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방화소(南方畵所) 전통 계승한 문화중심 도량

‘춘마곡’이라는 이름답게 마곡사는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마곡사가 위치한 곳은 예로부터 동방 제일의 복된 땅(福地)이라 일컬어지던 길지로 꼽히는 곳이기도 하다. 사진은 수려한 산세를 자랑하는 마곡사 전경. 사진제공=마곡사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말이 전해질 만큼 마곡사 봄의 정취는 수려함을 자랑한다. 만물이 약동하는 봄이면 마곡사는 다양한 나무들과 꽃으로 장관을 이룬다. 하지만 마곡사는 봄을 비롯해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하는 곳이다. 마곡사를 비롯해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사찰 7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면서 ‘춘마곡’의 싱그러운 정취를 느끼기 위해 마곡사를 찾는 발길이 늘어날 전망이다.

제6교구본사 마곡사(주지 원경스님)가 위치한 곳은 예로부터 동방 제일의 복된 땅(福地)이라 일컬어지던 길지로 꼽힌다. <택리지>, <정감록> 등에서는 마곡사의 입지 조건을 전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꼽고 있다. 사찰 이름인 마곡(麻谷)은 빼곡하게 모인 사람들의 형상에 유래됐다. 보철화상 때 설법을 듣기 위해 계곡을 가득 메운 사람들의 형태가 ‘마(麻)’와 같다고 해 마곡사(麻谷寺)로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마곡사 사적입안>에 따르면 마곡사는 신라시대 고승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의해 640년 창건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 당나라에서 귀국한 자장율사는 선덕여왕의 후원으로 마곡사를 창건했다고 한다. <마곡사연기략초>에 따르면 9세기 보조선사 체칭스님에 의해 창건됐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창건 이후 마곡사는 통일신라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다섯 번의 중수가 있었다고 한다. 또 고려시대인 1199년에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왕명에 의해 마곡사를 중수했다고 하며, 12세기 말부터 15세기 후반 사이에 건립되었던 30여 채에 이르는 건물의 명칭을 기록하고 있어 마곡사의 사세를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마곡사는 고려 후반에서 조선 초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번영한 사찰이었다. 조선 전기 세조(世祖)가 마곡사에 들러 ‘만세토록 망하지 않을 땅(萬世不亡之地)’이라고 감탄하며 영산전 편액과 잡역의 부담을 면해주는 수패(手牌)를 내렸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고려 때와 마찬가지로 조선 전기에도 사세를 유지하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하지만 마곡사 역시 조선시대 다른 사찰들과 마찬가지로 전란의 화마를 비껴갈 수는 없었다. 마곡사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며 소실됐다. 폐허가 된 마곡사는 1650년부터 각순스님에 의해 중창됐다. 각순스님은 10년 동안 마곡사 중창불사에 매진하며 마곡사의 사격을 일신하는데 기여했다.

보물 제799호 마곡사 오층석탑. 고려시대에 조성된 석탑으로 마곡사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사진 이시영 충청지사장

조선시대에는 충청도를 대표하는 16중법산(中法山) 사찰로, 일제강점기에도 30본산의 하나로, 현재는 조계종 제6교구본사로서 인근 지역의 많은 사암을 관장하는 위상을 간직하고 있다. 지역 중심 사찰답게 찬란한 문화유산도 보존하고 있다. 마곡사에는 보물 제801호 대웅보전과 보물 제802호 대광보전, 보물 제800호 영산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 마곡사 해탈문 등이 가람을 구성하고 있으며, 보물 제799호 공주 마곡사 오층석탑과 보물 제1260호 마곡사석가모니불괘불탱을 비롯해 보물 제269호·270호 감지금니묘법연화경 제1권·6권 등의 성보를 보존하고 있다.

마곡사는 불화를 그리는 화승(畵僧) 계보로도 널리 이름을 알렸던 화소사찰(畵所寺刹)로도 유명하다. 화승(畵僧)들을 전문적으로 기르고 배출했던 마곡사는 수많은 화승들을 대대로 배출해‘남방화소(南方畵所)’라 불릴 정도였다. 공주 계룡산 권역의 화승들은 계룡산 화파라고도 불렀는데 계룡사 화파의 중심이 바로 마곡사였다.

마곡사는 남양주 흥국사(경산화소), 금강산 유점사(북방화소)와 더불어 조선후기를 대표하던 화소사찰이었다. 남방화소는 19세기 말 약효스님으로부터 근대의 문성스님, 일섭스님을 거쳐 현대 석정스님에 이르는 계보로 이어져 조선불화사의 큰 맥을 잇고 있다. 

“조선 말기 마곡사에 상주한 스님이 300여 명에 이를 무렵 불화를 배우는 스님만도 80여명에 이르렀다”는 정연스님 불모비의 기록에서 수많은 화승들을 배출했던 마곡사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마곡사를 통해 배출된 화승들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파괴된 사찰을 정비하기 위해 재건불사를 수행할 전문 인력으로 활약했다.

마곡사는 남방화소의 전통을 계승하기 위해 ‘금어원(金魚院)’ 복원을 추진하고 았다. 전국 사찰의 불상, 탱화, 단청의 제작해 불교예술을 발전시켜 온 전통을 계승해 전통 불교미술을 세계적인 문화 콘텐츠로 계승 발전시켜 나간다는 계획이다.

마곡사 경내에 조성된 백범당. 사진 이시영 충청지사장

마곡사에서 만나는 백범의 발자취

백범당, 백범명상길 등 조성…추모다례도 봉행

제6교구본사 마곡사 마당 한 쪽에는 ‘백범당(白凡堂)’이 자리하고 있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던 백범 김구 선생을 기리기 위해 마곡사에서 복원한 건물이다. 백범당 옆으로는 해방 이후 1946년 선생이 동지들과 함께 마곡사를 찾아 기념식수한 향나무가 자라고 있다.

백범 선생이 마곡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898년이다. 1896년 일본군 중좌를 살해 혐의로 인천교도소에 투옥된 선생은 교도소를 탈옥해 사찰에 은신했다. 여주 신륵사와 하동 쌍계사 칠불암 등을 전전하다가 공주 갑사와 동학사를 거쳐 마곡사에 도착했다.

마곡사에서 선생은 하은스님을 은사로 출가해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았다. 선생의 저서 <백범일지>에는 출가 당시 착잡했던 심경이 잘 나타나 있다. “사제 호덕삼이 머리털을 깎는 칼을 가지고 왔다. 냇가로 나가 삭발진언을 쏭알쏭알 하더니 내 상투가 모래 위로 뚝 떨어졌다. 이미 결심을 하였지만 머리털과 같이 눈물이 뚝 떨어졌다.”

마곡사에는 김구 선생의 독립정신과 불교와의 인연을 기리기 위해 백범 명상길이 조성돼 있다. 선생이 삭발했던 바위와 마곡천을 잇는 다리를 놓아 백범교라 부르고 있다. 백범 명상길은 백범 선생 기념관과 삭발터 등 선생을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코스로 구성됐다. 이와 함께 마곡사는 매년 6월 백범 기일에 맞춰 추모 다례를 봉행하고 있다.

마곡사 주지 원경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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