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 구법순례 공덕…고국 중생교화로 회향

 

성주산문 ‘무염의 제자’ 대통 
唐유학 앙산혜적 심인 받아
“인욕ㆍ정진 우선으로 삼고
보시와 공경을 실천하다”

조동종 석두계禪 전한 행적
석상경저 문하에서 법 받고 
사굴산문 범일국사 심인 받아
“일심(一心) 잘 지켜라” 당부

봉림산문 3조 홍법사 충담
“설산성도, 연동서 마음증득
3천년 禪敎통괄 말세 교화”
태조왕건이 비문…탑호 진공 

성주산문 대통의 월광사 원랑선사탑비(국립중앙박물관).

신라 말기부터 시작된 구산선문은 고려 초기에까지 걸쳐 형성된다. 한국 선사상사에서 구산선문에 대한 연구는 전반적으로 산문의 개산조만을 강조한다. 필자 입장에서 볼 때, 고대 산문은 개산조만이 아닌 산문의 2세나 3세에 의해 선풍이 드날린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엄·여엄·형미·경유 ‘사무외대사’는 물론이고, 대통·행적·충담선사도 마찬가지다.

대통(大通, 816˜883년)은 성주산문 무염의 제자이다. 자는 태융(太融)이며, 속성은 박(朴) 씨이다. 모친이 선사를 잉태한 이후 경전 독송으로 태교를 하였다고 한다. 선사는 어려서부터 유학을 통달할 만큼 매우 총명했다. 20대에 경전을 읽고 무상함을 느껴 출가해 845년 성린(聖鱗)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단엄사(丹嚴寺)에서 정진할 때, ‘마음으로는 계율을 닦으며, 뜻으로는 보리를 연마하고, 인욕과 정진을 우선으로 삼고, 다음으로 보시와 공경을 실천했다’는 기록이 전하는데, 젊은 시절부터 대통의 수행자로서의 단아함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무렵 당나라에서 돌아온 사형 자인(慈忍)을 찾아가 법을 물었다. 사형은 대통에게 자극을 받고(한편 당나라 유학을 권유받음), 더욱 분발해 선정 삼매를 닦았다. 

사굴산문 낭공행적의 봉화태자사 낭공대사탑비(국립중앙박물관).

스승 무염선사는 대통에게 사찰을 총괄하는 임무를 맡겼다. 대통은 잠시 그 일을 맡은 뒤 “나는 마땅히 이 자리를 버리고 가겠다”는 말을 남기고, 문성왕 18년(856년) 사신을 따라 당나라에 들어갔다. 선사는 위앙종의 앙산 혜적(仰山 慧寂, 807˜883년)을 스승으로 섬겨, 그의 심인(心印)을 받았다. 비문에 의하면, “대통이 앙산 문하에 있을 때, 앙산이 선사의 근기를 알고, 마음 닦도록 성의껏 가르쳤다. 선사는 근기가 매우 뛰어났다. 지혜는 이왈(離曰)보다 뛰어났고, 지식은 미천(彌天)보다 수승했다. 선사는 황매의 심인을 받았고, 이후 여러 지역을 두루 행각했다.” 대통은 오관산문의 순지보다 2년 앞서 앙산의 법을 받아 왔으나 신라에서 위앙종의 선풍을 펼치지 않은 것으로 사료된다. 

선사는 고국을 떠난 지 10년만인 866년 귀국해 성주산문 무염을 다시 만났다. 성주사에 머물던 대통은 제천 월악산 월광사(月光寺)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선풍을 펼치며 대중교화를 하자, 선사의 이름이 궁중에까지 알려졌다. 비문에 의하면, “선사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니, 그 명성이 천지사방에 드높아 칭찬하는 소리가 궁중에까지 미쳤다”고 전한다. 이때 경문왕(861˜874년 재위)이 선사에게 귀의했다. 대통은 883년 제자들에게 ‘게으르지 말고, 열심히 수행하라’고 당부하며, 68세로 입적했다. 선사의 탑비는 7년 후인 890년에 세워졌다. 헌강왕(875˜885년 재위)이 ‘원랑선사(圓郞禪師)’라는 시호와 ‘대보선광(大寶禪光)’이라는 탑명을 내렸다(제천 월광사지 원랑선사탑비). 탑비는 현재 용산 국립중앙박물관에 모셔져 있다. 

낭공 행적(朗空 行寂, 832〜916년)은 사굴산문 승려로서 조동종 석두계 선사상을 처음으로 전한 인물이다. 물론 행적보다 앞서서 동산양개(807˜869)에게 수학한 승려 금장(金藏)이 있었으나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행적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화엄을 배우고, 문성왕 17년(855년) 복천사(福泉寺) 관단(官壇)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사굴산문 범일선사를 찾아가 입실을 허락받고, 수년 간 공부했다. 이후 행적은 경문왕 10년(870년)에 당나라로 건너간 지 얼마 안 되어 황제의 칙명을 받고 입내설법했다. 의종(859〜873년 재위)이 선사에게 물었다. “멀리서 바다 건너 여기까지 무엇을 하러 왔습니까?” “소승은 다행히도 상국의 불교에 대해 조금이나마 들었습니다. 이에 도를 찾고자 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렇게 폐하의 은혜를 받고 불교의 풍속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어 다행입니다. 그러니 여기서 널리 불적을 돌아보고, 마음 깨치는 구슬을 찾아서 고국으로 돌아가 법을 전하려고 합니다.”

황제가 행적에게 감화를 받아 선사에게 많은 공양물을 올렸다. 이후 행적은 오대산 화엄사에 이르러 문수보살을 예참하고, 874년(희종 2년) 사천성 성도에 이르러 정중사의 무상(無相) 대사 영당에 예를 올렸다. 이후 석두계인 석상경저(石霜慶諸, 807〜888년)의 문하로 들어갔다. 신라 승려로서 석상을 참례한 경우는 행적이 처음이다. 행적은 석상에게서 법을 얻었다. 이후 행적은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녔다. 

행적은 고국을 떠난 지 15년만인 885년(헌강왕 11년) 귀국해 범일을 뵙고 다시 운수행각을 떠났다. 889년, 범일의 입적에 즈음하여 심인을 전해 받았다. 행적이 삭주(朔州, 강원도 춘천) 건자난야(建子蘭若)에서 산문을 개산하니,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효공왕이 즉위하여 사신을 보내어 행적을 궁궐로 초청했다. 왕이 선사에게 예를 다하며 귀의하자, 왕에게 나라 다스리는 법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봉림산문의 3조 충담 진공대사 탑비의 귀부 및 이수(원주 흥법사지. 보물 제463호).

915년 고려 태조가 그를 국사로 임명하고, 실제사(實際寺)를 선찰(禪刹)로 하여 이곳에 머물도록 했다. 이후 행적의 여제자 명요(明瑤) 부인이 석남산사(石南山寺)를 선사에게 보시해 머물도록 했다. 이듬해 917년 병이 들어 85세로 석남산사에서 좌탈했다. 시호는 낭공(朗空), 탑호는 백월서운(白月棲雲)이다. 이후 경북 봉화 태자사에 탑비를 세웠다(봉화 태자사 낭공대사백월서운 탑비). 제자가 500여 명이 있을 정도로 행적의 선풍이 당시 크게 드날렸다. 선사는 제자들에게 “일심(一心)을 잘 지켜라” 혹은 “한 번 지켜서 잃지 말라”며 일심을 강조했다. 

이렇게 행적처럼 신라사문으로서 석상경저에게 법을 얻은 승려는 흠종(欽宗)·법허(法虛)·랑(朗)이 있다. 석상의 제자에게 법을 받은 신라 승려도 여럿 있다. 곡산도연(谷山道緣)에게서 법을 얻은 희양산문의 긍양(兢讓, 878˜956년)이 대표적이다. 구봉도건(九峰道虔) 문하의 국청(國淸)과 정원지원(淨圓志元) 문하의 와룡(臥龍)과 충담 등이다. 

충담(忠湛, 869〜940년)은 봉림산문 3조로, 신라 말기 신덕왕과 고려 태조의 왕사를 지냈다. 어려서 고아가 되어 부친의 친구인 장순(長純) 선사에게 출가해 진성왕 3년(889년) 무주(武州) 영신사(靈神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유식과 율장을 연구했다. 이후 충담은 교(敎)보다 선(禪)의 수승함을 인식하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석상경저의 제자인 호남성(湖南省) 담주(潭州) 운개사(雲蓋寺) 정원지원(淨圓志元) 문하에 입실한 충담은 정원의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법을 받았다. 충담은 918년 귀국해 경남 김해에 머물다가 이후 강원도 원주 흥법사(興法寺)에 머물렀다. 

그의 비문에 “설산에서 성도하고, 연동에서 마음을 증득하여 18대의 조종(祖宗)을 전하고, 3000년의 선교를 통괄하여 말세의 중생을 크게 교화했다”는 내용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당시 선사의 선풍이 크게 번창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의 문하에 500여 인의 제자가 있었으나 충담 이후로 봉림산문은 서서히 쇠퇴한 것으로 사료된다. 

봉림산문 3조 충담 진공대사의 비의 일부분. 파손되어 일부만이 전한다(국립중앙박물관).

선사는 원주 흥법사에서 입적했다. 태조 왕건이 직접 비문을 지었으며, 탑호가 진공(眞空)이다(원주 흥법사 진공대사탑비문). 필자가 흥법사지를 방문해보니, 주변은 논밭으로 둘러싸여 있고 선사의 귀부와 이수, 삼층석탑만 덩그러니 서 있었다. 그 옛날 수백 수행자가 모여 수행했을 도량이 이제는 논밭 가운데 폐사지로 남아 있는 것이다. 역사든 인생이든 삶과 역사는 배반과 흥성, 두 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그런데 충담은 여타 선사와는 다르게 묘탑과 석관(보물 365호ㆍ본지 3392호 12면)이 있다. 탑과 함께 발견된 석관을 통해 승려도 매장했음을 알 수 있는 사례이다. 이 탑은 강원도 원주 흥법사지에서 출토되어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있다.

[불교신문3408호/2018년7월14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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