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황금기와 쇠퇴 반복

11~14세기엔 화려한 불교문화 창조
이후엔 쇠퇴하지만 민중불교로 변모

베트남이 혼란기를 지나 최초의 완전한 독립 국가를 이룬 것은 1009년 이공온(李公蘊)에 의해 열린 이조 때부터이다. 국호를 대월(Dai Viet, 大越)로 칭한 이조는 승룡(Thang Long, 昇龍: 현재의 하노이)을 수도로 정하고, 1225년까지 베트남 최장기의 왕조를 유지했다. 이조(李朝)는 불교를 보호해 많은 절을 건립하고 스님들을 보호했다. 특히 이태조(太祖: 李公蘊)는 개국 초기 10개의 사찰을 불사해 불교를 흥륭시키는 한편, 송(宋)에 사절을 보내 대장경을 구입하기도 했다.

이태조와 그의 후계자들은 불교를 공식적으로 국가 종교로 인정하고, 10세기에 걸쳐 불교를 지지했던 열렬한 불자 지지자들과 후원자들이었다. 4세기 동안 이(Ly)와 쩐(Tran)는 베트남 불교의 번영을 이룩했다. 그들은 범죄자, 수감자, 외국의 적들 또는 반역자조차도 그들의 국민에 대한 위대한 연민과 관용을 보여줬다. 

이조의 뒤를 이은 쩐(Tran, 陳)왕조(1225-1400년)는 한층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갖추었다. 태종(太宗)·인종(仁宗) 때에는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몽골군(Yuang Meng)과 전쟁을 치렀으나 3차례 모두 승리로 이끌었다. 또한 베트남사상 가장 화려한 문화를 창조했다. 진조(陳朝)는 한자를 이용해 쯔놈(Chu Nom, 字湳)이라는 문자를 창안했으며, 이로 인해 불경이 번역되고 불교의 대중화에도 크게 기여했다. 

황금시기 동안 베트남의 불교사상, 문학, 건축, 산문 및 다양한 예술 작품들이 가장 잘 발달됐다. 법라대사는 200개 이상의 죽림(Truc Lam)선원을 건설하였으며 1만5000명이 넘는 스님들을 교육하는 데에 기여했다. 법라로 이어진 제3세 현광(玄光, Huyen Quang)대사에 의해 죽림파가 베트남불교 황금시기의 상징이 되었다. 위대한 스님이자 학자, 그리고 시인인 현광스님은 20년 간 곤선 (Con Son)산에서 고요한 수행생활을 하시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강설했으며 정진 명상을 하고 시를 읊었다. 

그러나 진조(陳朝)가 망하고, 후여(後黎)가 성립(1428)하자, 불교는 크게 후퇴하는 양상을 보인다. 후여는 중국 명(明)의 영향을 받아 유학을 크게 숭상했으며 이로 인해 상대적으로 불교는 쇠퇴 현상이 뚜렷했다. 특히 후여의 성종은 전국에 사찰을 새로 짓는 것을 금했을 뿐만 아니라 사령(寺領)을 엄격히 제한했다.

왕조가 불교를 외면하는 정책을 취하자 불교는 민중 속으로 파고 들어가 새로운 형태로 변모해갔다. 죽림파는 선(禪)보다는 정토(淨土)적 색채를 강하게 보였으며, 중국 송대에 일어난 백련교가 도입돼 염불과 밀교적 색채를 베트남 고유의 민간신앙과 결합시켰다. 겉으로는 임제선을 표방하는 듯했지만, 내용으로 정토염불이 중심이었다. 베트남불교는 이때부터 정토교의가 신앙의 중심을 이루었다. 

운이 좋았던 점은 유교 학자들의 강한 반대와 왕들의 독점적인 질서에도 불구하고 불교가 모든 계층에 뿌리 깊게 뻗었기 때문에 사찰을 세우고 불교 경전을 재 인쇄함으로써 힘든 시기에도 그들의 신앙을 끊임없이 지켜냈다는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식민통치를 시작한 이래로 불교의 현황은 명백히 나빠졌다. 오랜 전통의 종교로서 불교는 식민지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불교신문3414호/2018년8월11일자]

베트남 각려효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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