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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28> 가지산문 운문사 원응국사 학일“운문사 융성, 근래 이런 적 없었다”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9.07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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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성에 차등 견해 내지 말아야”
경율론 삼장 통달…반야삼매 증득
승과고시 우수한 성적 거둔 선사

77세에 청도 운문사로 돌아오자
학자와 귀족들 몰려와 문전성시
‘가지산문 선풍’ 또한 크게 진작

비문에 ‘선종5가’ 특성 종합정리
‘새로운 방향 선풍 모색’ 사료돼

귀천 차별 없이 많은 질병 구해
‘대반야’ 염송…왕자소생 일화도 
거듭 고사하던 ‘왕사’ 수락한 후

기우제로 큰 비 불러 가뭄 해소
만년엔 ‘축원’으로 산불 끄는 등  
신이한 이야기도 수없이 전해져 

원응국사 학일 선사가 만년에 주석하며 선풍을 크게 진작했던 경북 청도 운문사 전경.

신라 말기, 선종이 유입될 때는 마조계 홍주종 선(禪)이 주류를 이루었다. 다음 위앙종 계통의 선사상이 신라에 유입되고, 고려 초기에는 청원·석두계 조동종 선이 유입됐다. 이어서 광종 무렵부터는 법안종 선풍이 우리나라에 수입됐다. 

앞 원고, 고려 초기~중기에 이르는 동안 선종은 약화되고, 화엄, 유식, 천태종 등 교종이 발전되었다고 언급했다. 그런데 한번쯤 이점을 생각해보자. 기원전 1세기 무렵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발전했다고 이전의 부파불교 교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수세기 동안 부파불교 교단은 대승불교와 함께 공존했다. 이처럼 신라 말부터 발전된 선종이 고려에 들어와 갑자기 실각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잠시 주춤했지만 선사상은 면면히 흘렀기 때문에 혜거(慧炬, ?~974년)국사 담진과 같은 인물이 나올 수 있었고, 담진의 제자 탄연도 활동했다. 또 한분의 선사가 있는데, 담진과 동시대에 활동했던 원응국사 학일이다. 자료에서도 읽을 수 있지만, 학일선사는 올곧은 대쪽 같은 분이라고 보면 맞을 듯하다. 

학일(學一, 1052~1144년)선사는 고려 초기~중기 가지산문 승려이다. 학일은 가지산문 문중에서도 종장(宗匠)이었으며, 담진보다는 당시 선풍을 크게 드날렸던 선종의 대표적 인물이다. 학일은 충북 서원(西原, 현 청주시) 출생으로 성은 이(李) 씨, 자(字)가 봉거(逢渠)이다. 부친은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다. 선사는 11세에 출가해 진장(眞藏)의 제자가 돼 13세에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혜함(惠含)의 문하에서 열심히 정진해 선지(禪旨)를 얻고 경율론 삼장에 통달했으며, <대반야경>의 반야삼매(般若三昧)를 증득했다.

선사는 1084년 32세 무렵, 개성 광명사(廣明寺)에서 열린 승과고시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했다. 이전의 선사들의 행적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던 학일의 색다른 모습이 있다. 선사는 귀천을 가리지 않고 많은 사람의 질병을 구해주었다는 점이다. 숙종의 왕자(훗날 원명국사 징엄)가 9세 때 큰 병을 앓아 죽음에 처하자, 대각국사 의천(義天, 1055~1101년, 문종의 넷째 왕자)이 급하게 학일에게 왕진해 달라고 요청했다. 학일이 왕궁에 도착해 가만히 ‘대반야(大般若)’를 염(念)하자 왕자가 소생했다. 선사가 ‘반야’를 염해 기이한 일이 발생했던 것은 사조 도신(四祖道信, 580~651년)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도신의 선사상은 일행삼매(一行三昧)인데 <문수설반야경>에 의거한다. 도신이 27세 무렵, 길주사(吉州寺, 현 중국 강서성 길안)에 머물렀을 때, 길주성이 70여 일간 도적떼들에게 포위되어 있었다. 성 안의 우물까지 말라 백성들이 곤경에 처했는데, 도신이 길주사에 도착하자, 우물이 솟았다. 또 도신이 백성들에게 ‘반야’라고 크게 염송토록 하자, 도적들이 물러났다는 기록이 <고승전> ‘감통(感通)’편에 전한다. 선사로서 중생들의 병을 치료해준 근자의 선사로는 경허 선사의 제자인 수월(水月, 1855~1928년)이 있고, 한마음선원의 대행(大行, 1927~2012년)도 포교 방편으로 치료해주었다. 학일이나 도신의 신이한 이야기는 진위 여부를 떠나 그 시대에 선사가 미쳤던 영향력이 후대 <고승전>에 편집되면서 증첨되었을 것으로 본다. 

청도 운문사 원응국사비, 상단에 ‘圓應國師碑銘’이라고 새겨져 있다.

왕자의 병을 낫게 해준 일로 인해 학일의 명성이 높아졌고, 점차 선사를 찾아오는 왕실이나 귀족들의 발길이 빈번했다. 이런 가운데 선종(宣宗, 1084~1094년 재위)의 동생인 부여공(扶餘公)과도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이 무렵, 송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대각국사 의천이 천태종을 개창했다. 의천은 왕족이라는 신분도 있지만, 매우 의욕적으로 불교계를 이끌었고, 각계의 의견을 수렴해 종단을 통합하며, 대장경을 간행했다. 

그런데 의천에 의해 천태종이 개창될 때, 유학을 마치고 고려로 돌아온 선사(광종이 법안종 영명연수에게 유학 보낸 36인)들이 천태종으로 개종을 하면서 주요 역할을 했다. 대략 덕린, 익종, 경란, 연묘선사 등이다. 당시 선종 승려의 70%가 천태종으로 개종했는데, 왕명에 의해 천태종으로 옮겨간 경우도 있고, 직접 의천 문하로 찾아가 천태종 승려가 되기도 했다. 원응국사 학일의 비문에 이 내용이 잘 묘사되어 있다. “대각국사가 송(宋)에서 유학하여 화엄 교리를 전해왔으며, 아울러 천태교관을 배워왔다. … 이때 선종 승려들 가운데 천태종으로 돌아선 자가 10에 6, 7할이나 되었다. 학일은 조도(祖道, 禪風)가 쇠퇴하는 것을 슬퍼하면서 홀로 서겠다는 마음을 확고히 했고, 몸으로라도 그 임무를 다하려고 했다. 대각국사 의천이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와 (천태종으로 개종할 것을) 몇 차례 권했으나 선사는 끝끝내 명을 받들지 않았다.”

학일의 비문에 적시(摘示)된 대로 당시 선종이 위기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끝까지 선을 고집하며, 선종 승려로 남아 있던 인물이 혜조국사 담진과 학일이다. 선사가 1099년 47세 무렵, 의천이 홍원사(弘圓寺, 개경의 대표적 왕실의 원찰)에서 원각회(圓覺會)를 개설하고, 학일을 부강사(副講師)로 초빙했지만, 학일은 “선(禪)과 강(講)이 교감(交濫)하는 일을 감당할 수 없다”며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학일은 왕명에 의해 법주사 주지가 됐다. 1106년 54세 무렵, 학일은 ‘삼중대사(三重大師)’가 되어 가지사(迦智寺) 주지로 잠시 머물다 곧 바로 구산사(龜山寺)에 상주했다. 다시 이어서 1108년에 ‘선사(禪師)’ 품계를 받았고, 59세에 내제석원(內帝釋院, 개성의 궁궐 밖에 있던 사찰)의 주지가 됐다. 학일은 1114년 ‘대선사(大禪師)’ 품계를 받았으며, 63세에 개성 안화사(安和寺)의 주지가 됐다. 68세 무렵에는 예종이 왕사가 되어달라고 간청했으나 선사는 이를 사양했다. 얼마 안 되어 예종이 승하한 뒤 인종(1123~1146년 재위)이 즉위하여 학일에게 다시 왕사가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선사는 부득이 거절할 수 없어 수락했다. 1123년 봄과 여름에 큰 가뭄이 들었는데, 왕궁에서 선사에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달라고 부탁했다. 선사가 주관해 기우제를 지내고, 이후 큰 비가 내렸다. 

원응국사 학일 선사가 63~68세 때 머물렀던 개성 송악산 안화사. <파한집>에는 이 절이 건물이 웅장하고 단청이 화려해서 고려에서 으뜸이었다고 전한다. 2014년 북한은 독일 지원을 받아 안화사를 보수했다. 출처=<북한의 전통사찰> (조계종 민추본)

72세의 학일은 왕에게 운문사로 돌아갈 것을 간청했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고 선사에게 안남(安南)의 경암(瓊嵒)에 머물도록 했다. 마침내 1129년, 77세에 선사는 청도 운문사로 돌아왔다. 선사가 운문사에 머물자, 학자와 귀족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운문사가 깊은 산골에 위치한데다 고려 수도, 개성과는 매우 먼 거리인데도 수많은 이들이 방문해 운문사가 번잡했다고 하니, 당시에 선사의 선풍이 결코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학일은 운문사에서 제자들 지도에 힘을 쏟으면서 점차 승려들이 운문사로 집결했다. 비문에 의하면 “운문사 산문의 융성함이 근래 이래로 이런 적이 없었다”라는 내용으로 보아 재가자뿐만 아니라 가지산문의 선풍 또한 크게 진작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학일이 왕사로 지낼 때 운문사에 토지 200결과 노비 500명을 하사했다고 하니, 당시 운문사가 선종의 큰 종찰(宗刹)이나 다름없었다. 학일 입적 후 100년이 넘어 13세기에 일연이 운문사에 머물렀는데, 운문사가 고려 중·후기까지 선종사찰로써의 면모를 그대로 유지했었다고 사료된다. 

1142년에 산불이 크게 나 대중이 끄지 못할 때, 88세 노구의 선사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고 산을 향해 축원하자, 갑자기 비가 쏟아지면서 불이 꺼졌다는 신이한 이야기가 전한다. 선사는 92세에 병이 들었는데, 한 달 후에 단정히 앉은 채로 입적했다. 왕이 예를 갖추어 학일을 국사(國師)로 추증하였고, 시호를 원응(圓應)이라고 했다(雲門寺 圓應國師碑). 학일의 제자에는 대선사 품계를 받은 익현(翼賢)과 중립(中立), 선사 품계를 받은 정린(正鄰), 경웅(景雄), 경옥(景玉), 연의(淵懿), 가관(可觀) 등 13인, 삼중대사 9인 이외에도 수십여 명이 있다. 

원응국사비에서 학일의 선사상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전한다. “인종 1년(1123년), 선사가 승과를 주관했는데, 학인들이 자기의 불성(佛性)이 두 가지라고 선담(禪談)을 나누었다. 이에 학일은 ‘불성이란 부처나 중생 모두 똑같은데, 어찌 두 가지 견해로 나누어지는가? 불성에 차등하다는 견해는 내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한편 원응국사비문에 선종 5가(潙仰宗, 臨濟宗, 雲門宗, 曹洞宗, 法眼宗)의 특성을 요약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시 천태종 성립을 계기로 남종선의 특징을 종합하면서 새로운 방향의 선풍을 모색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만년에 운문사에서 선풍을 진작시키고, 이곳에서 입적한 학일선사에 관한 원고를 작성하는 동안 필자는 스승인 운문사 회주 명성스님과 학일선사가 오버랩 됐다. 1000여 년 전에 그랬던 것처럼, 현 운문사는 승가로서나 비구니 사찰로써 불교사에 한 획을 그은 도량이다. 전세계적인 도량으로 면모를 키우고, 2000여 명의 제자들을 키운 명성스님의 역할이 결코 적지 않기 때문이다.

[불교신문3422호/2018년9월8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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