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간 지배로 중국 종교특성 지녀

10세기 베트남 최초로 ‘승관제’ 통해
선진 지식 갖춘 스님이 정치도 참여

기원전 3세기부터 시작해 20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는 베트남 불교는 국토 북쪽부터 남쪽까지 수 만여 개의 사찰이 있고 각 종파마다 다양한 특징을 보인다. 이에 전체적인 베트남 불교 전개 역사부터 시작해 총괄적인 특징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아쇼카 황제는 부처님 가르침을 널리 전하기 위해 인도의 국경을 넘어 아프리카 서쪽과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동남아시아 지역에 불교 전법사를 보냈다. 말레이시아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등에 불교를 전파했는데 그 중 북베트남에도 영향을 줬다. 베트남 불교는 다른 나라의 불교와 비교해 유사점과 차이점을 동시에 보유하는 특색이 있다. 특히 중국이 베트남을 1000년 동안 지배했기 때문에 중국 문화와 종교적 특성을 지니고 있다. 

고대 중국의 3개 불교센터 중 베트남 교주(Giao Chau, 交州)지역에 있는 루이 라우(Luy Lau)센터가 1세기 초 한 왕조 시절 가장 먼저 지어졌다. 루이 라우(Luy Lau)는 인도와 중국 간의 주요 무역 경로에 위치해있다. 즉 인도의 선구자적인 전법사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보 설하기 위해 북쪽으로 오기 전 먼저 들리는 중요한 장소가 됐다.

중국 삼국시대의 역경승으로 오나라에 불교를 전파한 강승회(康僧會)는 건초사(建初寺)에서 <아난염미경>, <경면왕경>, <찰미왕경>, <범황왕경>, <소품반야경>, <육도집경> <잡비유경> 등을 번역하고 <안반수의경>의 주석을 다는 등 여러 작업을 진행했다. 이 가운데 <아난염미경>, <경면왕경>, <찰미왕경>, <범황왕경>은 <육도집경>의 일부라고 볼 수 있다. 

강승회 이외에도 <십이유경>과 <법화삼매경>을 번역한 지강양접(支疆梁接)이나 교주 지역에 온 뒤 인도 스님들 밑에서 불교 공부를 한 중국학자 마오 포(Mao Po)와 같은 많은 유명한 학자들이 있다. 그 당시 루이 라우센터에는 이미 200여 개에 달하는 부처님 도량과 500명 이상의 스님이 있었다고 한다. 15종 이상의 경전이 독송됐으며 본래 강동 지역보다 불교의 보급이 빨랐다고 전해진다. 2세기 경 교주 지역에 나타난 <42장경>은 루이 라우에서 중국어로 번역 된 첫 번째 불전으로 여겨졌다.

중국의 지배는 10세기까지 계속됐으나 당나라의 멸망과 함께 베트남은 독립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938년 베트남의 오권(吳權)은 박당(Bach Dang)강 싸움에서 당시 남중국의 지배자였던 서한군(西漢軍)을 쳐부수고 오조(吳朝)를 열었다. 그러나 오조는 단명으로 끝나고, 그 뒤를 이은 정조(丁朝)나 여조(黎朝)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공온(李公蘊)이 이조(李朝, 1009~1225년)를 열어 비로소 안정된 체제를 갖췄다. 정세의 어지러움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계속 발전했다. 특히 이 무렵에는 베트남 최초로 승관제(僧官制)가 확립돼 스님이 정치에도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됐다. 

스님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당시 베트남에서 가장 선진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이 곧 스님이었기 때문이었다. 베트남이 북속(北屬)돼 있던 말기에 스님들은 선진 문물이 있는 중국으로 유학했고 또 중국 스님들이 베트남으로 오는 등 교류가 빈번했었다. 학문이나 사상에서 스님들은 지도자급 위치에 있었다. 오(吳)·정(丁, 968~980년)·여조(黎朝, 980~1009년)의 정치인들은 이같이 스님들의 견문과 학식, 경륜을 필요했고 스님들도 기꺼이 정치인들을 보필했다.

[불교신문3408호/2018년7월14일자] 

각려호스님 동국대 불교학 박사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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