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저녁 마을입구
손바닥만한 작은 공원에서 
노래가 있는 공연이 열렸다     

이른 저녁 먹고 산책길에서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것이다

눈과 귀가 밝고 시원해지니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얻는 
즐거움이 이런 게 아닌가… 

작다는 것에 대해 곰곰 생각해본다. 크고 높아야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오늘날 작은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일깨워주는 사람들을 떠올린다. 소극장에서 단 한 줄 앉은 관객을 위해 혼신을 다하는 배우. 담장 아래 핀 민들레를 쪼그리고 앉아 바라보는 아이. 몇 줄의 시로 독자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는 시인. 크고 화려해 보이지 않지만 무엇보다 아름다운 사람들이다. 

지난 토요일 저녁 작은 공연이 열렸다. 마을 입구에 자리한 손바닥만한 공원에서 노래가 있는 낭독공연이었다. 둥근 목소리를 살짝 눌러 내는 재즈에 이끌려 나도 모르게 공원 의자에 앉았다. 노을에 물든 가을 성벽이 은근한 멋을 내고 있었다. 삼십여 석의 자리는 꽉 찼고, 공연 중간 중간 터지는 박수소리가 오랜만에 골목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이른 저녁을 먹고 산책길에 나섰다 뜻밖의 즐거움을 만난 것이다. 사전정보 없이 마주하게 된 공연이라 그냥 편하게 관객이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약속하지 않아 더 즐거웠는지도 모른다. 무대는 한양도성을 이루는 성곽 아래 아기자기하게 마련되었고, 객석은 성벽이 바라보이는 쉼터였다. 평상시라면 무심히 넘겼을 노을이며 땅거미가 낭독공연의 무대 장치가 되어 아름다움을 더했다. 날이 어두워져 성벽을 비추는 조명이 켜지자 무대는 더욱 화사한 빛을 발하며 최고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도성 안에서 자라는 느티나무 잎이 선선한 가을바람에 기분 좋게 팔랑거리고 있었다. 아마 나뭇잎들도 노래를 들으며 손뼉을 쳤던 게 아닌가. 성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와 그 옆을 돌아다니는 풀벌레, 꼬리를 흔들며 장단을 맞추는 강아지풀. 그러고 보니 관객이 꽤 많았다.

공연은 성북연극협회의 낭독공연 ‘더운데…산책 갈까?’를 타이틀로 하는 문학 <목욕 가는 날>이었다. 이상 문학상수상에 빛나는 정지아 작가의 소설을 원작으로 하여 성경선이 각색, 연출을 맡아 관록의배우 김미진, 박무영, 선정화가 출연했다. 단지, 배우들만 출연하는 것이 아니라 버클리 출신 이새벽이 보컬을, 버클리와 뉴욕대를 나온 한태곤이 반주를 맡았다. 늙은 엄마와 두 자매가 목욕 가는 날에 벌어지는 이야기를 음악과 낭독을 통해 들려줬다. 

이렇듯 작은 공간에서 눈높이를 맞추는 공연이면 누구라도 관객이 되는 즐거움을 누린다. 그 즐거움은 텁텁한 도시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숲에서 들이마시는 피톤치드 같은 것이다. 꼭 숲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나무 몇 그루 서 있는 쉼터에서 숲을 느낄 수 있다. 조그만 공간에서 공연 제작 팀의 수고로 우리의 눈과 귀가 돌연 밝아지고 시원해지니 작은 것에서 큰 기쁨을 얻는 즐거움이 이런 게 아닌가 한다. 

요즘 도심 곳곳에 움직이는 작은 숲이 이따금 만들어진다. 내가 사는 혜화동 주민자치센터에서는 작은 음악회를 열기도 하고, 종로구청에서는 아이들이 마음껏 뛰어놀 수 있는 공간을 짧은 시간이나마 마련해 주기도 한다. 400m 정도 되는 혜화동 길을 전면 통제하여 1년에 네 번 아이들의 놀이터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차가 없는 길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분필로 마음껏 그림 그리는 아이들의 행복한 얼굴과 마주하는 기회다.

길을 가다 일상의 지친 마음을 부려놓을 수 있는 움직이는 작은 숲이 오면 언제라도 다가가게 된다. 우리에게 주어진 유한의 시간을 무한으로 쓸 기회가 아닌가. 가을바람이 기분 좋게 분다. 이런 날에는 특별한 공연이나 음악회가 아니더라도 가까운 곳에 조성된 조그만 공원에서 노랫소리가 들리면 그 소리에 마음을 빼앗겨 보는 것도 좋으리라. 

[불교신문3425호/2018년9월19일자] 

김양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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