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건국 구축점…한국불교 발전의 아이콘

지방분권 지배자 코드 부합
선교융합ㆍ선문화 융합이나 
보살행 전개한 선사도 등장 

선원은 선종사찰의 상징이기도 하다. 사진은 종립특별선원이 있는 문경 봉암사 ‘희양산문 태고선원' 편액.

불교학자들은 신라 말기, 교종의 불교학 쇠퇴를 선종의 등장 때문이라고 본다. 반면 역사학자들은 선종의 대두가 역사를 다음 단계로 변혁시키는 계기가 됐다고 평가한다. 사람의 일이든 역사이든 변화에 따른 진통이 있기 마련이다. 변화를 잘 넘기면 ‘발전’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쇠퇴’가 된다. 12세기 인도에서 불교가 사라질 때, 외부(이슬람교도들의 파괴)만이 아니라 승가 내부에도 문제가 있었다. 변화가 ‘발전’이 아닌 ‘쇠퇴’가 된 것이 지금의 인도불교다. 그렇다면 나말여초 선종과 선사상은 어떤 평가를 받는가? 필자는 고려가 세워지는데 구축점이 됐고, 역사를 발전시켰으며, 한국불교의 근간이 정립된 ‘발전’의 아이콘이라고 본다. 

먼저 나말여초 구산선문의 유래를 보자. 신라 말부터 고려 초까지 우후죽순처럼 일어났던 산문은 9산선문 뿐만 아니라 수많은 산문이 있었다. 단지 대표 산문을 ‘9산선문’이라고 한다. <고려사>에 의하면 아홉 산문에서 선(禪)을 수행하는 승려들에게도 3년에 한 번씩 시험을 볼 수 있도록 요청하자 이를 수락했다는 내용이 전한다. 그 이후 자료에도 ‘달마구산문(達磨九山門)’이나 ‘구산선려(九山禪侶)’와 같은 용어가 보이는데, 구산선문의 이름과 장소 및 개산조들을 구체적으로 밝히고 있는 문헌은 고려 후기의 것으로 보이는 <선문조사예참의문(禪門祖師禮懺儀文)>이다. 이 ‘예참의문’에 산문과 개산(開山) 조사의 이름이 있을 뿐이다. 막연하게 ‘구산선문’이라고만 전해져 왔던 아홉 산의 내용이 여기서 밝혀졌다. 독특한 점은 여기에 아홉 명의 선사들과 함께 보조 지눌(1158〜1210년)이 예참의 대상으로 언급되어 있는 점이다. 이는 한국선에서 지눌이 차지하는 위치를 보여준다. 이를 통해 적어도 고려 중기˜후기 사이에 구산선문이 한국선을 대표하는 산문으로 인식됐고, 즉금에는 일반화된 한국불교사이다. 

둘째, 구산선문의 개조를 포함해 당시 선사들 중에는 6두품 이하의 신분이거나 호족 출신이 많았다. 이런 상황에 자연스럽게 선종은 신라 하대로 접어들면서 새롭게 대두하던 6두품과 지방 호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진골 귀족의 견제로 신라 사회에서 정치적 뜻을 펼 수 없었던 6두품과 호족들이 선종의 산문 개산에 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데 선종이 발전할 당시 사회적 배경에 있어 중국과 신라는 조금 다른 점이 있다. 중국의 선사들이 왕권과는 거리가 먼 강호(江西省·湖南省)에서 활동했다. 즉 중국은 시골 변방에서 선이 발전한 반면 신라는 산문이 성립되는데 호족이나 왕권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선종 발달 측면에서 당나라와 신라는 이렇게 차이가 있다. 공통점이라고 한다면 선이 풍요로운 시골의 곡창지대를 배경으로 발달했고, 지방 분권 지배자들의 코드에 부합되었다는 점이다. 

셋째, 구산선문 가운데 개조(開祖)에 의해 산문이 열린 것이 아니라 2조나 3조 제자에 의해 산문이 열린 경우가 있다. 최초로 신라에 선을 전한 사람은 법랑(法朗)이나 그의 5대 제자인 지선이 희양산문을 열었다. 가지산문은 3세인 보조체징이 산문을 열었다. 사자산문은 도윤이 아닌 2세인 절중(折中)에 의해 산문이 개산됐다. 봉림산문도 2세인 심희(審希)가 산문을 열었다. 

넷째, 순수하게 선만을 지향한 선사들이 있는 반면 선교융합을 꾀한 선사들이 있다. 순수하게 선만을 지향했던 선사들은 가지산문 도의국사의 선교판석(禪敎判釋), 성주산문 무염의 무설토론(無舌土論), 사굴산문 범일의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을 꼽을 수 있다. 선교융합 사상을 가진 선사들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한 실상산문의 홍척, 혜철 등 대다수 선사들이다. 여기서 선교융합이라고 할 때, 선+화엄이 보편적이다. 선교융합은 이후 고려시대 보조 지눌로, 조선시대 청허 휴정으로 사상이 이어진다. 

다섯째, 신라말기는 화엄사상이 주류를 이루었다. 선사들도 선을 하기에 앞서 화엄을 공부했는데, 성주산문 무염과 동리산문 혜철은 부석사에서, 사자산문 도윤은 귀신사에서, 동리산문 도선은 화엄사에서 화엄을 공부한 경우이다. 하지만 실상산문의 홍척이 실상사에 산문을 열은 이후부터 선이 신라에 빠르게 전파되어 9세기 말부터는 화엄종을 능가할 만큼이었다. 10세기 초에 이르러 선종은 교종보다 교세가 점점 커져가면서 화엄종이 위축됐다. 화엄종 승려가 선종으로 개종하기도 하고, 화엄종 사찰이 선종 사찰로 바뀌기도 했다. 그렇다고 왕들이 선종 승려를 국사로 책봉했다고 해서 화엄종과의 관계를 끊는 극단적인 예는 취하지 않았다. 오히려 선종과 화엄종을 융합하려는 왕도 있었다. 어쨌든 선종과 화엄종이 대립하기도 했지만, 상호 영향을 주면서 공존하는 양상을 띠었다. 

여섯째, 9산 선문의 개조 가운데 7개 산문이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년)의 법손들이다. 그 이외 신라 구법승들 중에는 마조계에서 법을 받은 선사들이 많았다. 희양산문 긍양의 비문에 전하는 희양산파의 주장대로 쌍계사의 진감 혜소(773˜850년)를 희양산문의 승려로 볼 경우, 8명이 모두 마조계의 법을 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문과 상관없이 실제로 혜소가 당나라에 들어가 스승으로 모신 창주 신감은 마조의 제자이다. 

일곱째, 신라 말기에 처음 선이 들어올 때는 마조계에서 법을 받은 선사들이 대다수였던 반면, 점차 고려 초기로 넘어가면서 수미산문 이엄을 포함해 석두계 조동종의 법맥을 이어온 선사들이 많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전반적으로 선사들 중에는 우리나라 스승의 법을 받고, 재차 당나라에 들어가 조동종계 선사들에게 법맥을 받아와 신라에 선풍을 전개했다. 또 오관산문의 순지는 위앙종의 선풍을 전수해 일원상을 체계적으로 정립했으며, 봉림산문의 현욱도 일원상을 방편으로 삼았다. 또한 고려초기(광종 때)에는 법안종의 선풍이 전개됐다.

여덟째, 선문화의 융합이나 보살행을 전개한 선사들이 있다. 구산선문에 속하지는 않지만, 쌍계사의 혜소는 우리나라 최초로 범패를 도입시켰고, 다도(茶道)를 발전시켰다. 또한 혜소는 병자를 치료해주기도 했고, 오관산문의 순지는 시현성불의 보살행 이론을 정립했다. 

아홉째, 희양산문의 지선은 한국적인 선을 구축했는데, 민간 토속신앙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유교·도교와 관계를 지으며 불교적 융합을 꾀했다. 

열째, 신라하대 때 급속도로 발전한 선종은 중국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 계기가 됐고, 고려 왕조 개창의 사상적인 배경이 됐다. 

[불교신문3414호/2018년8월11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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