通度寺鐘)은 사인이 역시 담연(淡演=淡衍), 청윤 淸允)과 신영(信英), 극련(剋連), 탁연(卓連), 예욱(旭)이라는 새로운 인물을 참여시켜 주조한 작품이다. 많은 제작자가 참여한 사실을 반영하듯 조선후기 종 가운데서는 비교적 대형인 146.5cm에 크기를 지녔다. 종의 정상부에는 험상궂게 표현된 한 마리의 용이 앞을 바라보고 있으며 그 뒤로 표현된 음통에는 역시 용의 몸체가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하였다. 종신의 상대에는 2단으로 나누어진 원형 테두리 안에 범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시문하였고 이 바로 아래의 네 방향에는 연곽대를 두어 잎이 넓은 당초문으로 장식하였다. 

연곽의 내부에 표현된 9개씩의 연뢰는 돌출되지 않고 납작한 별 모양의 사인 특유의 도식화된 형태로 장식되었다. 이 연곽과 연곽 사이마다 구름 위에 연꽃가지를 들고 서 있는 보살상을 1구씩 배치하였으나 연곽과 종신에 비해 크기에 비해 매우 작게 표현된 점이 느껴진다. 

이는 종신의 크기가 커졌음에도 전부터 계승되어온 보살상의 문양판을 그대로 사용함에 따라 비례가 맞지 않게 된 결과로서 사인의 범종이 문양판을 주로 사용한 사실을 잘 드러내주는 흥미로운 자료이다. 종신 중단 아래 3단으로 이루어진 긴 내용의 명문에는 200여명의 시주자 명단이 기록되었고 이 명문판 바로 아래를 돌아가며 팔괘문(八卦文)과 종구 위에 넓게 표현된 하대에는 연화당초문을 화려하게 부조하였다. 이 종을 만들었던 시기가 사인비구가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였던 전성기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이후 사인이 제작한 마지막 작품은 경기도 의왕의 청계사종(淸溪寺鐘,1701)으로서 사인과 함께 명간(明侃), 계일(戒日), 여석(餘釋), 유한(有閑), 귀성(貴性), 임선(任善) 등이 제작에 참여하게 된다. 사인 외에 모두 새로운 인물로 교체되었는데, 이는 사인과 함께 활동하던 보조 장인들이 이미 독립하여 각자의 활동을 하였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범종의 용뉴는 쌍용으로 바뀌었지만, 여전히 낮고 편평한 천판과 종구가 벌어진 모습이며 종신을 장엄한 도안의 구성도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천판 밑에는 원권의 범자 대신에 연화당초문과 그 아래로 연곽과 보살입상을 부조하였고 종구 쪽에도 연화당초문을 시문한 것은 마찬가지로 계승을 이루었다. 

그러나 종신을 상ㆍ하로 구획하는 굵은 줄의 횡선(橫線)이 나타난 것은 새로운 요소이다. 청계사종을 만든 이후 숭암사종(崇岩寺鐘, 1715)의 명문에서는 계일(戒日)만이 보일 뿐 사인의 활동은 사라지게 된다. 따라서 현존하는 작품으로만 미루어 보아도 사인비구는 1667년의 서운암종(瑞雲庵鐘)으로부터 1701년의 청계사종까지 약 40년 가까이 활동을 하였던 당대의 명장(名匠)이었음이 확인된다.

사인 비구는 앞서 활동했던 승려 장인들에 비해 경기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등 비교적 폭넓은 지역에서 활발한 주종 작업을 하였지만 주로 경상도 지역을 거점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전의 다른 장인들과 달리 많은 인원을 거느리고 범종을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는 시기적으로 종 제작의 수요가 많아진 것에도 기인하지만 그만큼 역량이 뛰어났기 때문에 누구보다 많은 제작에 참여한 것으로 파악된다. 사인비구가 만든 범종의 특징 가운데 보살상과 연곽, 당좌 등과 같은 세부 표현의 경우 동일한 형태의 문양판을 반복적으로 사용하여 변화 없이 계승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승려 장인이라는 특성상 직업 장인인 사장(私匠)과 달리 보수적 경향을 고수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이처럼 사인은 전대의 승장의 작품을 나름대로 계승하면서도 개성을 살린 독특한 범종으로 발전시켜 나갔으며 뛰어난 역량을 보유하여 이후 만들어진 승장계 작품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러한 가치를 인정받아 그가 만든 범종 8구가 모두 보물 11호로 일괄 지정되어 있다. 

[불교신문3428호/2018년10월3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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