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월이 오면
은사이신 법장스님은
13주기가 되고
부친은 2주기를 맞이한다

스님께서 너털웃음 지으시며
그 너른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시며 
‘진광아, 나는 너를 믿는다. 
중사상으로 잘 사소!’라며 
살포시 미소 지으실 듯하다
두 아버님 모두 여여 하시지요!

구월이 오면 두 분 양가(兩家) 아버님의 기제(忌祭)가 있다. 은사이신 법장(法長) 스님은 13주기가 되고, 부친은 2주기를 맞이한다. 구월이면 구월 국화가 다시 피어나듯, 그렇게 님을 향한 그리움과 덕화를 되새긴다.

총무원장 수행사서로 2년간 일하다가 사표내고 6개월간 중남미 배낭여행을 했다. 중간에 급거 귀국해 스님을 서울대 병원에서 다시 뵈었다. 수술후 휠체어를 타신채 “심장수술이 잘 되었으니 언제 히말라야 설산이나 함께 가자꾸나!”라고 말씀하시며 환히 미소 지으신다. 그런데 그것이 마지막일 줄이야!

스님을 눈물로 떠나보내 드린 후에 선방으로 들어가 정진을 하고는 그토록 가시고 싶어 하셨던 티벳 히말라야로 향했다. 초모랑마 히말라야 베이스 캠프 아래 팅그리라는 마을 언덕에서 스님의 생전 옷가지며 가사를 태워 드렸다. 그 마을의 숙소집 딸인 ‘케샹’을 만나 어쩌다 티벳 딸래미로 삼았다. 내가 떠날 적에 기둥에 기댄채 하염없이 눈물로 전송하던 케샹을 보며 나는 생각했다. 우리 스님께서는 이곳 초모랑마의 허공과 바람, 그리고 케샹의 눈동자 속에 영원할 것이라고! 동국대 일산병원에 우리 스님 시신을 기증했었는데, 3년뒤에 비로소 화장해 스님의 유골이 덕숭산으로 돌아왔다. 그것을 생전에 주석하시던 화소대와 근처 덕숭산 곳곳에 골고루 뿌려 드렸다. 그후로 지금까지 해마다 다례일은 찾아오건만 절반만 겨우 수덕사에서 지냈다. 나머지는 이란 이스파한과 실크로드 돈황, 그리고 러시아 바이칼 호수와 탄자니아 잔지바르섬 등 외지에서 홀로 혹은 순례 대중과 함께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2년 전에 돌아가신 부친은 서당을 하시던 엄친께 한학을 배우셨다. 언젠가 손수 ‘정직하고 근면하며 솔선수범’이라 가훈을 휘호 하셨다. 내가 아홉 살인가 국한문 혼용의 농민신문을 읽게 하시고, 열 살부터는 조모의 제사 때에 축문을 외게 하셨다. 한학과 시문, 그리고 역사에 대한 관심과 사랑은 모두 부친의 덕화가 아닐 수 없다. 추운 겨울날에 장사를 위해 커다란 짐 자전거를 끌고 시내로 가실적에 뒷자리에 태워주곤 하셨다. 그때 당신의 너른 등에 얼굴을 묻은채 허리를 꼬옥 껴안던 느낌과 추억이 새롭기만 하다. 어머님께서 멀리 친척집에 가실 적마다 손수 끓여주시던 어묵국은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도 아버님의 사랑의 맛과 향으로 내 몸이 기억한다. 평소 엄하셨지만 언제나 친척집 대소사에 함께 다니며 주도와 상도를 부친께 배웠다. 그런 까닭에 내게 부친은 아버님이자 스승이고 또한 벗과 같았음은 물론이다. 

부친께서는 시대를 잘못 태어났건만 그래도 가정과 자식들에게 희망을 걸고 자존과 성실로 일관한 불우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내겐 그 누구보다 크고 자랑스럽고 존경해마지 않는 큰바위 얼굴 같고 태산같은 존재이셨다. 생전에 곡부나 추현 등지의 유교성지나, 시안이나 베이징 등의 고도를 함께 여행하지 못한 것이 아쉽기만 하다. 또한 출가후 두 번째로 찾아간 것이 부친의 장례식장이었음이 한스럽기 그지없다.

이번 은사 스님 다례식에는 평소 즐겨 드시던 짜장면 한 그릇 영전에 올려 드려야겠다. 지금도 스님이 자주 가시던 중식당을 보면 일부러 찾아가 두 그릇 시켜 놓은채 마주한 듯 함께 먹는다. 스님께서 너털웃음 지으시며 그 너른 손으로 어깨를 두드리시며 “진광아, 나는 너를 믿는다. 중사상으로 잘사소!”라며 살포시 미소 지으실 듯 하다. 두 아버님 모두 여여(如如) 하시지요?

[불교신문3423호/2018년9월12일자] 

진광스님 논설위원·조계종 교육원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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