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사, 한국의 산지승원 ⓶보은 법주사

 

속리산 법주사 전경으로 국보 3점과 보물 13점 등 40여 점의 문화재가 산재해 있다.

‘세속을 떠난 산’에 자리한
충북지역 최고의 대찰

충청북도 보은군 속리산면 법주사로 405에 위치한 속리산 법주사(法住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5교구 본사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따르면 법주사는 신라 진흥왕 재위 14년(553년) 의신조사(義信祖師)에 의해 창건되었다. 법주사라는 절 이름은 의신조사가 천축으로 구법여행을 떠났다가 흰 나귀에 불경을 싣고 돌아와서 머물렀기 때문에 ‘부처님의 법(法)이 머무는(住) 절’이라는 뜻으로 법주사라 이름 지었다. 

다른 기록에 의하면 길상사(吉祥寺), 속리사(俗離寺) 등으로도 불렸다. 사찰이 위치한 속리산(俗離山)은 예로부터 조선8경으로 꼽히던 산인데, 산세의 아름다움도 있었지만 법주사가 자리한 산이었기 때문에 명산대찰의 명성을 얻은게 아닌가 싶다. 산내암자로는 복천암, 동암, 중사자암, 상고암, 탈골암, 수정암, 여적암, 관음암, 상환암, 봉곡암, 법기암, 보은포교원 등 12개 암자가 있다.

법주사 초입의 정이품 소나무.
법주사에 조성된 천년숲길인 '세조길'

속리산은 원래 구봉산이라 불리어 왔었다고 하는데, 속리산이라는 산 이름 또한 법주사와 연관이 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4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 따르면 766년 진표율사(眞表律師)가 미륵보살의 계시로 금산사에서 속리산으로 가던 중 소달구지를 탄 사람을 만났는데, 진표율사 앞에서 우는 소들을 보고 달구지를 탄 사람이 신심을 얻어 입산한 곳이라 하여 세속(俗)을 떠난(離) 산이라는 뜻에서 ‘속리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기록에 의하면 그 후 진표율사는 속리산에 들러 길상초가 난 곳을 표해 두고 바로 금강산에 가서 발연수사(鉢淵藪寺)를 창건하고 7년 동안 머물다가 다시 부안 부사의방(不思議方)에 가서 머물 때 속리산에 살던 영심(永深) 융종(融宗) 불타(佛陀) 등의 스님이 와서 진표율사에게서 법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그 때 진표율사가 그들에게 “속리산에 가면 내가 길상초가 난 곳에 표시해 둔 곳이 있으니 그 곳에 절을 세우고 이 교법(敎法)에 따라 인간 세상을 구제하고 후세에 유포하여라.”하자 영심스님 일행은 속리산으로 가서 길상초가 난 곳을 찾아 절을 짓고 길상사라고 칭하고 처음으로 점찰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이 길상사가 법주사의 전신이라 생각되며 이후 고려 인종(仁宗) 때의 기록이나 조선 전기 1478년에 지어진 <동문선(東文選)>등의 기록에는 절 이름을 속리사라고 불렀다는 점으로 미루어 아마도 절 이름이 길상사에서 속리사로, 그리고 다시 법주사로 바뀐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태백산서 뻗은 소백산줄기
국립공원과 명승지로 보존

법주사를 품은 속리산은 태백산맥에서 남서방향으로 뻗어 나오는 소백산맥 줄기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남북으로 백두대간이 지나고 천왕봉에서 한남 금북정맥이 나누어지는 곳이다. 행정구역상으로는 충청북도 보은군, 괴산군과 경상북도 상주시의 경계에 있다.

속리산은 빼어난 자연환경으로 한국 8경중 한곳으로 명성이 높다. 1970년 3월 국립공원으로 지정돼 보존되고 있다. 1964년 6월에는 사적 및 명승지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12월 법주사와 분리돼 명승 제61호로 지정됐다. 역사적으로는 조선의 23대 왕인 순조의 태실을 봉안한 후, 태봉산(胎封山)이라 부르기도 했으며, 세심정으로 가는 길에는 조선시대 왕실에서 산림의 벌목을 금하는 금표(禁標)도 남아 있어 사찰 및 왕실의 보호 아래 한국 고유의 산림이 보전되어 오고 있다.

속리산의 주요 봉우리로는 법주사를 중심으로 해발 1,057m인 최고봉 천왕봉이 우뚝 솟아 있다. 그 옆으로 비로봉, 길상봉, 문수봉, 보현봉, 관음봉, 묘봉, 수정봉 등과 문장대, 입석대, 경업대, 배석대, 학소대, 신선대, 봉황대, 산호대 등이 줄을 잇고 있다. 이 중 수정봉과 관음봉은 각각 용화보전(미륵신앙)과 대웅보전(화엄신앙)의 배경이 되는 법주사 특유의 가람배치를 형성하고 있다.

이밖에도 은폭동 계곡, 만수 계곡, 화양동 계곡, 선유동 계곡, 쌍곡 계곡, 장각 폭포, 오송 폭포 등의 명소가 있으며, 사계절 특색이 뚜렷하여 계절마다 장관을 이룬다. 주요 동식물로는 정이품송(正二品松, 천연기념물 제103호), 망개나무(천연기념물 제207호) 등 1,055종의 식물과 까막딱다구리(천연기념물 제242호), 하늘다람쥐(천연기념물 제328호) 등 희귀동물을 포함하여 1,831종의 동물이 서식하고 있는 자연자원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속리산은 법주사를 중심으로 주변 해발 300~800m에 이르는 광범위한 범위에 소나무림이 분포하고 있으며, 계곡부의 졸참나무림, 해발 800m 이상에 분포한 신갈나무림이 주된 산림을 이루고 있다. 또한 사내리 마을에서 법주사까지 이르는 길은 그 길이가 5리(약 2㎞)라서 ‘오리숲’이라 불리는데, 오래된 전통 숲으로서 계절에 따라 변하는 경치가 일품이다. 오리숲길은 오래된 소나무와 느티나무, 참나무를 중심으로 고로쇠나무, 물푸레나무, 단풍나무, 돌배나무, 조릿대 등 다양한 수종이 터널을 이루고 있다. 

특히 일주문에서 금강문에 이르는 구간은 사찰의 보호 아래 나이가 100년도 훌쩍 넘는 소나무와 전나무가 이루는 직선과 곡선의 숲길이 조화를 이루며 어우러져 있다. 법주사에서 복천암에 이르는 구간에는 숲길을 만들어 조선시대 세조와 인연이 깊은 이름을 따서 ‘세조 숲’으로 이름 지어 걷기 좋은 사찰숲길로 각광받고 있다.

주요 수목으로는 대웅보전 앞 쌍사자석등을 중심으로 좌우대칭을 이루는 찰피나무가 있다. 찰피 나무는 통일신라 때 스님들이 열매로 염주를 만들기 위해 처음 들여온 나무로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은 인도보리수와 닮아 사찰에서는 아직도 ‘보리수(菩提樹)’라고 부른다. 천왕문 앞에는 높이가 27m, 둘레가 2.5m에 달하는 전나무 두 그루가 대웅보전에서 금강문에 이르는 사찰의 중심축과 어우러져 웅장함을 더하고 있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팔상전.
보물로 지정돼 있는 법주사 마애불.

숲 체험과 '참 나' 찾는 템플스테이 인기

국보 3점, 보물 13점 보유
문화유산 숨 쉬는 노천박물관

신라 553년 의신조사에 의해 세워진 법주사는 성덕왕 19년(720)에 중건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760년경 진표율사(眞表律師)와 그의 제자인 영심스님에 의해 다시 한 번 중창 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길상사(吉祥寺)로 불린 것으로 추측된다. 이 시기에는 진표율사의 가르침에 따라 미륵신앙을 예배의 대상으로 삼았다고 짐작된다. 

또한 9세기 무렵에 와서는 경내에 여러 전각들이 들어서고 많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속리산의 대표적인 사찰로 자리 잡았다. 이를 뒷받침하는 자료로는 현재 법주사 경내에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쌍사자석등(국보 제5호)이나, 석련지(국보 제64호)와 같은 석물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 법주사는 왕실의 후원을 받아 더욱 발전해 나갔는데 <법주사사적기>에는 1006년(고려 목종 9)에 철당간이 생겼고 지금 있는 당간은 조선 말 흥선대원군의 명으로 철거되었다가 후에 다시 세워진 것이라고 전한다. 고려시대 법주사는 특히 문종의 5째 아들이자 대각국사 의천스님의 동생이기도 한 도생승통(導生僧統) 스님이 법주사에 머물던 시기에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성장하였던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후기에는 충렬왕, 충숙왕, 공민왕 등 여러 왕들이 절에 행차하기도 했고, 특히 공민왕 때는 왕이 절에 들렀다가 통도사에 사신을 보내 불사리 1과를 법주사에 봉안하도록 하였는데 이 사리탑이 현재 능인전 뒤쪽에 남아 있는 세존사리탑이라 전해진다.

조선시대 들어서도 법주사는 세조(世祖)의 후원을 받는 등 왕실과 관계를 맺으며 명맥을 유지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며 대부분 전각이 불에 타버리는 화를 입기도 하였다. 그래서 인조 4년(1626) 사명대사에 의해 주요 전각이 재건됐다고 전한다. 

영조(英祖) 때도 왕실과의 관계를 보이며, 철종 때는 영의정 권돈인(權敦仁)이 힘을 기울여 국가적 규모의 중수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고종 때는 지금의 청동대불 자리에 있었던 2층의 용화보전이 헐리고, 1939년 미륵불상 조성이 시작되었으나 중단됐으며 후에 재착수하여 1964년에 완공하였고, 2002년 개금불사를 함으로써 지금과 같은 가람 모습을 갖췄다

보물로 지정돼 있는 대웅보전과 석등.

천년 역사를 고이 간직한 법주사는 문화재가 즐비하다. 법주사는 사적 제503호, 속리산 법주사 일원은 명승 제61호로 지정되어 있다. 법주사의 문화재로는 쌍사자 석등(국보 제5호), 팔상전(국보 제55호), 석련지(국보 제64호)가 국보로 지정돼 있다. 

또 보물로는 사천왕 석등(보물 제15호), 마애여래의좌상(보물 제216호), 신법 천문도 병풍(보물 제848호), 대웅보전(보물 제915호), 원통보전(보물 제916호), 괘불탱(보물 제1259호), 소조비로자나삼불좌상(보물 제1360호), 목조관음보살좌상(보물 제1361호), 철솥(보물 제1413호), 복천암 수암화상탑(보물 제1416호), 석조희견보살입상(보물 제1417호), 복천암 학조화상탑(보물 제1418호), 동종(보물 제1858호)을 합해 13점이다. 

이와 함께 시도유형문화재 20건, 문화재자료 2건이 전해지고 있다. 현재 법주사는 여행지로 각광받고 있으며 전국에서 이름난 템플스테이 도량으로 매주 산사에서 참나를 찾는 수행, 어린이 여름 캠프, 영어 캠프, 휴식형 템플스테이 프로그램이 활기차게 가동되고 있다.

국보로 지정돼 있는 석련지.
국보로 지정돼 있는 쌍사자 석등.

세계문화유산 등재와 관련해 법주사주지 정도스님은 “지금까지 가람수호를 위해 노력해 온 선대 대덕조사의 음덕에 감사의 예를 올린다”며 “앞으로 후세들이 잘 계승할 수 있도록 보존하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사진 및 자료협조 : 조계종 불교문화사업단, 산사세계유산등재추진위원회, 법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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