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몸 부서져 없어지더라도 독립 결심했다”

항일독립운동…수차례 투옥 
해방 앞두고 청주서 ‘옥사’
진관사서 매년 추모재 봉행
은평구는 이현세 만화 제작  

초월스님 사진. 일제 당국이 작성한 감시인물 카드에 실린 것이다.

매년 3·1절이 되면 서울시 은평구 거리에는 ‘오래된 낡은 태극기’가 내걸린다. 얼룩도 묻어 있고 지금과 다른 태극 문양이 낯설기만 하다. 길을 오가는 시민들 가운데 일부는 걸음을 멈추고 “무슨 사연을 간직한 태극기일까”라고 궁금해 한다. 은평구에 자리한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나온 태극기로 선조들의 항일 정신이 깃들어 있다는 사연을 알고 나면 “의미가 크다”고 한목소리를 낸다. 

폭염(暴炎)이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 중순. 천년고찰 서울 진관사(주지 계호스님)는 한여름의 뜨거운 열기에도 불구하고 북한산 자락에서 내려온 시원한 바람이 휘감아 돌면서 명찰(名刹)임을 증명했다. 고려 현종 2년(1011년) 창건된 진관사는 고려와 조선을 거쳐 한국전쟁 이전까지 ‘경기도 제1위 사찰’의 위상을 갖고 있던 대찰(大刹)이었다. 

1927년 2월7일자 <동아일보>는 ‘순회탐방(巡廻探訪)’이란 제목의 기사에서 진관사에 대해 “신도면(神道面) 진관외리에 재(在)하다”면서 “대웅전과 기타 전각이 웅대(雄大)하기로 기내(畿內, 경기도 내) 사찰 중 1위를 점할만하다”고 보도했을 정도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전쟁으로 일부 전각만 남고 사실상 폐허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1963년 비구니 진관스님이 주석하면서 중창불사를 이뤄 지금의 사격(寺格)을 갖춘 것이다.

한국전쟁의 전화(戰禍)를 피한 진관사는 2009년 5월26일 칠성각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료들을 다수 발견했다. 전쟁의 상흔을 아슬아슬하게 피한 칠성각 벽에서 90여 년간 온전하게 보존된 자료들이 세상의 빛을 본 것이다. 오랜 침묵의 세월을 견딘 타임캡슐에 들어 있는 과거의 흔적이 현재와 만나는 역사적 순간이었다. 

이날 칠성각에서는 1919년 3ㆍ1운동 직후의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 32호·40호(5점)와 <자유신종보(自由晨鍾報)>(6점), 상해임시정부 기관지 <독립신문(獨立新聞)>(4점), 단재 신채호 선생이 상해에서 발행한 <신대한(新大韓)> 2·3호(3점) 등이 쏟아졌다. 일제 강점기 민족을 배반하고 부역하는 친일파를 준엄하게 꾸짖는 경고문 2점 등 모두 20여점이 나왔다. 

칠성각에서 발견된 역사적인 자료들은 대형 태극기에 정성스럽게 싸여 있었다. 크기는 가로 89cm, 세로 70cm, 그리고 태극의 지름은 32cm였다.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덧그려 ‘항일(抗日)’의 의지를 담았기에 의미가 더 컸다. 매년 3·1절 은평구가 거리마다 게양하는 태극기는 이날 발견한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이날 나온 자료들은 3ㆍ1운동과 일제강점기에 진관사가 항일운동의 중요한 거점이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준다. 특히 <독립신문>과 <신대한>은 국내와 상해임시정부를 이어주는 창구 역할을 진관사가 담당했음을 짐작케 한다. 
 

초월스님이 일제강점기에 태극기와 항일운동자료를 비밀리에 숨긴 진관사 칠성각 내부.

그러면 누가 이러한 자료들을 진관사 칠성각 벽면에 비밀리에 숨겼을까? 주인공은 일제강점기 진관사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한 백초월(白初月, 1878~1944)스님이다. 독립운동에 깊숙이 참여한 초월스님이 1920년 초 일경(日警)의 감시가 바짝 조여 오자 태극기를 비롯한 각종 독립운동자료들을 칠성각 벽속에 비밀리에 숨긴 것이다. 

경남 고성에서 태어나 지리산 영은사로 출가한 초월스님은 일제강점기에 진관사 마포포교당(극락암)을 근거지로 지하조직인 ‘전국불교도독립운동본부(全國佛敎徒獨立運動本部)’를 설립해 항일 투쟁을 전개했다. 지하신문 <혁신공보(革新公報)>를 제작 배포한 것은 물론 독립자금과 군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와 독립군에 전달했다. 

또한 초월스님은 “2000만 조선 동포가 한마음으로 뭉치면 독립을 이룰 수 있다”는 원력으로 일심교(一心敎)를 만들어 활동했다. 일부 자료에는 일본 도쿄(東京)에서 일심교 운동을 하다 체포돼 압송 당했다고 하는데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이보다 앞서 1900년대 초기에 스님은 동래(부산) 범어사에 머문 것으로 보인다. 1909년 범어사에서 필사(筆寫)한 ‘석가여래성도기(釋迦如來成道記)’에 스님의 법명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필사본 말미에 ‘己酉秋七月(을유추칠월) 東來梵魚寺(동래범어사) 淸豊講堂(청농강당) 初月大和尙(초월대화상) 法下(법하) 同居錄(동거록)’이라고 적혀 있다. 을유년은 1909년이다. 이 자료는 고양 원각사 주지 정각스님(중앙승가대 교수)이 입수해 2009년 8월 <불교신문>을 통해 공개했다. 

백초월스님은 1916년 무렵 진관사 마포포교당을 거점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1915년 4월 발간된 <불교진흥회월보(佛敎振興會月報)>에는 초월스님이 30본산주지회의(三十本山住持會議)에서 중앙학림(中央學林) 강사(講師)로 결정한 기사가 나온다. 소속 사찰은 ‘함양군 영원사’로 표기됐다. 불교계에서 설립한 중앙학림 학생들은 1919년 3·1운동 당시 서울은 물론 전국 각지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6년 12월16일 함양 영원사 주지 소임을 맡은 내용이 1917년 3월 <조선불교총보(朝鮮佛敎叢報)에 실려 있다. 하지만 스님은 주로 서울에서 활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1920년 초반 체포된 후 혹독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지만 민족정신과 독립의지를 결코 버리지 않았다. 1921년부터 1929년 사이에 진관사에서 학인을 가르친데 이어, 동학사(1930년대 초반), 월정사(1935년), 봉원사(1936년)에서도 강사로 활동하며 후학을 길렀다. 
 

진관사 대웅전 전경.

진관사로 다시 돌아온 것은 1938년 초로 추정된다. 스님은 진관사 마포포교당에서 주석하며 전법과 동시에 비밀 독립운동에 나섰다. 1939년 10월 경성에서 만주 봉천으로 가는 일제의 군용열차에 ‘대한독립만세’라는 격문(檄文)을 쓴 사건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2년6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당시 마포포교당에 거주하던 박수남(용산철도국 작업부)이 격문 사건의 배후 주모자로 스님을 지목했기 때문이다. 이어 1944년에는 독립자금과 군자금을 모금한 사건을 빌미로 또 다시 체포돼 가혹한 고문을 받고 투옥됐다. 

같은 해 6월29일 해방을 불과 1년여 앞두고 청주교도소에서 세상을 떠났다. 일제 당국이 시신을 무성의하게 처리해 스님의 유해가 어디에 묻혔는지 지금까지도 분명하지 않다. 1986년 12월16일 정부에서는 스님의 치열한 독립투쟁을 높이 평가해 건국포장을 추서하고, 2014년 6월에는 ‘6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진관사와 은평구는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결연히 싸우다 옥사(獄死)한 초월스님의 구국정신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진관사는 매년 6월 스님의 입적 기일에 즈음해 ‘백초월 스님 추모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은평구는 유명만화가 이현세 작가가 그린 ‘초월’을 ‘다음웹툰’에서 연재하는 등 스님 선양 사업을 펼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인터넷을 통해 ‘독립운동가 백초월스님의 삶’을 만화로 소개하고 있다. 진관사 소장 태극기와 독립신문 등 일체 자료는 2010년 2월25일 등록문화재 제458호로 지정됐다. 스님 고향인 경남 고성군 영오면 성곡리에는 1991년 6월1일 제막한 ‘구국당인영백초월대선사순국비(龜國堂寅榮白初月大禪師殉國碑)’가 있다.

독립기념관이 1989년 발행한 <항일 의열투쟁사>는 “불교계 승려들의 독립투쟁 가운데서도 백초월은 한용운, 백용성의 활동에 뒤지지 않는 존재”라면서 “항일독립운동에 걸출한 활동을 하다 옥사 순국한 세 사람의 의열사를 들 때 신채호, 김동삼과 함께 백초월을 넣는 이도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초월스님은 “이 몸이 부서져 없어지는 한이 있어도 독립이 되도록 결심했다”고 결연한 의지를 밝힌바 있다. 한치 앞도 보이지 않는 일제 암흑기였지만 조선독립이란 대의명분을 실현하기 위해 간절하게 발원하고 온 몸으로 실천한 초월스님의 열정은 후대의 귀감이 되기에 모자람이 없다. 
 

진관사 입구의 ‘태극기 비’. 2011년 8월10일 제막했다.

[불교신문3415호/2018년8월1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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