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준영 변호사의 ‘인권, 자유를 논하다’

지난 8월21일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에서 열린 ‘시민민주주의 아카데미’에서 재심전문 박준영 변호사가 강의를 하고 있다.

 

지난 8월21일 저녁 서울 종로노인종합복지관(관장 정관스님)에서 열린 시민민주주의 아카데미 ‘시민, 민주주의를 말하다’ 10번째 시간에 박준영 변호사가 ‘인권, 자유를 논하다’를 주제로 강의를 했다. 박준영 변호사는 수원 노숙소녀살인사건, 익산 택시기사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강도치사사건 등을 맡으며 '재심' 전문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으며 최근 개봉했던 영화 ‘재심’의 실제 주인공이기도 하다. 

 

과거 부랑아 수용 시설 
형제복지원 인권유린사건 
513명 사망…해결 안 돼 

현재 장애인 수용 시설
‘격리’ 인권보장 어려워 
‘돌봄’ 개인 가족 책임보다 
우리 사회 모두의 책임 

사회적 약자 시설 수용 
인권과 자유 측면에서 
진지한 고민 필요 

제 소개를 하고 시작하겠다. 저는 완도군 보길도 바로 앞 섬 노화도에서 자라고 학교를 나왔다. 2002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수석으로 합격한 건 아니고 어렵게 1점 차로 합격했다. 밖에선 재심 전문변호사로 불리기도 한다. 재심이란 것은 판결이 확정된 것을 다시 뒤집는 것을 하는 것이다. 서울 동부지검에 꾸려져 있는 검찰과거사위원회 진상조사단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인권과 자유를 논하는 강의는 처음이다. 우리 사회에서 실제 일어났던 일어나고 있는 이야기들을 통해 인권과 자유를 이야기 하고자 한다. 

먼저 전국 최대 부랑아 시설이였던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인권유린 사건으로 1975년 12월15일 발표된 내무부 훈령 410호 ‘부랑인의 신고, 단속, 수용, 보호와 귀향 및 사후관리에 관한 업무처리 지침’에 따라 형제복지원에 수용된 사람은 2~3만이었다. 하루 10시간 중노동에 주어진 것은 토큰 1개 혹은 300~500원 일당. 제식훈련과 욕설, 구타와 성폭행이 일상화된 형제복지원에서 반항과 저항은 무자비한 폭행을 낳았다. 

1975년부터 1986년까지 12년 동안 공식적으로 수용시설 안에서 513명이 사망했다. 20, 30대 성인들 뿐만 아니라 어린 아이도 믿기 힘든 사인으로 죽었다. 또한 시신 중 일부는 암매장 됐고 또 일부는 해부용 시신으로도 팔려나갔다고 한다. 특별히 죄를 지어서 시설에 끌려간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 사연을 보면 7살, 5살 남매가 대전역에서 내려야 하는데 잠이 들어 부산역에서 내려 방황하다가 시설로 끌려갔다. 하교하던 한 중학생은 경찰을 따라 파출소로 갔다. 가방을 열어보니 빵하고 우유가 들어 있었다. 경찰은 훔친거냐고 물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는 물건이었는데 창피해서 학교에서 받았단 이야기를 안했다. 때리면서 인정하면 집에 보내준다고 했는데 인정했더니 복지원으로 보냈다. 왜 경찰들이 형제복지원으로 보냈을까. 경미한 범죄에 대해 즉결심판에 보내면 근무평점이 3점, 형제복지원에 보내면 5점을 받았다고 한다. 국가는 수용시설에 사람 수에 따라 보조금을 지급했다. 형제복지원에는 3000명이 넘는 수용자가 있었다. 

형제복지원에서의 인권침해는 1970~ 80년대 계속되다 1987년 세상에 알려졌다. 전두환 정권이 1981년도에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유치를 확정, 이후 길거리에 부랑자들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걸인, 껌팔이, 넝마지기들을 수용시설에 가두기 시작했다. 전국의 복지시설이 급격히 늘었다. 운영자들에겐 수용자 한사람 한사람이 ‘돈’이였고 경찰들에겐 ‘점수’였다. 전국 수용시설 수십 곳이 다 그랬다. 87년 세상에 알려진 사건이지만 지금도 진상조사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당시 피해자들에 대해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고 있다. 피해자들 일부가 국회의사당 앞에서 300일 가까이 노숙농성 중이다. 이들은 ‘형제복지원 피해사실을 확인해주고 국가는 책임져라’라고 농성을 하고 있다. 

그해 초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터졌다. 민주화를 앞당긴 사건으로 사회적 의미는 대단히 크다. 

하지만 같은 해에 세상에 알려진 513명이나 죽은 인권유린사건은 관심을 받지 못했다. 

1987년 당시 2년 6개월 형제복지원에 있던 수용자가 검찰에 탄원서를 보낸다. “인간의 권리는 평등하다고 했다. 물론 박종철 군은 대학을 다니는 지성인이고 우리는 시설에 갇혀있는 부랑자이다. 그래도 너무 억울하다.” 

‘그 때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지 않았나. 지금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사회구조이다. 어떻게 자유를 구속할 수 가 있나? 지금은 아니다’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음은 장혜영·혜정 자매이야기다. 중증발달장애인 혜정을 언니인 혜영이 잘 돌봐줬다. 하지만 부모님들이 장애 있는 셋째를 집에서 키운다는 게 부담스러워 혜정이 12살 때 시설에 보낸다. 우리 사회에서 장애인의 돌봄 부담은 오로지 가족에게 책임이 돌아간다. 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가족들은 눈물을 머금고 다른 가족도 살아야 한다는 이유로 장애가 있는 아이를 시설로 보내게 된다. 

혜정은 갇혀있는 공간에서 16명과 함께 살았다. 선생님 2명이 생활 지도를 했는데 발달 장애인을 위한 돌봄이 이뤄지는 게 아니라 관리자의 입장에서 돌봄이 이뤄지게 된다. 화장실 자주 간다고 물 안주고 이불빨래 해달라고 하면 바닥에 재우고 현재도 이런 인권침해 이뤄지고 있다. 혜정은 18년 동안 시설에서 살았다. 혜정이 자주 하는 말이 ‘어른이 되면’이라고 한다. 무언가 하고 싶으면 요청하면 담당 선생이 12살 때부터 ‘그건 어른이 되면 하는거야’ 라고 해서 성인이 됐는데도 ‘어른이 되면’을 입에 달고 있다. 

혜영은 어느 날 내 동생이 그 시설을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됐고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1년 째 살고 있다. 

발달 장애가 있는 동생을 시설에서 데리고 나와 같이 살고 있는 혜영에게 일반적인 사람들은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장애인 시설을 어떻게 운영하는가에 따라 다를 수 있다. 훌륭한 뜻을 가진 복지가나 종교인들이 운영하는 좋은 시설이 있다면 매일 부부싸움하고 애들 밥도 못 챙겨주는 부모 밑에 있는 것보다 낫지 않을까.”

혜영은 “‘비장애인들에게 5성 호텔에서 평생 갇혀서 살래?’ 묻는 다면 뭐라고 할까? 시설이라고 하는 건 아무리 아름다운 말로 포장해도 장애인을 ‘격리’하겠다는 것이고 ‘이 사람은 2등 인간이기 때문에 1등 인간과 함께 살아가기에는 모자란 사람들이다’란 전제가 깔려 있다. 어떤 능력을 가졌건 자기 인생을 결정할 권리는 그 사람에게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라고 이야기한다. 

또 “‘지적 장애인들은 자기 인생의 결정권을 행사하겠다는 욕구 자체가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이건 우리가 편하자고 하는 생각일까?”라는 질문에 혜영은 “그렇다.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일찌감치 격리해 두니까 충분히 할 수 있었던 것도 더더욱 할 수 없다. 세상으로 격리시켜 놓은 채, ‘이 사람들에게 다른 행복이 있을 거야, 갇혀 있어도 행복할거야’ 우기는 것이다. 스웨덴 같은 선진국에선 아예 법으로 시설을 폐쇄했다. 사람은 반드시 사회에 나와 살아야 한다고, 정부 지원금을 끊는 방식으로 모든 장애인 수용시설을 폐지했다”며 “장애인에 대한 돌봄은 아이들에 대한 돌봄이 그렇듯이 사회 전체의 일이다. 돌봄은 가족들 개인이 감당할 책임이 아니라 모두의 책임으로 간주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앞서 이야기 한대로 1970, 80년대 거리를 청소한다는 명목으로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시설에 수용되었고 지금은 장애가 있다는 이유 그리고 병약하다는 이유로 약자들이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있는 상황이다. 

장애인 수용시설만의 문제일까. 어르신들 앞에서 이런 말씀 드려서 민망하긴 하지만 우리 모두의 문제다. 나이 들어서 누구나 시설에 가야하는데 인권, 자유라는 것이 없다. 우리가 이걸 지금 해결해 놔야 한다. 사회적 약자의 시설 수용 문제를 통해 인권과 자유를 고민해 봤으면 한다. 

[불교신문3423호/2018년9월12일자] 

정리=김형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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