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적인 면모 가진 나한, 친근한 신앙으로 다가와

 

최고의 경지 오른 부처님 제자 
석가모니부처님 직제자 16나한 
불서 편찬한 500나한 대표적

통일신라 말 나한신앙 성행 
고려왕실 나한재 30차례 열어 
조선후기 사찰 나한전 갖춰  

아라한은 범어 ‘아라하트(arahat)’의 음역이다. 아라한을 줄여 ‘나한(羅漢)’이라고 한다. ‘세상의 존경을 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수행자’ 등의 의미를 갖고 있다. 보물 1333호 여수 흥국사 16나한도.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깊은 숲속에서 동자를 대동하고 앉아 긁개로 등을 박박 긁는 백발의 노인, 그 옆에서 경전을 읽으며 열심히 수행하는 젊은 스님, 햇빛을 쬐는 듯 웅크리고 앉아 있는 노인, 밥그릇 하나로 용을 희롱하는 초로의 스님… 응진전(應眞殿)이나 나한전(羅漢殿)에 가면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모습들이다. 때로는 엄격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때로는 친근한 이웃과도 같은 인간적인 모습으로 표현되는 이들은 바로 부처님의 제자인 나한(羅漢)이다. 

나한(arahat, 阿羅漢)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드신 후 미륵불이 출세하기 까지 56억 7천만년 동안 이 세상에 남아 불법을 수호하고 중생을 제도하도록 부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제자들이다. 나한이란 말은 본래 ‘존경받을 만한 분’, ‘공양받을 만한 분’이라는 의미로 석가모니 부처님에게 사용하던 존칭이었으나 부처님의 제자 중에 수행을 통해 최고의 경지에 오른 분들에게도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소승불교에서는 깨달은 사람을 예류(預流), 일래(一來), 불환(不還), 아라한의 4위(位)로 구별하는데 여기에서 아라한 즉 나한은 최고의 위치에 해당된다. 따라서 나한은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다는 뜻에서 무학(無學)이라 하고 진리에 도달했다는 뜻에서 응진(應眞)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대승불교에 이르러서는 아라한은 소승의 수행자를 일컫는 말로 정착되었다. 나한은 10대제자와 16나한, 18나한, 500나한, 1250나한 등 여러 가지 종류가 있으나 석가모니 부처님의 직제자 가운데 정법을 지키기로 맹세한 16나한과 부처님의 열반 직후 왕사성(王舍城)에 모여 불전(佛典)을 편찬한 500나한을 대표적 나한들로 꼽고 있다.

인도에서는 일찍이 불교의 삼보(三寶)신앙과 함께 나한에 대한 신앙이 성행하였다. 중국과 우리나라에서도 선종(禪宗)의 발달과 함께 나한숭배가 이루어져 일찍이 반승의식(飯僧儀式), 나한재(羅漢齋) 등이 이루어졌다. 우리나라에서 나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 김수로왕이 도읍을 정한 뒤 “이 땅은 협소(狹小)하기가 여뀌(蓼)잎과 같지만 수려(秀麗)하고 기이하여 가위 16나한(羅漢)이 살 만한 곳이다.”라는 기록이지만 당시 나한신앙이 들어왔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보다는 같은 책 대산오만진신조(臺山五萬眞身條)에서 태자 보천과 효명이 오대산의 다섯 봉우리에 예(禮)하러 올라갔을 때 북대(北臺) 상왕산(象王山)에 석가여래를 우두머리로 한 5백의 대아라한(大阿羅漢)이 나타나 있었다는 기록으로 볼 때 통일신라 초기에는 오백나한에 대해 알려져 있었던 것 같다. 

나한신앙이 본격적으로 성행한 것은 통일신라 말 선종이 수용되면서 부터이다. 고려시대에는 923년 양(梁)나라에 사진으로 갔던 윤질(尹質)이 오백나한상을 가져와 해주 숭산사에 안치하였으며, 개경의 남쪽에 있던 광통보제사 나한전에는 오백나한상이 봉안되어 있었으며 양쪽 회랑에 오백나한도가 그려져 있었다고 한다. 또 고려 왕실에서는 왕실주관으로 5백나한재 및 나한재를 30여 차례나 열어 기우(祈雨)와 적병의 퇴치를 기원하였는데, 당시 나한신앙의 성행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현존하는 고려시대의 오백나한도(五百羅漢圖)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는 고려시대 그려진 오백나한도 중 제170혜군고존자(慧軍高尊者,왼쪽).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을 비롯하여 일본과 미국 등 국, 내외에 전하는 오백나한도(고려, 견본수묵담채)는 오백 명의 나한을 오백 폭에 각각 나누어 그린 것으로, 어두운 갈색 비단바탕에 먹선과 옅은 채색을 사용해서 그렸다. 현재는 오백 폭 중 10여 점만이 남아 있으나 수묵담채기법으로 단순하면서도 먹의 효과를 최대한 살려 고승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표현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소장의 제170 혜군고존자도(慧軍高尊者圖)는 오른쪽으로 몸을 틀어 바위에 가부좌한 자세로 두 손을 배 앞에 모으고 단정하게 앉아있는 나한을 그린 것이다. 차분하면서도 농담(濃淡)의 먹색을 자유롭게 구사하여 그렸는데, 부은 듯한 눈에 눈동자가 또렷하고 눈꼬리가 올라간 예리한 눈, 큼직한 코, 생기있는 얼굴표정, 휘날리는 듯한 옷자락 등에서 자비스러운면서도 후덕한 고승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반면, 일본 치온인(知恩院)소장의 오백나한도(고려말~조선초기)는 한 폭에 석가삼존(釋迦三尊)을 중심으로 오백명의 나한을 모두 그린 것으로, 웅장하면서도 정교한 산수를 배경으로 각 나한들이 제각기 개성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도 나한에 대한 신앙은 계속되었다. 태조 이성계는 함경도에 있는 석왕사를 원찰로 삼아 오백나한을 봉안하였으며 고려시대에 이어 왕실주재로 나한재가 열렸다. 조선 초기에는 정종을 비롯하여 세종, 세조, 예종 등이 나한상을 제작하거나 나한을 친견하는 등 나한신앙을 갖고 있었으나 본격적인 나한신앙은 명종대 문정왕후(文定王后)와 보우대사(普雨大師)에 의해 확산된 듯하다. 기록에 의하면 보우대사는 오백응진탱(五百應眞幀)을 조성하고 점안법회(點眼法會)를 개최하였는데, 여기에 기록된 오백응진탱이 국박 등에 소장된 오백나한도와 같이 오백명의 나한을 각각 한 폭씩 모두 500폭으로 그린 것인지, 아니면 일본 치온인소장 오백나한도처럼 500명의 아라한을 한 폭에 모두 그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만약 이 그림이 500점으로 이루어진 나한도라면 고려시대의 오백나한도에 버금가는 대불사였음에 틀림없다. 명종대에는 실제로 수백 점의 나한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그중 한 점인 제153덕세위존자도(德勢威尊者圖)가 미국 L.A.County Museum에 소장되어 있는데, 이 나한도는 1562년에 문정왕후가 나라의 태평과 아들인 명종의 무병장수,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며 제작하여 삼각산 향림사에 봉안하였던 200점의 나한도 가운데 하나로서 고려시대 오백나한도의 도상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소나무 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두 손으로 두루마리를 경건히 받들고 있는 노나한의 모습을 단정한 필선으로 깔끔하게 묘사한 이 그림은 조선 초기의 화원 이상좌(李上佐)가 그린 것으로 전해오는 <불화첩(佛畵帖)>의 나한도와도 닮아있어, 16세기 나한도가 고려시대 및 조선초기 나한도의 맥을 잇고 있음을 보여준다. 

일본 지은원(知恩院) 소장 조선시대 오백나한도 부분도.

조선 후기에 이르면 거의 모든 사원에는 나한전 또는 응진전을 갖추고 16나한상과 16나한도를 봉안하였다. 16나한은 부처님의 제자 중 석가모니가 열반한 후 미륵불이 나타나기까지 열반에 들지 않고 이 세상에 있으면서 불법을 수호하도록 부처님께 위임받은 제자들로, ①빈도라바라다바자, ②가나가바차, ③가나가바라타자, ④소빈다, ⑤나구라, ⑥바다라, ⑦카리카, ⑧바자라푸트라, ⑨지바카, ⑩판타카, ⑪라후라, ⑫나가세나, ⑬안가다, ⑭바나바시, ⑮아지타, 수다판타카 등을 말한다. 16나한 신앙은 당나라의 삼장법사 현장(玄)이 <대아라한난제밀다라소설법주기(大阿羅漢難提蜜多羅所說法住記)>를 번역한 7세기 이후 크게 성행하여 송대에 이르기까지 유행하였고, 우리나라에서는 말세신앙(末世信仰)과 함께 8세기 후반부터 성행하였다. 

응진전 안에 들어가면 중앙의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홀수의 나한도는 향우측에, 짝수의 나한도는 향좌측에 봉안되어 있다. 그림의 형식은 한 폭에 한 명의 나한씩을 그리기도 하고 2명 또는 3명, 4명, 8명의 나한을 한 폭에 그리기도 하는 등 다양한 형식을 보여준다. 그림 속에 표현된 나한은 염주를 비롯하여 각종 꽃과 지팡이, 그릇, 동물, 경전, 금강저, 과일 등을 들고 있거나 입을 가리고 웃기도 하며, 등을 긁거나 경전을 읽고 참선(參禪)하는 등 자유로운 모습을 취하고 있다. 여수 흥국사 16나한도(1623년)는 18세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화승(畵僧)인 의겸(義兼)과 향오, 즉심, 긍척, 적조, 향민, 회안 등이 그려 응진당에 봉안했던 것으로, 중앙의 영산회상도를 중심으로 좌우 3폭씩, 총 6폭으로 이루어져 있다. 큰 바위와 괴석 등을 배경으로 왼쪽에는 홀수의 나한, 오른쪽에는 짝수의 나한이 서넛씩 모여앉아 있는 모습을 그렸는데, 바위와 암석은 수묵담채를 사용하여 능숙하게 처리하였으며 나무와 파초 등에는 채색을 가하여 처리하였다. 이 나한도에 보이는 나한의 특징, 즉 몸을 웅크리고 홀로 물가에 앉아있거나 두건을 쓰고 참선하듯 눈을 감고있는 나한의 모습 등은 그후 송광사 16나한도(1725년)을 비롯한 18, 19세기 16나한도에 그대로 계승되기도 하였다. 특히 19세기에 서울, 경기일원에서는 남양주 흥국사 16나한도(1892년)나 봉은사 영산전 16나한도(1895년), 수국사 16나한도(1907년)처럼 화면을 3 내지 4등분하여 한 면에 한 나한씩 그린 형식이라든지 불암사 16나한도(1897년)에서 보듯이 화면의 중앙에 석가삼존을 그리고 그 주위를 3단 16칸으로 구획하여 16나한을 그린 형식도 유행하였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전수하는 불제자로서, 또 한편으로는 신통력으로 갖가지 신이(神異)를 행하는 수도자로서의 나한은 불, 보살과 달리 인간적인 면모를 지닌 자들로서 시대를 막론하고 항상 친근한 신앙으로 다가왔다. 때로는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처럼, 때로는 엄격한 수행자의 모습으로 나투신 나한은 아마도 모든 불자들이 가장 바라는 이상적인 인간상이 아니었을까.

[불교신문3421호/2018년9월5일자] 

김정희 원광대 고고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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