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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29> 대감국사 탄연대선사“마침내 종풍 크게 떨치며 동국선문 중흥시켰다”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9.18 1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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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세 대선 승과 급제…대사
중대사-삼중대사-선사 이어
대선사 법계 품서 ‘모범사례’
인종 요청으로 76세엔 왕사

세자 시절 글 배운 예종은 
궁중으로 선사초청해 청법
인종은 국가 중대사 때마다 
어필로 자문 구하기도 해… 

인종 타계 후 단속사 돌아와 
90세 입적 때까지 머물면서 
제자들 제접 하며 선풍진작
선리 얻은 대종장 매우 많아 

사위의송ㆍ상당법어 받아본
宋아육왕사 개심, 서면인가
‘천리마' 비유 고려 3대 명필

단속사는 탄연선사가 머물렀던 곳으로 탑비가 있었으나 모두 소실되고 지금은 탑만 남아있다. 사진은 경남 산청군 단성면 단속사지 동서 삼층탑,

고려 선사들의 행적에 법계(法階)를 받은 선사들이 등장한다. 원응국사 학일도 그렇지만, 그의 제자들 경우에도 ‘대선사’가 2인, ‘선사’가 13인, ‘삼중대사’가 9인이라고 앞에서 언급했었다. 혜조국사 담진의 제자 지인(之印, 1102〜1158년)도 삼중대사, 선사, 대선사 법계를 받았다. 법계는 선종인 경우 대선(大選)에 합격한 뒤부터 중덕(中德), 대덕(大德), 대사(大師), 중대사(重大師), 삼중대사(三重大師), 선사(禪師), 대선사(大禪師) 순이다. 교종인 경우는 대덕(大德), 대사(大師), 수좌(首座), 승통(僧統)이다. 물론 조선시대에는 대선(大選), 중덕(中德), 대선(大禪), 대선사(大禪師), 도대선사(都大禪師)이다. 

대감국사(大鑑國師) 탄연(坦然, 1070˜1159년)도 법계를 순서대로 받은 모범적인 경우이다. 탄연은 원응국사 학일보다는 20년 여년 후 인물로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曇眞)의 제자이다. ‘혜조’라는 법명이 여러 명이다보니, 탄연의 스승이 담진이 아닐 거라는 견해도 있지만, 학계에서는 탄연을 혜조국사 담진의 제자로 본다. 

15세 명경과 합격…칭찬 자자

‘단속사 대감국사 보명탑비문(斷俗寺大鑑國師普明塔碑文)’에 전하는 스님의 행적을 보자. 탄연은 경남 밀양 출신으로 성은 손(孫)씨, 시호는 육조혜능과 같은 ‘대감(大鑑)’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신동으로 알려져 있으며, 지기(志氣)가 뛰어났다. 8˜9세에 문장을 짓고, 시를 썼으며, 서예도 뛰어났다. 13세에 6경(六經)의 대의(大義)에 통달, 15세에 명경과(明經科)에 합격해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했다. 

탄연은 고려 숙종(1096˜1105년 재위, 이때는 아직 왕에 오르지 못한 ‘대군’)의 명으로 세자(훗날 예종)의 스승이 되어 세자에게 글과 행동거지를 가르쳤다. 마침 탄연에게 사안(師安)과 보현(保玄) 두 벗이 있었는데, 사안이 출가했다. 선사는 1088년, 19세에 몰래 궁중을 빠져나와 개성에 위치한 성거산(聖居山) 안적사(安寂寺)로 출가했다. 선사는 인생의 탄탄대로를 뿌리치고 출가의 길을 선택한 것이다. 이후 탄연은 송나라에서 수행을 마치고 돌아온 혜조국사 담진이 머물고 있는 광명사(廣明寺)를 찾아갔다. 탄연은 담진에게서 심인을 얻고, 여러 곳을 행각하며 수행했다. 이런 와중에 탄연은 연로한 노모의 집 부근에 머물며 모친을 봉양하기도 했다. 

단속사지 당간지주.

탄연은 36세 때인 1105년(숙종 10년) 대선(大選) 승과에 급제, 다음 해에 ‘대사’ 법계를 받았다. 1109년 39세에 ‘중대사’, 45세에 ‘삼중대사’, 51세에 ‘선사’ 법계를 받았다. 세자 시절 탄연에게 글을 배운 예종(1106˜1122년 재위)이 즉위하면서 탄연을 궁중으로 불러 법을 묻곤 하였다. 1129년 59세에 탄연은 보리연사(菩提淵寺)에서 법회(法會)를 열었다. 

비문에 의하면, 1130년 인종(1123˜1146년 재위)은 탄연에게 칙명으로 광명사에 주석토록 하였고, 국가의 중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탄연에게 어필(御筆)로 자문을 구했다고 한다. 탄연은 1132년 62세에 ‘대선사’ 법계를 받았다. 선사는 76세에 인종의 부탁으로 왕사에 임명되었다. 왕사에 임명된 후 탄연은 보리연사에 머물렀다. 보리연사는 옛날부터 뱀이 많이 출몰해 스님들이나 신도들이 매우 불편해했는데, 탄연이 이 절에서 법회를 몇 차례 베푼 뒤에 뱀이 자취도 없이 사라졌다고 한다. 이후 인종이 타계하고, 의종이 즉위한 다음 해인 1148년 탄연은 산청 단속사(斷俗寺)로 돌아왔다. 탄연이 78세부터 90세로 입적할 때까지 단속사에서 10여 년을 머물면서 제자들을 제접하며 선풍을 진작시켰다. 

비문에 전하는 탄연의 면모는 이렇다. “선사는 그 천성이 너그러워 학인 지도에 게으르지 않아 현학(玄學)하는 사람들이 구름과 물처럼 그의 문하에 모여들었다. 탄연의 회하(會下)에 대중이 수백 명이었다. 제자들은 승당(升堂)하여 입실하고 심인을 전해 받았으며, 선리의 골수(骨髓)를 얻어 당시에 대종장(大宗匠)이 된 승려가 매우 많았다. 마침내 탄연이 종풍(宗風)을 크게 떨치며 조도(祖道)를 널리 진작시켜 동국의 선문을 중흥시켰는데, 이는 오롯이 선사의 법력에 의한 것이다.” 

임제 9대손…조계종 사굴산인

탄연의 비문에 ‘고려국(高麗國) 조계종(曹溪宗) 사굴산하(山下) 단속사(斷俗寺) 대감국사비(大鑑國師之碑)’라고 새겨져 있다. 여기서 두 가지를 알 수 있다. 탄연이 사굴산문 승려이며, 고려에 들어와 ‘조계종’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고 있는 점이다. 한편 비문에 ‘탄연은 임제의 9대손(九代孫)에 해당한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실은 탄연은 중국으로 건너가지 않았다. 그렇다면 어떤 연유로 탄연을 임제 9대손이라고 하는가? 12세기 초, 중국의 선종은 7종(五家+황룡파+양기파)이 모두 완성된 상태였다. 임제종 황룡 혜남(黃龍慧南, 1002˜1069년)에 의한 황룡파가 먼저 발전했고, 이어서 양기 방회(楊崎方會, 996˜1049년)에 의한 양기파가 발전했다. 황룡파에는 당시 사회 인물인 소동파, 왕안석, 장상영 등 유명한 문인들이 선(禪)을 배웠다. 

탄연은 자신이 지은 사위의송(四威儀頌)과 상당법어(上堂法語)를 상선편(商船便)을 이용해 절강성(浙江省) 영파(寧波) 아육왕산 광리사(廣利寺, 현 아육왕사)에 있는 육왕개심(育王介諶, 1180˜1148년)에게 보냈다. 개심은 임제종 황룡의 5세이다. 개심은 탄연의 게송과 법어를 보고, 극구 칭찬하면서 그에게 인가하는 답장을 보냈다. 개심이 머물고 있던 광리사는 부처님의 두골사리가 모셔져 있으며, 고려의 고승이며 천태종 16세인 의통조사(義通祖師, 927〜988년)가 생전에 아육왕사 승려들의 초청으로, 법문을 했던 도량이다. 여기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점은 고려 승려들이 중국 불교계에서 법력을 인정받았다는 점이다. 아육왕사는 현재도 선객들의 요람이다. 

탄연이 개심으로부터 서면으로 인가를 받았기 때문에 선사는 임제종 법맥 9대손이라고 한다. 탄연은 개심 이외에도 도경(道卿), 응수(膺壽), 행밀(行密), 계환(戒環), 자앙(慈仰) 등 노숙(老宿)들과 서신으로 교류했다. 여기서 계환을 제외하고, 모두 개심의 제자일 가능성이 높다. 

‘단속사대감국사탑비’의 탁본(한국학중앙연구원).

탄연은 시를 잘 짓고, 글 또한 잘 지었다. 이런 탄연을 비문에서는 ‘천리마(千里馬)’에 비유하고 있다. 필법이 가장 정묘하여 홍관(洪灌, 고려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과 같이 이름을 날렸으며, 서거정은 “동국의 필법에 김생(金生)이 제일이요, 요극일(姚克一), 영업(靈業), 탄연이 다음 간다”고 칭찬했다. 시격(詩格)이 또한 고상하고 글씨는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본받았다고 한다. 역사에서는 탄연을 고려의 3대 명필에 속하는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이 탄연의 법맥에서 수선사 보조국사 지눌이 나오게 된다. 이색이 쓴 진각(眞覺)국사 천희(千熙) 비문에 다음 내용이 전한다. “보조국사는 대감국사 탄연을 계승하고…”라는 부분이다. 실은 탄연이 입적하기 1년 전 보조 지눌이 탄생했으므로 직접적으로 법이 이어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보조와 탄연은 같은 사굴산문의 승려이므로 부정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필자는 여름날 늦은 오후 탄연이 머물렀던 단속사지(斷俗寺址)를 찾아갔다. 지리산 한 자락인 단속사는 굽이굽이 산길이 이어져 찾아가는데 많은 시간이 소요됐다. 이 절은 탄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최초로 선을 전한 법랑의 제자인 신행(神行)도 머물다 입적하여 ‘신행선사비(神行禪師碑)’가 이 절에 있었다. 사지 입구에 들자, 제일 먼저 시비가 필자를 맞아준다. 산청 부근에 머물던 남명 조식(南冥曺植, 1501〜1572년)이 이곳을 찾은 ‘사명당에게 준 시(贈山人惟政)’가 새겨져 있다. “꽃은 조연의 돌에 떨어지고, 옛 단속사 축대엔 봄이 깊었구나. 이별하던 때, 기억해 두게나. 정당매 푸른 열매 맺었을 때(花落槽淵石 春深古寺臺 別時勤記取 靑子政堂梅)” 시 구절에 나오는 정당매가 사찰 주변에 있다. 이 매화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수명이 600년이라고 한다. 필자가 방문한 때가 여름이어서 매화꽃을 볼 수는 없었지만, 3월이면 아름다운 매화를 피운다고 한다.

단속사지에는 동서 탑 두기가 서 있고, 당간지주만 있을 뿐이다. 탑 두 기를 앞에 두고 법당이 있었다고 예상할 경우, 그 옛날 결코 작은 도량은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사지 주변에는 두 곳의 사찰이 있는데, 한 절은 비구니 스님이 살고, 한 곳은 비구 스님이 살고 있다. 이 단속사지 주변 마을 몇 집은 정부에서 벌써 매입하여 곧 발굴 작업을 할 거라고 한다. 사지 발굴로 신행과 탄연을 비롯한 수많은 선사들의 면모가 드러나기를 고대한다.

[불교신문3424호/2018년9월15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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