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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에서 만나는 우리역사] <13>청주 용화사근대 여성교육 지도자 황비의 꿈 서린 가람
무심천 변에 묻혀있던 석불을 모신 용화사 용화보전에 백중을 맞아 청주의 신도들이 기도를 올리고 있다.

청주는 중부 지방의 교통 중심지이며 교육 도시로 유명하다. 실수로 아이를 잃은 어머니가 삭발하여 비구니가 되었다는 전설이 전해오는 무심천(無心川)이 시내를 가로지르고 고려 시대 인쇄문화 본거지로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로 기록된 직지심체요절을 찍은 흥덕사터가 있는 불심(佛心)의 고장이다. 청주를 대표하는 사찰이 용화사다. 충북불교회관이 있는 용화사는 청주시민들의 기도처이자 수행도량 시민들에게 다가가는 복지도량으로 불자들의 귀의처 역할을 하고 있다. 

 미륵불 세상 염원 용화사

용화(龍華)는 미륵불의 세상, 정토를 말한다. 미륵(Maitreya)은 ‘친구’를 뜻하는 미트라(mitra)에서 나온 ‘자비’라는 뜻을 갖고 있다. 수미산 위 도솔천에 머물면서 중생을 교화하는 보살로 석가모니 열반 후 56억7000만년이 지난 이후 세상에 몸을 나투어 중생을 제도한다는 미래의 부처님이다. 미륵은 신라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구원자였다. 삶이 고달프고 힘든 이들은 미륵의 하생을 간절히 염원했다. 궁예, 후천개벽을 내세웠던 동학이 그 예다. 무심천변의 청주 용화사에도 좋은 세상, 평화롭고 행복한 삶에 대한 염원이 담겨 있다.

지난 8월25일은 백중이었다. 목련존자가 아귀지옥에서 고통 받는 어머님을 안거를 지낸 고승들에게 공양을 올려 구제했다는 경전에 따라 안거를 마친 수행자들에게 공양 올리는 날이다. 수행자 뿐만 아니라 농부와 머슴 심지어 소 까지 하루 농사일을 쉬고 배불리 먹던 여름 최대 명절이다. 농경사회가 지나고 도시화가 되면서 세속의 백중은 거의 사라졌지만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기도하는 우란분절은 여전히 사찰에서 살아 숨쉰다. 용화사 앞 도로 좌우까지 승용차가 가득 차고 경내는 신도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 신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용화보전(龍華寶殿)은 참배하려는 신도들의 줄이 길게 이어져 순서가 올 때까지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용화보전은 그 규모가 청주 시내에서 한눈에 들어올 정도로 크고 그 속의 장륙상도 우람하기 짝이 없다. 보물로 지정된 고려시대 불상으로 최고 높이 5.5m에 이른다. 원래 7구 였지만 앉아있는 4구의 불상이 함께 있다가 극락전으로 옮겼다. 이 불상에 얽힌 내력이 기막히다. 

1901년(조선 고종 38) 어느 날 궁궐에서 잠자던 엄비(嚴妃)가 꿈을 꾸었다. 천지가 개벽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엄비가 무슨 일이 일어났나 싶어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 보는데 일곱 색깔 무지개가 자신이 머물고 있는 내당에서 시작돼 하늘을 향해 영롱하게 드리워져 있었다. 각각의 무지개를 일곱 미륵이 타고 집으로 들어왔다. 이에 엄씨가 절을 하니 일곱 미륵은 ‘우리는 청주의 한 늪에 있는데 어려움에 처해 있다. 절을 짓고 구해 달라’고 했다. 

엄비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그녀는 돌아가신 친정 부모를 위해 신촌 봉원사에 탱화를 조성하기도 했다. 엄비는 청주 군수 이희복을 불러 무심천 변의 석불을 찾아낼 것을 지시하니 이희복이 자신도 3일 전 같은 꿈을 꾸었다며 놀라워했다. 무심천에 묻혀있던 7구의 불상을 찾아내 상당산성(上黨山城)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옮겨 절을 짓고 미륵 세상을 염원하며 용화사라는 이름을 지었다. 6·25 한국전쟁 때 불에 타면서 석불은 또 노상에 방치됐는데 1972년 신도들이 모금하여 다시 미륵보전을 세웠다. 1993년에 그 법당을 헐고 지금의 2층 법당 용화보전을 지었다. 

 용화보전 지어 불상 모셔 

용화사는 엄비가 처음 세운 절이 아니다. 고려시대에는 마을 중심에 절이 있었다. 조선 억불정책으로 사찰이 하나 둘 씩 폐사되고 그 자리는 향교가 들어서거나 관이 차지했다. 지방 시나 군 학교 등에 남아있는 탑, 당간지주, 석재 등이 그 흔적이다. 용화사도 고려시대 대찰 사뇌사 였음이 1995년 무심천 주변 발굴조사에서 밝혀졌다. 수많은 전란과 숭유억불 과정에서 용화사도 사라지고 그 속의 유물도 무심천에 함께 묻혔다. 그렇게 오랫동안 묻혀있던 석불이 왕비와 그 고을을 다스리던 군수의 꿈에 나타났으니 무엇인가 말하려는 뜻이 있었을 것이다. 

미륵을 현몽한 엄비는 1854년 태어나 1911년 5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후궁으로 공식 명칭이 순헌황귀비 엄씨(純獻皇貴妃 嚴氏)다. 그녀는 민비 이후 고종을 뒷바라지한 후궁으로 치부하기에는 궁에서의 역할과 삶이 예사롭지 않다. 제 정신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왕을 대신해 용기와 지혜로 변하는 세상에 맞춰 새로운 나라를 만들고자 고군분투했던 열혈 신세대 여성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상이 일본에 의해 무참하게 살해당한 민비를 명성황후로 받들지만 주체적이며 적극적인 삶을 산 여성의 표본은 엄비가 대표한다. 

기독교 선교사들이 근대 교육을 이끌 때 민족학교를 건립하고 후원했으며 문벌이나 집안의 도움 없이 스스로 힘으로 여성 최고의 지위에 올랐다. 용화사를 창건하며 미륵세상을 염원하는, 불교를 믿는 왕실의 여인이면서 근대 여성교육을 위해 적극 나선 깨어있는 신여성이었다. 기도와 종교의 힘으로 새 세상을 염원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뒷받침할 현실 개혁에도 나선 것이다. 

종로 육전거리에서 장사를 하던, 몰락한 양반 가문 집안에서 태어난 엄씨는 5세에 궁녀로 입궁하여 내전상궁에 올라 민비를 가까이에서 모시다가 고종의 승은을 입었지만 이 때문에 민비의 질투로 궁궐 밖으로 쫓겨났다. 엄비가 재기한 것은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 당하면서다. 그녀는 고종의 부름을 받아 재입궁 한 뒤 본격적인 역량을 발휘한다. 평범한 상궁이었던 엄씨가 사실상 조선의 마지막 국모 역할을 수행할 수 있었던 것은 아관파천(俄館播遷)을 성공적으로 이끌면서다. 을미사변으로 고종은 일본에 의해 살해되는 불안감에 시달렸다. 이에 고종은 덕수궁을 나와 인근의 러시아 공사관으로 몸을 숨길 계획을 세우는데 은밀하고 좁은 소로(小路)로 안전하게 도피시킨 인물이 엄비다. 

그녀는 러시아 공사관에서 고종의 숙식을 전담하고 정신적으로도 고종에게 위안을 제공하며 근왕세력의 중심으로 자리잡았다. 궁으로 돌아온 뒤에도 그녀의 황실 내 영향력은 줄어들지 않았다. 오히려 영향력은 더 커졌다. 평민 출신인 그녀는 황후에 오를 수 없었지만 민비 사후에도 고종은 비를 들이지 않고 엄비가 그 역할을 했다. 사실상 황후 역할을 한 셈이다. 그녀의 나이 42세에 아들을 잉태하여 대한제국의 선포와 때를 같이 하여 은을 낳았으니 그가 바로 영친왕이다.  

 기독교 아닌 민족교육 주도 

그녀는 여성교육이 무엇보다도 절실하다는 것을 알고 이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교육 사업에 관심이 컸던 그녀는 양정의숙(1905), 진명여학교(1906), 명신여학교(1906)를 차례로 설립했다. 명신여학교는 숙명여대의 전신이다. 종로구 수송동 위치했던 명신여학교는 황실 보조금으로 운영됐으며 고종과 순헌황귀비가 내린 토지 280만평을 기본재산 삼아 양반 가문 자녀에게 무료교육을 했다.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 숙명여고 진명여고 양정고등학교 등이 엄비가 창립한 학교인 것이다. 그녀는 이화·배재 학당도 후원했으며 수시로 교원들과 학생들에게 필요한 경비와 학용품을 지원해 주었고, 사회활동과 자선활동을 통해 여성의 역할을 확대해 나갔다.

사진 상의 그녀는 미인이라기보다 박색에 가깝다. 42세에 아들을 낳고 후임 왕비도 들이지 않을 정도로 고종이 총애한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왕비는 미인이어야 한다는 관념 자체가 편견인지 모른다. 나라의 명운이 벼랑 끝에 매달리는 위기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담대한 용기와 냉철한 머리로 난관을 극복해가는 지혜, 시대의 흐름을 읽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과단성이 고종이 그녀에게 느낀 매력의 진실이 아니었을까? 기독교 선교사들이 주도하는 근대교육에 민족교육의 문을 연 그녀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 교육의 지도는 어떻게 됐을까? 

용화보전 안의 거대 석불 모습.

 엄비의 꿈, 교육 통해 실현

용화사 창건을 지시한 1901년은 엄비가 한창 왕성하게 황실을 운영할 때다. 그녀는 아마 땅에 묻혀있던 미륵불처럼 망해가는 조선을 일으키는 염원으로 미륵불을 다시 세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살펴보아도 불교가 융성할 때 나라가 번창했으니 엄비 또한 자신이 믿는 불교로 조선을 다시 세우고 싶었는지 모른다. 세상의 흐름은 그러나 고종이나 엄비의 뜻과 다르게 흘러갔다. 고종은 러시아처럼 황실을 유지하면서 근대화도 이루고 싶었지만 그만한 토대도, 의지도 약했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로 삼을 야욕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1907년 헤이그밀사사건으로 고종이 강제로 왕위에서 물러나고 영친왕은 유학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끌려갔다. 일본에 끌려간 14살의 영친왕이 고된 군사훈련을 받으며 주먹밥을 먹는 활동사진을 보다가 감정이 북받친 엄비는 몸져 눕더니 그 충격을 극복하지 못하고 58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엄비의 원력은 당대에는 꽃을 피우지 못했다 해도 그녀의 근대화 의지와 여성 교육에 받친 열정은 헛되지 않았다. 그녀가 세운 민족여학교들은 여성인재 양성의 산실이 되어 이 땅의 번영에 크게 이바지 했으니 미륵을 일으켜 새로운 세상을 세우려 했던 그녀의 발원도 함께 빛난다. 청주 용화사에는 이처럼 구한 말 한 시대를 이끌었던 여성최고 지도자의 꿈이 서려있다.

[불교신문3421호/2018년9월5일자] 

청주=박부영 기자  chisan@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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