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성진종재단 이사장 화정스님 기고/ 용성스님 일대기 다큐소설 ‘25+10=X’ 펴내며…

조선 철종에서 해방 직전까지
‘어둠의 시대’ 온 몸으로 헤치며
민족에게 횃불이 돼준 큰스님

스님의 일대기 사실적 ‘재현’ 

신지견 작가의 소설 <25+10=X>는 용성스님의 일대기를 그린 ‘전기’이면서 근현대 역사서다. 조계종 원로의원 불심도문스님과 용성진종재단 이사장 화정스님의 원력이 담긴 <25+10=X>는 현대사를 이해하려는 사람들에게는 필수적인 교과서다.

일제시대, 조선의 모든 것은 부정을 당했다. 심지어 일본에 불교를 전해준 조선불교마저 무너질 위기에 처했다. 일제는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기 위해, 조선 민중들의 정신적 바탕이던 불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스님들에게 육식대처를 강요했다.

그러한 시기에 용성대선사가 있었다. 3ㆍ1 만세운동 33인의 민족대표를 결성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윤봉길 의사를 김구 선생에게 보내 ‘거사’를 일으키게 했다. 상해임시정부와 만주독립군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무엇보다 용성대선사는 현대 불교의 초석을 닦은 분이다. 경전의 한글화, 찬불가 운동 뿐 아니라 임제종의 종통을 잇는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용성스님이 안계셨다면 지금의 한국불교가 제대로 있기는 할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길선주, 김병조, 유어대, 정춘수 4명이 빠지고 29명만 인사동 태화관에 모였다. 누가 자기 생명을 풍년에 쑥떡 내놓듯 하겠는가. 민족대표로 서명은 했으나 쥐를 때리려 하니 접시 아까운 푼수 아닌가…평안도 참빗장사 같은 잔꾀가 이심전심으로 통해 대세를 이뤘다. 그러니 탑골공원으로 갈 것 없이 여기서 독립선언서를 읽고 각자 흩어지자는 것이었다.…‘뭐 독립선언서만 낭독하고 각기 흩어져 모래 속에 물 스미듯 모습을 감추겠다는 수작이 독립선언이냐’ 선언서를 읽어 내려갈 때, 용성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송화기를 들고 ‘지금 태화관에서 대한독립을 선언하고 있으니 모두 체포하라’고 조선총독부 경무총감부에 알렸다.”

한용운 스님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 삼창을 크게 외칠 즈음, 태화관에 일본 순사들이 달려와 모두를 체포했다. 민족대표로 서명한 사람들의 면모를 잘 알던 용성스님이 내린 결단의 결과였다. 투옥 사실이 알려지면서 ‘조선독립만세’의 외침은 전국으로 확산되며 역사적인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이라는 결과를 일궈낼 수 있었다.

소설에 나오는 내용 하나하나가 놓칠 수 없는 우리의 근대 역사다. 구한말 태어나 조국이 일제에 강탈당하는 것을 몸소 지켜봐야 했던 지식인, 용성스님. 

신지견 작가는 용성스님의 눈을 통해 조선 말 왕실은 척신들과 부패한 관료들의 농단으로 법과 제도가 무너졌던 당시의 모습을 바라본다. 왕실은 손쓸 수 없는 문란과 무능의 적폐에 빠져 있었다. 소설은 무능한 왕실을 일본이 정한론으로 한국을 병탄하기까지 과정, 그리고 식민지로 만들어 한민족이 일본의 노예로 전락된 배경이 깔려 있다. 

“수행자로서 퍽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으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광복운동에 투신”한 용성스님은 빼앗긴 나라를 회복하고, 불교를 지켜야 한다는 절실한 화두를 부여 잡았다.

불교국가였던 일제가 왜 조선불교에 대해서 칼날을 들이 댔을까. ‘선기(禪氣)’가 원인이었다. 임진왜란 때 승군에 패한 역사적 교훈을 갖고 있는 일본은 대처육식의 승려들을 앞세우고 들어와 조선 임제종 종통의 선기를 흩트려 놓는데 중점을 뒀다.

그러자 용성선사는 만해스님을 앞세워 스님들의 봉기를 주도했고, 불교정화와 대중화에 앞장섰다. 소설에서는 용성스님이 불교 대중화를 절감한 ‘투옥생활’의 이야기도 전한다.

“감방생활이 별건가. 틀고 앉으면 정에 들었다. 가부좌로 절집 생활을 시작한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3ㆍ1만세 운동을 주도한 일로 1년6개월의 형을 받아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용성스님은 어느날 큰 충격에 빠졌다. 기독교인들이 읽는 책을 보니 영어가 아니라 한글로 된 책이었다. ‘아니 저 양반들은 미국에서 건너온 양놈 책을 봐야할 텐데 어찌 언문으로 인쇄된 책을 보는가?’

그 순간 용성스님은 한문으로 된 경전을 읽고 공부하던 불교가 ‘지금 이럴때가 아니구나’ 크게 깨달았다. 조선이 망한 적폐는 주자학이었다. 그런데 불교는 한글이 창제된지 수백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한문에만 몰두하고 있는 현실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용성스님은 1921년 3월 출옥을 하고 바로 서울 중심가에 대각사를 세웠다. 그곳에서 ‘한글 화엄경’을 집필했다. 삼장역회를 설립해 <귀원정종> <선문촬요> <대승기신론> <금강삼매경> 등 경전을 줄줄이 한글로 번역해 내놓았다.

“애초 우리의 정신적 대상은 차별없는 것이다. 차별은 엉뚱하고 터무니없는 생각에서 생긴다. 이 과대망상을 버리면 궁극적 실재에 도달한다고 일러준다. 이 길을 가고자 하는데, 일본이 조선을 지배하자 신성한 만행의 길목에 새로 주막이 생겼다. 횟집도 생기고, 색시집도 생겼다. 주막에서는 컬컬한 막걸리 한잔 하고 가라고 붙든다….”

1926년에는 ‘계를 범하는 생활 금지’를 내건 건백서를 비구 127명 명의로 조선총독부에 보냈다. 불교가 하루가 다르게 ‘대처육식 승려’로 인해 무너지는 모습을 본 용성스님은 대각교를 창립해 이를 극복하고자 했다.

정통 불교를 지켜내는 일도 중요했지만, 용성스님은 나라를 회복하는 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하늘에 발바닥을 붙이듯 함경도 회령으로 달려가 염불방을 설립했다. 그리고 곧 두만강 넘어 길림성 연변으로 갔다.” 용성스님은 그곳에서 70정보에 달하는 넓은 토지를 구입해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경남 함양 백운산으로 가서 30정보의 토지를 확보해 과일나무와 채소 농사를 지었다. 그곳에서 자란 농작물은 굶주린 민중에게, 독립운동 자금으로 흘러갔다.

1940년 2월, 스님은 그리도 염원하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열반에 들었다. 상좌 동헌태현스님에게 “박꽃이 울타리를 뚫고 나가니, 삼밭 위에 한가로이 누우련다” 말하고 임종게를 읊었다. 용성대선사의 삶이 곧 조선 철종에서 해방 전에 이르는 우리의 역사를 그대로 담고 있다.

신지견 작가는 용성스님의 출생지인 전남 장성 죽림촌을 시작으로 용성스님의 자취를 답사하고, 역사 고증 절차를 걸쳐 <25+10=X>를 출간했다. 2017년 불교신문에 <범종소리 우주를 깨우다>라는 제목으로 연재된 소설이기도 하다. 

25+10을 계산하려면 2+1, 5+0으로 계산해야 한다. 그런데 5+0에서 0은 ‘실수’다. 0은 아무것도 없으면서 같은 가치를 부여받는다. 그 가치가 바로 공(空)이라는 용성스님의 화두같은 가르침에서 제목을 뽑았다. 

[불교신문3421호/2018년9월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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