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은 못 되도 중노릇은 잘 하려고 합니다”

온화한 미소로 늘 주변을 편하게 해 주는 원로의원 일면스님이 들려주는 말씀의 처음과 끝은 한결같고 간결했다. “중노릇 잘 하려 한다.”

“18년 전 22살 젊은이 간이식 받아

잘 살고 있으니 이제 마흔 살”

종단 주요 소임 맡은 후에도

생명나눔운동으로 보은의 삶

 

일할 땐 꼼꼼…호랑이 같지만

‘회광반조’ 좌우명으로 늘 점검

‘후불탱화’ 역할 자임 존경받아

 

만나는 사람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재주는 타고나는 것일까 아니면 수행의 결과물일까? 원로의원 일면스님도 이런 생각이 들게 한 주인공 가운데 한 분이다.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 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부처님 마음일세.” 무재칠시(無財七施, 재물이 없어도 할 수 있는 일곱 가지 베풂)의 가르침을 전할 때 자주 인용되는 문수보살이 말씀이지만 일면스님을 만날 때마다 떠오르는 게송이기도 하다. 기온이 35도를 넘나들던 지난 7월16일 스님의 주석처인 남양주 불암사 동축당(東竺堂)의 무더위를 식혀준 것도 다름 아닌 일면스님의 편안한 미소였다.

“비결? 그런 게 뭐 있겠습니까?” 대하는 사람마다 늘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는 비결이 있을까 싶었는데 스님은 오히려 지금 생은 “덤으로 살고 있는 거”라며 그동안 은혜를 베풀어준 시주자 이야기를 하나씩 풀어놨다. 행자 때부터 원로의원이 된 지금에 이르기까지 짧지 않은 세월을 되짚었다. 수없이 많은 인연들을 위해 아침마다 축원을 올리기도 하지만 정신적 자산을 남겨준 은사와 육체적으로 새 삶을 살게 해준 젊은이에게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는 고마움을 간직하고 있다.

은사 명허(明虛)스님은 초발심시절 상좌에게 ‘죽비’ 그 자체였다. 건장한 체격에 ‘호랑이’로 불릴 정도로 엄하고 불같은 분이셨다. 사찰 경내에서 젊은 사람들이 손이라고 잡고 다니면 “여기가 파고다(탑골)공원이냐”며 불호령을 내리고, 뒷짐 지고 도량을 어슬렁거리는 것 또한 용서치 않았다. 무엇보다도 크게 다가오는 것은 삼보 정재를 단 한 푼도 허투루 쓰지 못하게 한 점이다. 한 번은 3000원을 주시며 장에 가서 털실, 비누, 바늘을 사오라고 하셨다. 장을 보고 돌아와 산 물건과 거스름돈을 드리자 일일이 계산하며 착오가 없는지 살피셨다. 100원이 모자랐다. 어린 상좌는 어쩔 수 없이 ‘사탕을 사 먹을 것’을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큰돈도 아니라 그냥 넘어가겠거니 생각한 것이 오산이었다. 은사 스님은 “시은(施恩)으로 사탕 사먹은 놈과는 같이 중노릇 못 한다”며 내쫓을 기세였다. 두 시간이나 엎드려 참회를 구한 뒤 부처님께 삼천 배 참회하라는 말씀을 듣고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사탕 하나 값을 삼천배로 치른 셈이다. 스님은 기회 있을 때마다 이 이야기를 후학들에게 전해주며 법문집 <행복한 빈손>으로도 가르침을 나누고 있다.

은사 스님은 늘 “참선해서 불교를 일으켜 보라” 권했지만 일면스님은 “제겐 맞지 않는다”며 시대에 걸맞은 역할을 소리 없이 준비했다. 당시 모든 스님들이 공부하는 데 필요한 행정을 뒷받침해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은사 스님은 경(經)이 좋아 강원에 가 있는 제자를 보기만 하면 “선방가라, 선방가라” 경책했지만 일면스님의 입장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길이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공부 방법이 똑 같아야 하는 것도 아니라 “저는 참선이 안 맞습니다. 저는 선사들을 받드는 행정승이 되겠습니다.” 참선이 아닌 행정승으로도 도인이 나와야 불교가 산다고 수차례 말해 은사 스님으로부터 기어이 허락을 받아냈다.

그래서 그런지 일면스님은 ‘능력없다’는 말을 제일 싫어한다. 그만큼 자신이 하는 일에 집념을 갖고 살아온 것이다. 스님은 해인사 강원(승가대학)을 마치고 다시 늦은 나이에 동국대를 졸업했다. 그 은혜를 사중에 조금이라도 갚기 위해 다시 해인사로 돌아가 공양주 생활을 자청했다. 주변에서는 모두 만류했지만 최소한의 도리라고 생각했다. “사중의 배려가 없었으면 서울까지 가서 종비생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겨울 한 철 공양주 생활을 할 때 행자 7명 중 5명을 상좌로 맞이하는 과분한 복까지 누렸다.

“너희는 주불(主佛)을 해라. 나는 후불탱화 하련다.” 스님이 도반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던 것 또한 행자시절부터 다져온 신념에서 나온 결과다.

하지만 의욕이 앞서 자신을 돌아보지 못한 탓일까? 젊은 패기와 집념으로 일본유학 준비를 위한 학업과 사찰 소임을 함께 해 오던 중 생긴 간경화는 스님에게 더 이상 이생을 허락하지 않을 지경까지 몰고 갔다. 의사로부터 사실상 사형(시한부 인생)선고까지 받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우울증까지 함께 왔다. 조계종 중앙종회 부의장 시절 의장을 대신해 의사진행까지 했지만 주변에서는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뭐든 모으는 것을 좋아해 자료집을 비롯해 그동안 정성들여 모아두었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부처님 앞에서 일주일 간 기도했다. “한 번만 살려주세요. 울면서 애원했어요. 살려주면 부처님시봉 잘 하겠습니다. 만약에 살 수 없다면 스님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세요.” 마지막에는 부모형제를 비롯해 스님과 가까운 사람을 위해 축원을 올렸다.

두 달을 못 넘긴다는 말에도 수행자로서 차마 생체이식을 받을 수 없다는 고집 때문에 고통은 길어만 갔다. 하지만 아직 이생을 놓아야 할 때가 아니었는지 네 번의 간이식 수술 시도 끝에 뇌사자와 인연이 돼 새 삶을 만나게 됐다. 2000년 1월 어느 날 22시간 다른 세계를 다녀온 끝에 은혜를 갚아가며 살아야 하는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것이다. 22살 젊은이에게 은혜를 입었다.

“은사 스님은 거의 매일 그랬어요. 지옥 채우다 안 되면 중 잡아다 다 채운다”고. 그래서 군대 다녀와서는 조계사 마당에 하루 종일 앉아있기도 했다. 스님들이 어떻게 사는지, 좋은 것은 배우고, 잘못된 것은 익히지 않기 위해서다.

경전만이 가르침이 아니었다. 신문, 잡지, 책 한쪽부터 요즘 소통도구인 SNS의 짧은 글귀까지 교훈이 될 만한 것은 보이는 대로 스크랩해 둔다. 계획은 최소 1개월 단위로 세우는 데 매달 20일이면 다음 달 계획이 완성된다. 사중은 사중대로, 생명나눔실천본부는 본부대로 함께 일하는 대중이 함께 공유할수록 일을 효율적으로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챙겨할 일은 몸이 두 쪽이 나도 하고 만다는 자세는 일흔둘이 된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진행되는 행사 세 건을 모두 챙기면서 생긴 스님만의 노하우가 소통의 큰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정시에 갈 수 없는 행사는 이전과 이후에라도 꼭 찾아가 인사하는 것을 스님은 빠트리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은 늘 함께 하는 일 하는 대중이라도 이성과 한 방에 있어야 할 때는 방문을 열어두고 보살(여성신도)이 청소하러 들어오면 잠시 자리를 비켜준다. 코를 푼 다음에 옷에 묻은 이물질을 살펴보지 않아 실수를 한 후부터 ‘회광반조(廻光返照)’를, 조금이라도 나태해지는 것 같으면 ‘늘 처음처럼’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마음을 다 잡는다.

“요즘은 솔직히 전화도 안 받고 싶습니다. (갈등이 있는 곳에서는) 내 것을 챙기려하지 않으면 됩니다. 내가 챙길 것이 없어야 합니다.” 찻잔을 놓고 방을 나서려는 데 들어올 땐 보이지 않던 <금강경> 사구게 한 구절이 눈에 들어왔다.

‘범소유상(凡所有相) 개시허망(皆是虛妄) 약견제상비상(若見諸相非相) 즉견여래(卽見如來)’

늘 하던 얘기가 담겨 있다며 ‘행복한 빈손’을 담아주는 ‘에코백(환경친화가방)’의 스님의 캐리커쳐가 또 한 번 미소를 짓게 한다.

포행을 마치고 스님의 거처를 나서며 한 말씀 더 들을까 싶어 한 번 합장을 해도 스님은 같은 말씀만 반복했다. “중노릇 잘하려 합니다.”

 

 

■ 일면스님은 …

 

‘죽음 문턱까지 갔다 온’

생명나눔 최고 홍보대사

 

일면스님은 2000년 1월8일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가 ‘간 이식수술’을 통해 새 생명을 얻었다.

그 후 ‘이생의 인연이 다하는 날까지 새 생명을 다시 얻은 은덕을 갚겠다’는 서원을 세우고 2005년부터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 소임을 맡아 지금까지 이끌어오고 있다. 스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장기이식만을 마지막 치료수단으로 기다리는 환자들이 있다”며 생명나눔 활동에 가장 적극적인 홍보대사이다. “장기기증은 장기 부전의 고통 속에서 삶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는 환자들에게 새 생명을 선물하는 자비의 실천”이기에 새 생명을 얻은 스님으로서 단 한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는 일이라면 가장 먼저 달려간다.

일면스님은 1959년 해인사에서 명허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1964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7년 비구계를 수지했다. 해인강원을 마치고 사찰 소임 등을 보며 필요성을 느껴 1979년 동국대 승가학과를 졸업했다. 조계종 제9·10·11·12·13대 중앙종회의원과 제3대 교육원장을 지냈다. 제25교구본사 봉선사 주지, 초대 군종특별교구장, 호계원장, 학교법인 동국대학교 이사장 등 종단 내외 주요 소임을 두루 거쳤다. 2001년 재단법인 일면장학회를 설립했으며 2005년에는 해인동문장학회 이사장을 맡아 규모를 크게 확장하기도 했다.

현재 학교법인 광동학원 이사장이자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장으로 교육불사와 생명나눔운동을 이끌어가는 대표적인 스님으로 명성이 높다. 2013년 만해대상을 수상했으며 지난 4월 종단의 최고 의결기관인 원로회의 의원으로 선출됐다.

남양주=김선두 기자

사진 신재호 기자

[불교신문3418호/2018년8월2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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