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제종 禪, 고려에 전해 간화선 꽃피우다

宋임제종 도진에게 공부
황제에게 ‘법원대사’ 호 받아
국제 정세 밝은 선사로 추론

요본대장경ㆍ배발 갖고 귀국
좌선의 수행규칙 의궤 따라 
총림법식 정해…‘선교융합’

예종 왕사ㆍ국사로도 설법
가늘게 흐르던 고려初 선풍
후대로 잇는 징검다리 역할

수선사 6세 원감국사 충지 
담진을 ‘성사’로 호칭하면서 
보조 지눌과 동격으로 예경

대감국사 탄연, 광지대선사
담선법회 주관하던 윤언이 
영보 등 이름난 제자도 즐비

담진선사가 11세기 중반, 고려 승려 3인과 함께 수행했던 중국 절강성 항주 천축사. 상천축, 중천축, 하천축으로 나뉘어져 있을 만큼 규모가 매우 큰 도량이다. 현재 불사가 완비되어 있다.

고려 초기~중기, 무신집권 이전까지 선종은 교종 세력에 밀려 미약한 형편이었다. 그나마 담진(曇眞), 학일(學一, 1052~1144년), 탄연(坦然, 1070~1159년) 등이 배출되어 고려 초기에서 중기에 이르는 동안 선(禪)의 명맥이 이어졌다. 즉 담진·탄연의 사굴산문, 학일의 가지산문 선풍이 전개됨으로써 이후 수선사 정혜결사, 고려 후기 임제종 간화선이 꽃피울 수 있었다. 

담진이 활동하던 10세기 무렵 국제 정세를 먼저 보자. 중국 내륙은 907년 당나라가 망한 후 960년까지 5대10국(五代十國)이 일어나 50여 년간 혼란이 지속되다 송나라(北宋)가 건국된다. 거란은 907년에 건국되어 947년 ‘요나라’로 국호를 개칭했다. 만주에서는 훗날 금나라가 될 여진족(만주족)이 점차 세력을 키워 나가고 있었다. 고려가 요나라 거란족과의 관계로 잠시 외교를 맺으면서 송과 외교가 단절됐다. 그러다 요나라가 약해진 틈을 타 다시 송나라와 고려의 국교가 재개되면서 불교 교류도 활발해졌다. 국제 정세가 얽히고설킨 혼란한 시대이다 보니, 당연히 고려 승려들의 유학길도 순탄치 않았다. 마침 송나라와 국교가 재개되면서 유학을 떠난 승려가 혜조국사(慧照國師) 담진이다. 

담진에 대해서는 정확한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대략 11세기 중후반과 12세기 초반에 활동했고, 예종(1106~1122년 재위)대 왕사·국사를 지낸 인물이다.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과도 인연이 있어 함께 송나라에 유학했다. <속자치통감장편(續資治通鑑長篇)>에 의하면, 담진은 1076년 무렵 이미 중국에 유학하고 있었다. 당시 고려 승려 3인이 절강성(浙江省) 항주(杭州) 천축사에 머물고 있었는데, 송나라 황제 신종(1067~1085년 재위)이 그들을 북송 수도인 변경(卞京, 현 하남성 개봉)으로 불렀다. 신종은 고려 승려 3인에게 각각 대사의 호를 내리고, 자색(紫色) 가사를 하사하면서 고려 사신과 함께 본국으로 귀국하라는 명을 내렸다. 신종이 승려 3인에게 내린 법호는 각진(覺眞, 法照大師), 담진(潭眞, 法遠大師), 여현(麗賢, 明悟大師)이다. 담진이 송의 황제로부터 ‘법원’이라는 호를 받을 수 있었던 것도 국제적인 관계에 얽혀 있다. 거란과의 관계로 송나라와 고려가 단절되었다가 다시 송과 고려가 외교를 막 시작하는 즈음 북송의 황제는 고려에게 좋은 이미지를 남기려는 의도도 엿보인다. 

담진의 속성은 신씨(申氏), 자는 자정(子正), 담진은 법명이다. 경기도 이천 출생으로, 어려서 사굴산문의 난원(爛圓)에게 출가했다. 1076년(문종 30년)에 송나라로 유학을 가서 임제종의 정인 도진(淨因道臻, 1014~1093년)에게서 공부했다. 담진은 4~5년간 송나라에서 수행한 뒤, 1080년 고려로 귀국했다. 1107년(예종 2년) 예종의 왕사(元景王師), 1114년에는 국사(慧照國師)가 됐다. 1116년 왕이 보제사로 행차했을 때, 담진이 법을 설해주었다는 기록이 전한다. 

합천 해인사 일주문 영지 옆에 모셔져 있는 담진의 탑비(원경왕사비, 보물 제128호).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어려운 실정이다.

담진은 쌍봉사에서 활동하다 개경 광명사에도 10여 년 머물렀다. 이후 전라도 순천 정혜사를 창건했는데, 후대 사굴산문의 유명한 사찰이 됐다. 담진은 천태종 개창 이전부터 의천과 밀접한 도반관계였다. 가지산문의 학일이 천태종 의천과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한 반면 담진은 의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면서 담진은 천태종에도 흔들리지 않고, 선종의 독자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담진은 정인 도진 문하에서 수행했다. 도진은 임제종의 부산 법원(浮山法遠)과 운문종의 대각 회련(大覺懷璉, 1009년~1090년) 문하에서 수행했다. 도진의 스승인 두 선사는 당시 송나라에서 주목받는 불교계 인물이었다. 1065년 대각 회련이 변경의 정인사 주지를 그만두자, 도진이 이어서 30년 동안 주지를 살았다. 곧 도진 개인의 선풍과 법력, 정인사의 사세가 북송 대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고 보인다. 신종 황제가 창건한 혜림사(慧林寺)와 지해사(智海寺) 주지를 임명할 때도 황제는 도진과 상의했다고 한다. 도진은 또한 신법(新法)으로 정치를 도모하던 왕안석(1021∼1086년)과도 왕래할 정도로 불교계나 사회의 주요 인물이었다. 담진은 북송에 몇 년간 머물면서 스승 도진의 활동을 지켜 봐왔던 터라 오롯한 산승(山僧)의 이미지를 벗어나 국제 정세를 파악할 줄 알았던 인물로 추론된다. 

담진은 귀국하면서 요본대장경(遼本大藏經) 및 의궤(儀軌)와 배발(排鉢)을 고려에 가지고 왔다. 예종 13년 안화사가 중수되고 나서 담진이 가지고 온 좌선의 수행규칙인 의궤에 따라 총림의 법식을 정했다. 담진의 선사상은 정확한 전거가 없어 알 수 없지만, 선교융합적인 선풍이었다고 사료된다. 담진의 사법 스승(淨因道榛)의 활동이나 선풍을 볼 때도 그러하고, 담진에게서 영향을 받은 거사불교의 대표 이자현(1061~1125년)도 경전과 융합적인 선(楞嚴禪)이 두드러지기 때문이다. 

➲ 불교사적 위치 그리고 제자들

담진의 불교사적 위치를 보면, 담진으로 인해 임제종 선이 고려에 전해졌으며, 가늘게 흐르고 있던 고려의 선풍이 후대로 이어지게 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었다. 즉 고려 초기를 지나 선이 잠시 주춤했던 상황에 담진의 임제종 선풍은 고려 말기에 이르기까지 선풍이 이어지게 한 점이다. 후대 수선사 6세인 원감국사(圓鑑國師) 충지(冲止, 1226~1293년)는 담진을 성사(聖師)로 호칭하면서 보조 지눌과 동등한 격을 부여하며 존경했다. 경남 합천 반야사지에 있던 담진의 탑비(元景王師碑)도 1961년 해인사 일주문 입구로 옮겨 모셨지만 아쉽게도 비문이 심하게 마멸되어 판독이 전혀 되지 않는다. 

담진의 제자로는 대감국사 탄연(坦然), 지인(之印), 관승(貫乘), 윤언이(尹彦頥), 영보(英甫), 이자현 등이 있다.

영보와 영보의 제자인 조응(祖膺)은 예천 용문사를 크게 중수하여 사굴산문의 사세를 진작시켰다. 윤언이의 부친 윤관(尹瓘)은 이자현과 직접적인 교우 기록은 없으나 의천의 문인으로부터 영통사비문(靈通寺碑文)에 대해 비판받으면서 배척된 적이 있었다. 윤언이(?∼1149년)는 가지산문 선사 학일의 비문을 찬술하고, 스스로 ‘금강거사’라고 칭하며 참선했다. 그가 머물던 금강제(金剛齋)는 관승(윤언이와 도우 관계)이 만년에 머물렀던 영평(현 경기도 포천) 금강사라고 추측된다. 윤언이는 훗날 담선법회가 개최될 때마다 법회를 주관했다. 또한 윤언이의 아들 효돈(孝惇)이 승려가 됐다. 묘하게도 윤씨 일가가 선종의 선사들과 인연되었던 반면, <삼국유사>의 저자 김부식은 대각국사 의천과 인연이 깊었다.

지인(之印, 1102∼1158년)은 예종의 아들로 훗날 광지대선사(廣智大禪師)이다. 1102년 예종의 사저(私邸)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각로(覺老), 자호(自號)는 영원수(靈源叟)이다. 모친이 거란 사람으로서 그는 정식 왕자 대접을 받지 못했으나 예종은 지인이 자신과 닮았다고 하여 극진히 사랑하고 아꼈다. 지인은 나면서부터 재주가 뛰어났으며, 냄새나는 음식이나 고기를 싫어했다. 그는 9세에 담진에게 출가했는데, 선수행이 마치 선천적으로 타고난 사람처럼 숙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5세에 불선(佛選)에 합격, 17세에 법주사 주지를 역임했으며, 25세에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받았다. 이어 1132년 ‘선사’에 올랐지만, 지인은 번잡한 것을 싫어해 인종에게 산림으로 물러나 쉴 것을 청했다. 인종은 지인의 뜻을 받아들이지 않고, “도가 있는 곳이라면 저자거리도 곧 청산(靑山)”이라며 곁에 두고자 했다. 지인은 45세에 ‘대선사’ 법계를 받고, 2년 후 의종으로부터 광지(廣智)라는 호를 받았다. 그는 이 무렵에도 ‘왕의 총애를 탐하면서 사는 것은 출가자의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며 왕권과 거리를 두고자 했다. 53세에 지인은 영평 금강사에 머물렀는데, 이곳에까지 왕이 사신을 보냈다. 지인은 번잡한 것을 즐겨하지 않았다. 왕족 출신 승려로서 신분 혜택도 있겠지만, 그 신분 때문에 힘든 여정도 있는 것 같다. 

지인은 교학적으로 선교(禪敎)에 매우 밝았으며, 문장에도 능했다.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대하여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받는 인품이었다.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물건을 갖고자 하는 사람이 있으면 기탄없이 내주어 정작 자신의 방에는 서적 몇 편과 그림 몇 점뿐이었다. 또한 자신의 재산을 모두 내어서 쌍봉사와 지륵사 두 사찰에서 대장경을 간행해 세간에 유포시켰다. 

지인은 57세 되는 해 갑자기 다리에 병이 났다. 병이 더 심해져, 입적 즈음, “오늘이 며칠이요”하고 물으니, 제자가 “진일(辰日)”이라고 대답했다. 이에 “진일과 사일(巳日)은 세속에서 꺼리는 날이니, 나도 마땅히 피해야겠소”라고 답한 후 지인은 12일이 되자, 대중을 불러 놓고, “근본으로 돌아가는 날이 바로 오늘이네. 본성이 머무는 곳은 모래와 같이 무수히 많은 세계에 두루 하다. 여관과 같은 이 사바세계에 어찌 몸을 맡기겠는가”라는 열반게를 마치고 입적했다.

[불교신문3420호/2018년9월1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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