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비구니회 출범 50년 특별기획 上

1967년 2월24일 최초의 비구니 조직인 우담바라회가 창립했다. 불교신문 자료사진.

■전국비구니회 출범 50년사

1968년 2월 ‘우담바라회’ 결성
최초 전국 비구니 조직 출범

불교 현대화 등 기치로 내걸고
침체기 겪지만 ‘1평 사기’ 펼치며
전국 비구니 총본산 법룡사 건립

전국비구니회가 올해로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전국 각지에 흩어져 교육, 수행, 포교, 복지 분야에서 ‘상구보리 하화중생’ 원력을 실천해 온 비구니 스님들의 역량을 한 데 모은 전국비구니회는 반백년 간 비구니 위상 강화와 한국 불교 발전에 있어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현 가입 회원 6000여 명. 서울 대전 대구 부산 등 17곳 지회 운영. 22년 간 진행된 ‘땅 한 평 사기’ 운동으로 일궈낸 서울 수서동 전국비구니회관 설립. 이는 지난 반세기 동안 수없는 부침 속에서도 끝없는 수행과 실천으로 전국비구니회가 피워낸 ‘인욕의 꽃’이자 노력의 결과물이다. 사회적, 종단적 여러 제약에도 불구하고 전국비구니회가 현 시대 한국 불교 중추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최초의 비구니 조직 결성하다

전국비구니회 역사는 196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국비구니회장을 역임한 광우스님 전언에 따르면, 비구니회 결성에 대해 의견을 처음 낸 사람은 전 동국대 학장을 지낸 김동화 박사다. 당시 김 박사는 광우스님이 창건한 정각사에서 강의를 하던 중 스님에게 “비구니 스님들이 조직을 결성해 공부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고 한다.

광우스님은 저서 <부처님 법대로 살아라>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아마 1967년이었을 것이다. 어느 날 김동화 박사께서 법회를 마치고 담소를 하다가 ‘세계에서 비구니가 이렇게 많고, 공부도 많이 하고, 제대로 역할 하는 나라도 드물다. 그러나 이런 수준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더 많은 비구니 스님이 힘을 모아 의미 있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냈다.“

김 박사 의견을 받아 광우스님은 전 비구니회장 명성스님을 비롯해 진관사 진관스님, 승가사 도원스님, 석불사 명원스님, 보문사 세등스님 등 뜻있는 스님들을 불러 의견을 모으기 시작한다. 이듬해인 1968년 2월24일, 서울 보문사에 비구니 스님 50명이 모인다. 오늘날 전국비구니회 전신, ‘우담바라회’ 시작이다. 이름은 '우담바라'에서 땄다. 비구니 스님들이 힘을 모아 전에 없던 아름다운 일을 해보자는 뜻이었다.

초대회장은 당시 보문사 주지였던 은영스님(1910~1981)이, 총무는 세등스님(1926~1993)이 맡았다. 3개월 뒤인 5월12일, 제1회 임시총회에선 구체적 사업이 거론됐다. 교육기관 설립, 포교 활성화와 조직 확대가 주요 목표로 구상됐다. 참석 인원 250명, 당시 종단에 등록된 비구니 스님이 500명인 점을 감안하면 절반 이상 모인 셈이다.

불교신문은 당시 우담바라회 창립을 다루며 다음 기사를 실었다. “이 모임은 지금까지 희박한 역사의식에서 오는 안일한 제사종교를 벗어나 생활의 도량인 가정으로부터 불법(佛法)을 일으키자는 발원을 세우고 지난 2월24일 오전11시 보문사에서 비구니 100여명이 모여 ‘대한불교비구니우담바라회’를 발족했다. 이 회는 1967년 11월 초순 서울과 지방의 뜻있는 비구니 스님들이 발기해 지금은 상당수의 회원이 가입되어 있으며 시내 동대문구 숭인동 청룡사에 사무소를 설치하고 사업을 추진 중이다. 앞으로 우담바라회는 전국비구니 사암의 실태 파악과 획일적인 교육 과정 그리고 포교 내용을 통일하는 교화 대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한다. 현재 우담바라회에서 구상하고 있는 사업 목표를 보면 총림의 설치와 전국비구니에 대한 실태조사 착수, 그리고 중앙수도원을 마련할 것이라고 한다”(불교신문 239호 1968년 3월17일자)

들불처럼 번진 조직 확대

임시총회 후 비구니 스님들은 본격적으로 조직 확대에 나서기 시작했다. 교육기관 설립, 포교 활성화와 조직 확대가 주요 목표로 거론됐다. 그리고 이를 포괄하는 총림을 두기로 했다. △총림의 건립 △포교의 합리화 △복지사회건설 등이 3대 강령으로 채택됐다. 여기에 창립을 주도한 광우스님, 진관스님, 명성스님, 세등스님 등이 발품을 팔아 비구니 스님을 모으기 시작하자 회원 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창립 초기, 조직 확대에 중점을 둔 사업은 비구니 스님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총림 건립이었다. 비구니 스님들이 구상한 총림은 스님들이 모여 공부를 하고 수행도 하며 포교도 하는 종합 수도도량이었다. 창립총회에서 광우스님이 언급했듯 산중 사찰에서 수행을 하기보다 도심에서 현대적 교화를 펼쳐야한다는 것이 당시 비구니 스님들 생각이었다.

비구니 스님들은 이를 시작으로 총림 설립을 위한 10개년 계획을 세운다. 서울 근교에 5만평 부지를 확보해 비구니 스님을 위한 각종 시설을 설립한다는 것이 구체적인 복안이었다. 이 안에는 보리원, 대중원, 교역원과 13개 부설 종합기구 그리고 법당 대강당 설립에 대한 내용 등이 담겼다.

우담바라회는 빠르게 조직을 확장하고 총림 설립 계획을 하나씩 실행에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1969년 4월16일 열린 제2차 정기총회에서는 회원이 600명으로 늘어나는 한편, 강원 전남 인천을 제외한 전국에서 조직이 꾸려졌다. 같은해 9월에는 부지를 마련, 총림 건립을 가시화 시켰다. 장소는 서대문구 갈현동 1만5000평이었다. 수국사 주지 희경스님이 희사한 땅이었다. 조직화도 진전을 이뤄 숭인동 청룡사에 본부를 두고 서울 정각사, 승가사, 진관사, 보문사, 서봉사, 부산 반야사, 수덕사 견성암, 법주사 수정암, 광주 심광사, 전주 안홍사, 의정부 야루암, 화성 화운사 등에 지부를 뒀다.

이같은 노력에도 우담바라회 활동은 1970년대 들어 침체기에 들어선다. 수국사가 기증하려던 부지가 그린벨트 정책으로 검토되면서 우담바라회 활동이 사실상 중단위기에 놓였기 때문이다. 총림 설치가 좌절되면서 비구니회관 건립은 동력을 잃는다.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자리 잡은 전국비구니회관 전경. 비구니 스님들 총본산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는 비구니 스님들이 22년 만에 이뤄낸 결실이다.

다시 한 발 앞으로

1980년 세등스님 은사 스님 기일에 모인 비구니 스님들은 다시 의기투합해 화성 화운사 지명스님을 3대 회장으로 선출한다. 명칭도 이 때 ‘우담바라회’에서 ‘대한불교조계종 전국비구니회’로 바꿨다. 1981년에는 성북동 성라암에 비구니대학(차후 중앙승가대 편입)을 개교해 재기를 꿈꾸는 한편, 1985년에는 언양 석남사에서 개최된 계율 특강에 비구니 원로 중진 스님들이 모여 비구니회 재건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한다.

전국비구니회가 복지 사업에 조직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한 것은 1980대부터다. 1988년 서울시로부터 양천구 목동청소년회관을 위탁받은 것을 시작으로 1995년에는 양천구민체육센터를 맡아 본격적 복지 사업에 나선다. 1990년 조계사 내로 사무실을 옮겨 단일 수행도량 건립 원력을 세운 비구니회는 이어 1992년 강남구 수서동에 비구니 회관 부지를 불하받는다.

1980년부터 시작된 ‘땅 한 평 사기’ 운동도 22년 만에 결실을 맺는다. 전국비구니회는 1998년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지하 2층 지상 3층, 총면적 2500여 평의 비구니회관을 착공, 2003년 전국 비구니 스님 총본산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 건립을 마무리 짓는다. 전신 우담바라회가 1968년 1월 결성된 이래 마땅히 거처할 공간 한 평 없이 조계사 구석 3~4평짜리 가건물에서 곁방살이하던 시절과는 달리 비구니 스님들 위상과 활동 역량이 50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진 셈이다. 흩어져 있던 역량 결집, 선거에서의 참종권 확대, 사회적, 종단적 주요 사안에 대한 6000여 명 비구니 스님들 의견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전달하는, 그 중심에 지금의 전국비구니회가 자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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