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할아버지, 팔정도에서 ‘정어ㆍ정업ㆍ정명’을 새기고 나면 다음에는 어떤 것을 배워야 할까요?

끊임없는 마음 낼 힘을 갖추고 
부처님처럼 살도록 바탕을 다져 
마음을 한곳에 모을 수 있다면
수행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겠지 

Q 먼저 익혀야 한다고 했으니 그렇게 물을 수밖에 없겠구나. 순서를 매긴다면 그렇다는 말이지. 부처님 가르침이 담긴 빠알리는 우리말과 달라. 영어와 같이 복수를 또렷이 표시하지. 그런데 팔정도 ‘아리요 아탕기꼬 막가(Ariyo at.t.han.giko magga)’는 단수로 쓰였어. 그건 저마다 다른 나무 여덟 그루를 가리키는 것과 같은 말씀이 아니라 여덟 가지를 가진 한 나무와 같기 때문이래. 

몇몇 경전에서는 팔정도를 익혀가는 것을 정견부터 차례대로 이루어져 정정에 이르는 것처럼 얘기하고 있어. 경전에 따라서는 마지막에 나오는 정정에 앞에 나오는 일곱 가지가 모두 아우르고 있다고 해. 그러나 초기불교 연구자들은 팔정도라는 말이 뜻하듯이 여덟 가지 또는 여덟 마디로 닦고 익혀야 하는 것이기에 항목을 따로 떼어 하나하나 순서대로 익혀가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한꺼번에 일깨워가야 한다는구나. 할아비는 이 분들과 뜻을 같이 해. 그런데도 ‘정어·정업·정명’을 앞세운 것은 할아비와 같은 여느 사람들은 이것이 바탕이 되지 않고서는 다른 것을 닦아가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야. 겪어보니까 ‘정어ㆍ정업ㆍ정명’이 얼마만큼 몸에 익고 나니 마치 뭔가에 끌려가듯이 ‘정정진ㆍ정념ㆍ정정’으로 나아갈 수 있더구나. 

하나하나 짚어볼까. 정정진은 옹근 힘쓰기로 ‘끊임없이 물러섬이 없는 마음 길 내기’라고 해. 정념은 옹근 떠올림으로 ‘해야 할 바를 놓지 않기’야. 삼매에 든다고도 하는 정정은 옹근 집중으로 ‘마음을 한곳에 모으기’인데, 흔히 정신통일이라고 하지. 물러서지 않고 마음 닦기나 정신통일은 머리로나마 헤아릴 수는 있을 테고, 정념이 무엇을 떠올린다는 것인지 감이 쉬이 잡히지 않겠구나. 지난해에 얘기했던 염불을 떠올리면 어렵지 않을 거야. ‘염불은 부처님 이름을 부르는 의식으로, 부처님을 떠올리면서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뜻을 다지는 것’이라고 했잖아. 염불이 바로 정념에 들어가는 문 열기야.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다짐을 놓지 않기’가 바로 정념이라고 할 수 있어요. 

물러섬이 없이 끊임없는 마음 길을 낼 수(정정진) 있는 힘을 갖추고, 부처님처럼 살 수 있는 밑바탕을 다지고(정념), 옹글게 마음을 한곳으로 모을(정정) 수 있다면, 불교수행을 제대로 할 수 있는 기틀이 웬만큼 마련됐다고 봐도 좋을 게야.

[불교신문3426호/2018년9월22일자] 

변택주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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