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도 아니고 그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닌데,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간다 지나간다. 환한 햇빛 속을 손을 흔들며……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라는데, 

왼통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복사꽃을 울려만 놓고, 

환한 햇빛 속을 꽃인 듯 눈물인 듯 

어쩌면 이야기인 듯 누가 그런 얼굴을 하고…….

-김춘수 시 ‘서풍부(西風賦)’에서

아무 것도 아닌 어떤 것이 지나간다. 이름을 붙일 수 없는 어떤 것이 움직여간다. 아마도 바람으로 보이는 이 흘러가는 움직임은, 환희의 꽃과 슬픔의 눈물과 곡절 많은 이야기의 표정을 모두 갖고 있다. 그러나 이 지나감의 속성은 비단 바람에게만 속하는 것이 아니라 내게도, 당신에게도 빠짐없이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도 시간이라는 환한 햇빛 속을 손을 들어 흔들며 바람처럼 지나간다. 풀냄새를 널어놓고 복사꽃을 울려놓고 가는 봄날의 바람처럼 우리는 매일 매일 어딘가로 가며 살아가고 있다. 때로는 짐짓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기고 행세를 하면서. 때로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정말 받아들여야 할 적에 적잖이 울먹이고 섭섭해 하면서.

[불교신문3408호/2018년7월14일자] 

문태준 시인·불교방송 P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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