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종 발전…불교개혁·선교통합 ‘법안종’ 수용

 

‘국가대업, 부처님 호위에 의지’
태조왕건 ‘훈요10조’로 명문화
연등회 팔관회 계속 봉행 당부

선종 점차 위축, 화엄종·유가종
천태종 활발하게 움직일 무렵

광종, 혜거선사 법문 듣고 귀의 
도봉원 영국사 ‘부동산문’ 지정
대장경 소장…단절 없도록 지시

도봉서원터는 고려시대 크게 번창한 영국사, 도봉원이었다. 왼쪽 위 사진은 도봉서원터 전경.

나말여초의 선종사가 정리되고, 본격적으로 고려시대로 접어들었다. 고려는 우리나라 역사상 문화적으로도 꽃을 피웠지만, 불교적으로도 번성했던 시대이다. 아쉬운 점은 불교사상이 나말여초 때만큼 발전하지 못했다. 하지만 신라 때 발아된 불교가 꽃을 피운 시기가 바로 고려이다. 태조 왕건은 후대 국왕들에게 유언으로 ‘훈요10조’를 남겼다. ‘국가의 대업은 반드시 부처님의 호위에 의지할 것’을 명문화했으며, 연등회와 팔관회의 꾸준한 시행을 부탁했다. 태조는 개경을 중심으로 10곳 사찰을 창건하고, 중수했다. 4대 광종도 불교를 옹호하며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전반적으로 고려의 왕들은 부처님의 힘으로 고려의 안녕을 기원했으며, 징엄·종린·충희·지인 등 왕자 출신 승려가 많이 배출됐다. 그만큼 불교와 왕권이 밀착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고려 초기를 지나 불교계는 선종이 점차 위축되고, 화엄종·유가종(법상종)·천태종 등 교종이 활발하게 움직였다. 먼저 화엄종이 발전하고, 뒤를 이어 법상종, 천태종이 발전했다. 

첫째, 화엄종에는 균여(均如, 923˜973년)의 활동이다. 그의 화엄사상과 화엄학은 고려 초기에 불교사회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균여는 화엄의 바탕위에 성상융회(性相融會, 본체와 현상)사상을 강조하며, 당시 불교계의 종파 통합에도 노력했다. 고려 4대 광종(949~975년 재위)은 963년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해 균여가 머물도록 했다. 그곳에 일종의 구급기관으로써 현재의 재해대책본부와 같은 상설기관인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했다. 

북한산 입구에서 20여분 거리 김수영 시비 뒤편에 위치한 도봉원. 현재 복원중이라 외부인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둘째, 법상종에는 혜덕(慧德) 왕사 소현(韶顯, 1038˜1096년)의 활동이 활발했다. 당시 중국은 서명원측(西明圓測) 학파와 자은규기(慈恩窺基) 학파로 나누어 있었다. 고려 초까지 법상종은 서명 학파였으나 소현이 활동하면서 자은 학파로 변화됐다. 

셋째, 천태종에는 대각국사 의천(1055˜1101년)이 활동했다. 의천은 문종의 넷째 왕자로서 11세에 출가해 30세에 송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귀국할 때 많은 경(經)을 가지고 와서 흥왕사에 교장도감(敎藏都監)을 설치하고 속장경 간행에 착수했다. 의천은 선교(禪敎) 대립을 의식해 조계종과 교종인 화엄종과 결합하는 등 선교 통합을 위해 노력했다. 

나말여초 아홉 산문 가운데 가지산문·사굴산문·봉림산문·성주산문(대통과 현휘)은 고려 말기까지 존속했다. 고려 초, 세력을 떨쳤던 산문은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이다. 선종은 ‘조계선종’이라고 하여 ‘조계’라는 종파 단어가 쓰이기 시작했다. 전반적으로 교종이 활발하면서 왕사ㆍ국사에도 교종 승려가 책봉됐다. 상대적으로 선종은 위축됐지만, 선사가 배출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대표되는 인물이 혜거국사이다. 

  혜거국사와 도봉원 

고려 초기, 교종이 점차 발전되는 무렵, 선종 승려로서 활동했던 대표 인물이 혜거(慧炬, ?˜974년)이다. 혜거가 활동했던 곳은 도봉원(道峰院)이다. 예전에는 혜거에 대한 자료가 명확하지 않았고, 행적이 불분명했다. 그런데 몇 년 전 서울 도봉산 내 도봉서원에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면서 그의 모습이 확연히 드러났다. 이 도봉원은 조선 초기와 중기를 대표하는 유학자인 조광조(1482˜1519년)와 송시열(1607˜1689년)을 위한 사당으로 유학자들이 제사지냈던 서원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 다시 재건되었고, 1871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사라졌던 서원이다. 

그런데 이 서원터는 원래 고려시대 크게 번창한 영국사, 도봉원이었다. 2012년 서원터에서 금강령, 금강저, 향로 등 고려 때 보물급 불교공예품 등 유물이 쏟아져 나왔고, 서원의 핵심 건물터도 사찰의 금당 위에 지어진 흔적이 드러났다. 2017년 도봉서원 터에서 고려시대 불교 유물이 또 발견됐다. 이때 나온 유물에는 영국사에 주석했던 혜거국사비 조각뿐만 아니라 영국사의 내력과 혜거의 행적 기록물도 있었다. 이 혜거국사비는 조선시대 선조의 손자인 이우(1637〜1693년)가 현종 9년(1668년)에 신라시대 이후의 금석문 탁본을 모아 엮은 <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 88자만 남은 비석 조각의 탁본이 실려 전해왔으나 실제는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혜거국사의 비석 조각은 화강암 재질로 281자가 새겨져 있다. 판독된 글자는 256자로 ‘견주도봉산영국사(見州道峯山寧國寺)’라는 명문이 확인된다. ‘견주(見州)’는 경기도 양주의 옛 지명으로, 도봉산 일대가 이에 포함된다. 

발굴 중에 나온 견주도봉산영국사 혜거국사비편.

그러면 혜거국사는 어떤 인물인가? 성이 노(盧) 씨이고, 10세기 중국 남방 지역인 오월로 유학 가서 법안종의 법안 문익(法眼文益, 885~958년) 문하에서 공부하고 돌아왔다. 혜거는 영감(靈鑑)과 함께 유학을 다녀왔고,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법안종 사상을 전한 선사이다. 혜거가 고려로 돌아왔을 때, 당시 국왕이 4대 광종(949~975년 재위)이었다. 광종은 불교를 개혁하고 선교 양종을 통합하기 위해 법안종을 수용했다. 이 점은 혜거국사의 조언을 받아들인 것이다. 1004년 편찬된 <경덕전등록> 25권에 혜거에 관해 이렇게 전한다. 한편 승려들도 자유롭게 남방으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던 것도 혜거의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혜거는 처음 정혜(淨慧)에게 법을 얻었다. 본국의 왕이 사모하여 사신을 보내 고려로 오라고 청하므로 본국으로 돌아갔다. 본국의 왕이 혜거의 법문을 듣고 귀의했다. 이후 왕이 혜거를 왕궁에 초청해 위봉루(威鳳樓, 왕의 누각)에서 설법토록 하였다.”

<전등록>에는 선사로서 혜거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선사가 위봉루에서 법을 설하는 중에 위봉루를 가리키면서 대중에게 말했다. “위봉루가 여러 상좌들을 위해 벌써 다 거량을 마쳤다. 여러분, 알겠는가? 만일 알았다면, 어떻게 아는가? 혹 모른다면 위봉루를 어째서 모르는가? 여기서 법을 끝냅니다.” 선사로서의 위용이 드러나 있다. 

한편 광종은 봉림산문의 찬유와 희양산문의 긍양에게도 귀의했다. 혜거가 머물던 도봉원(영국사), 찬유가 머물던 고달원, 긍양이 머물던 희양원은 ‘3대 부동산문(不動山門)’으로 지정됐다. 부동산문이란 직계 문도들만이 주석할 수 있는 도량으로 광종이 지정한 것이다. 광종은 고달원, 희양원, 도봉원에만 대장경을 소장케 하고, 대대로 단절되지 않도록 특별히 지시했다. 고달원은 앞에서 몇 번이고 거론했던 경기도 이천의 봉림산문이다. 이 고달원은 당시 사방 30리가 사역권으로 수백 명의 승려가 주석했다고 한다. 아무튼 여러 정황에 견주어 혜거국사가 머물던 도봉원이 당시 고려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짐작케 한다. 

영국사는 <조선왕조실록>에도 중건 기록이 전하며, 세종의 형 효령대군이 중창 당시 대시주를 했다. 은평구 진관사의 수륙재를 영국사에서 거행할 것을 논의했으며, 세조도 축수재를 치를 정도로 영국사의 사세가 컸다고 전해진다. 이렇게 조선 초까지 건재했던 사찰이 유학자들의 (횡포에) 절집이 허물어지고 서원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이런 경우가 빈번했다. 

중국도 이런 경우가 비일비재했다. 당시 황권이 어떤 종교를 신봉하느냐에 따라 불교 사찰이 도교 사찰로 되기도 했다. 현 중국 지도에는 도교이든 불교 사찰이든 ‘사묘(寺廟)’라고 지명하는데, 두 도량 내부가 흡사하다. 한편 도교와 불교가 상생하는 곳도 있다. 마조의 스승인 남악회양(677˜744)이 머물렀던 복엄사(福嚴寺, 호남성 남악형산)는 선종 사찰인데도 도량 내 당우에는 <악신전(岳神殿)>이 있다. 남북조시대에 주조된 남악신이 모셔져 있다. 원래 형산은 원래 도교 성지이다. 또한 산서성 대동에 위치한 현공사(縣空寺)에는 ‘삼교전(三敎殿)’ 당우가 있다. 삼교전에 주존으로 부처님, 좌측에 노자, 우측에 공자가 모셔져 있는데, 불교, 유교, 도교의 합일을 상징하는 의미로 삼교전이라고 했다. 

더위가 시작되는 7월 중순 도봉원을 다녀왔다. 북한산 국립공원 입구에서 20분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현재 도봉원을 복원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 그런데 유교 유생들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유태인들은 2000년을 떠돌다가 자기 땅을 인정받고 이스라엘을 건설했다. 불교계도 고려시대의 영국사로 복원되도록 노력해야 하지 않을까? 

[불교신문3416호/2018년8월18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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