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닦는 ‘선’이 최상승…대적할 만한 것이 없다

동리산문 혜철선사 제자 되어 
무설설무법법 듣고 인가 받아
“절·탑 세워 얻는 이익과 공덕 
선리(禪理) 정묘함엔 못 미쳐” 

‘풍수지리설 주장’ 최초 선사
혼란한 시기 국가 국민에 대한
연민심ㆍ비보사탑설 부각되며
도술가 이미지로 와전…굳어져

광양 백계산 옥룡사 머무르며
‘옥룡자’ ‘도승’으로 불리기도 

도선국사 진영(영암 도갑사 홈페이지).

나말여초, 구산선문 가운데 동리산문은 곡성 태안사를 중심으로 혜철선사에 의해 번성했던 산문이다. 혜철선사의 제자인 도선(道詵)국사는 선사로서의 이미지보다 풍수지리가나 도참신앙의 예언가로 알려져 있다.

후대이지만 풍수지리에 대한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전한다. 조선 말기 흥선대원군은 아들 고종을 왕으로 앉히기 위해 아버지(남연군)묘를 명당터로 옮기려고 했다. 마침 당시 풍수지리가 정만인을 만났는데, 그는 ‘충청도 덕산 가야사(현 보덕사)가 2대 천자가 날 자리’라고 귀띔해 주었다.

옛날부터 ‘대웅전 위에 시신을 묻으면 발복(發福)이 되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어 대원군은 묘를 이전할 수 없었다. 이 무렵 스님들이 인근 수덕사에 제사를 지내러간 사이, 가야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남연군묘를 이장했는데, 얼마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왕이 됐다. 고종이 왕이 된 후 대원군은 절을 태운 데 대한 죄책감으로 옛 가야사터에서 2km 떨어진 지점에 보덕사(報德寺)를 창건했다. 현재 이 절은 비구니 선방이다. 명당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싶기도 하지만, 그 나름대로의 철학이 있을 게다. 풍수가들은 ‘마음가짐이 올바른 사람에게 명당터가 생기며, 아무리 좋은 명당터도 인연이 닿지 않으면 관이 못 들어가는데, 살아생전 선한 행동을 많이 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 곧 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마음가짐이 어떠하냐에 따라 명당도 인연된다는 뜻이라고 본다.

사주나 관상 등을 하는 사람들도 하나 같이 하는 말이 있다. ‘사주와 관상보다 심상(心相)이 제일 중요하다’는 것이다. 풍수지리의 대가인 육관 손석우는 우리나라 대사찰들이 풍수지리적으로 가장 좋은 명당터에 위치해 있다고 한다. 부처님이 좋은 자리에 앉아계시기 때문에 그 후손(승려)들이 절대 굶거나 잘못되지 않을 거라고 했다(‘터-육관도사의 풍수명당이야기’에서). 20여 년 전에 읽은 내용이어서 정확치는 않지만 불교가 번창해 영원할 거라는 내용이었다.

 ➲ 선사로서의 진면목 

도선(道詵, 827~898년)국사는 우리나라 역사에서 풍수지리설을 주장했던 최초의 인물이다. 영암 출신으로 광양시 백계산 옥룡사에 머물렀기 때문에 ‘옥룡자’라고도 하며 ‘도승(道乘)’으로도 불리기도 한다.

15세에 출가해 월유산(현 지리산) 화엄사에서 <화엄경>을 공부하고, 850년 23세 때 천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20세 무렵, 846년 동리산문 혜철선사의 제자가 되어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을 듣고 깨달음을 얻었다. 도선은 스승에게서 심인을 얻은 뒤 운봉산과 태백산 등지에서 정진하며, 수행의 끈을 놓지 않았다. 이렇게 15년 정도 행각한 후 37세 무렵, 희양현 백계산에 이르러 고옥령사를 재건했다. 도선은 동리산문 태안사와는 다른 선풍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동리산문은 혜철의 제자 ○여가 받았고, 이어서 ○여의 제자 윤다가 선풍을 전개했다. 도선은 옥룡사에서 수많은 제자들을 지도하였고, 재가자들을 진리로 이끌었다.

신라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도선의 높은 인품을 존경해 왕궁에 초빙했는데, 둘은 초면인데도 오랜 벗을 만난 것처럼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도선은 차원 높은 설법으로 왕에게 마음 밝히는 진리를 설해주고, 본래 사찰로 돌아왔다. 어느 날 제자들을 불러 모은 도선은 “내가 이제 가야겠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만고불변의 이치이니 무엇 하러 더 여기 있을 것인가?”라고 말한 뒤 입적했다. 그의 나이 72세였다. 효공왕(898~912년 재위)은 도선의 입적 소식을 듣고 몹시 슬퍼하며 시호를 요공(了空),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으로 봉하였다.

도선국사가 상주했던 광양 옥룡사지(한국민족문화대백과 제공).

또 고려 개국에 도움을 준 인연으로 훗날 현종(1009~1031년 재위)은 대선사(大禪師), 숙종(1096~1105년 재위)은 왕사(王師)로 추증했으며, 인종(1123~1146년 재위)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봉했다. 시호는 요공(了空), 탑명은 증성혜등(證聖慧燈)이다(광양 옥룡사 선각국사 증성혜등 탑비). 제자에는 경보(868~948년), 형균, 민언, 지효, 지연 등 전하는 이름만 수십여 명에 이른다. 또 도선의 입적 직후, 문인 홍적스님이 ‘도선의 행적이 후세에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되니, 도선의 행적을 기록으로 남기자’는 탄원서를 왕에게 올렸다.

이런 여러 정황 등으로 보아 당시 옥룡산문의 선풍이 어느 정도였는지의 규모를 짐작케 한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도선은 스승 혜철선사로부터 ‘무설설(無說說) 무법법(無法法)’의 법으로 심인을 받았다. 설하되 설한 자(說者)가 없고, 설법을 들었으되 들은 자(聞者)도 없다. 진리가 있다고 하지만 법이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청정 본연의 자성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금강경> 제7분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다. 설한 자도 없고, 들은 자도 없으니 당연히 무엇을 깨달았다는 증득자도 없는 것이다. <능가경>에서는 “내가 어느 날 밤 최정각을 얻고 나서 그 후 반열반에 들 때까지 그 중간에 한 자도 설하지 않았으며, 또한 이전에 말한 것도 없고, 앞으로도 설할 것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선종 사찰에 가면 설법전인데, ‘무설전(無說殿)’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이 사상은 당나라 8세기 중반 이후 경전에 입각해 확립된 조사선의 선사상이다. 조사선에서 깨달음의 경지를 한 단어로 표현하면, 무심(無心, 無住心)이다. 설하되 설함이 없고, 법을 법이라고 정의내릴 수 없는 무심의 경지를 조사선에서는 깨달음의 경지로 정의하기도 한다. 도선이 ‘무설설 무법법’의 법으로 심인을 얻었다고 함은 선사로서의 당연한 모습이다. 도선은 “절을 세우고, 탑을 세워 얻어진 국가적 이익과 공덕이 선리(禪理)의 정묘함에는 미치지 못한다”고 했다. 곧 어떤 것도 선(禪)과 대적할 만한 것이 없음이요, 마음 닦는 선(禪)이 최상승이라고 강조했다.

그런데 역사와 불교사에서는 이런 도선에 대한 평가가 절하되어 있다. 젊은 시절, 도선이 지리산 사발재(甌嶺)에 암자를 짓고 수도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인이 찾아와 “제자는 물외에서 초연하게 살기를 수백 년이 되었는데, 제게 조그마한 기술이 있어 스님에게 전하고자 합니다. 만약 스님이 천한 마술과 같은 것이라고 여기지 않는다면 훗날 남해 바닷가의 모래사장에서 전하겠습니다.

이는 곧 대보살의 중생구제하는 법”이라며 사라졌다. 도선은 기이하게 생각하고, 모래사장을 찾아가 그를 만났다. 그는 모래를 모아 우리나라 산천(山川)의 역순지세(逆順之勢)를 보여주었다. 그 후 이 지방 사람들이 이곳을 사도촌(沙圖村)이라고 불렀다. 도선은 우리나라의 지형지국에 대해 이렇게 설했다. “우리나라는 배가 항해하는 모습의 형태인데, 태백산과 금강산은 배의 머리, 영암 월출산과 영주산은 배의 꼬리, 부안의 변산은 배의 키, 지리산은 배의 노, 능주(현 화순)의 운주는 배의 복부”라고 규정했다. 이에 운주에는 운주사를 짓고 천불천탑을 봉안하여 지국을 눌러야 나라가 안정되어 편안하다고 주장했다. 이 내용은 <조선사찰사료> ‘도선국사실록’에 전한다.

이것이 지세를 살펴서 부족하고 어긋나는 곳(欠背處)에다 사찰이나 부도탑을 세워 지덕을 보충해야 한다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비보사탑설을 주장한 도선의 모습이 아니라 그 이상으로 도선을 묘사해 도참신앙의 술사(術士)나 풍수지리가로 인식되고 있다. 이에 도선의 이미지에 대해 세 가지로 반론을 제기해보기로 한다.

➲ 역사가 만들어낸 ‘도참승’ 

도갑사 도선국사 수미선사비(문화재청 제공).

첫째, 도선이 중국으로 건너가 일행(一行, 673~727년, 밀교 승려로 어려서부터 음양오행에 뛰어난 천문학자, 한편 율종 승려)에게 밀교적 전수를 배웠다고 한다. 이때 일행이 도선에게 ‘고려왕조 왕 씨 일가를 부탁하였고, 왕건의 탄생까지 점지했다’는 설이 전한다. 하지만 일행과 도선 사이에는 생몰년이 100년 정도 차이가 나, 서로 조우했을 가능성도 없다.

이 이야기들은 후대에 시대적인 요청에 의해 만들어진 가설이다. 도선을 신이적인 이미지로 만듦으로서 고려 왕조가 개창될 수밖에 없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고 본다. 둘째, <도선 비기(秘記)>, <옥룡집>, <도선 명당기>, <도선산수기> 등 도선이 했다는 저술이 여러 편 전하는데, 이 모두 도선의 저술이 아니다. ‘도선’이라는 이름을 의탁해 책의 당위성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이런 점으로 후대까지 도선이 풍수지리가나 술사의 이미지로 고착된 것 같다. 셋째, 고려 태조 왕건은 도참사상에 관심이 매우 깊었다. 후손들에게 경계하는 <훈요10조>에도 도참신앙이 있다. 제2조에 “새로 개창한 모든 사원은 도선이 미리 점쳐 놓은 산수순역설(山水順逆說)에 의거한 것이니, 절을 함부로 짓지 말라. 함부로 지어서 지덕이 손상되어 왕업을 단축시키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경계할 정도였다. 새로운 시대를 요구하는 데서 오는 호국적인 이미지로 선사를 만들었다고 본다.

이와 같이 시대와 역사가 도선을 ‘도참승’으로 만들었다고 본다. 도선의 비보사탑설은 사람으로 치면, 병이 들었을 때 혈맥을 찾아 뜸이나 침을 놓는 것과 같다. 삼국의 혼란한 시기, 국가와 국민에 대한 도선국사의 연민심이 도술가의 이미지로 와전되었다고 본다. 지금이라도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 근자에 도선을 선사로서의 모습으로 되찾기 위한 학술대회 및 음악회가 열리고 있다. 좋은 연구 결과 있기를 바란다.   

[불교신문3412호/2018년7월28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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