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장발원문 속 실마리 풀어야

개운사 목조아미타불좌상

서울 개운사 미타전에 봉안돼 있는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복장에서 나온 발원문 및 ‘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 등 전적이 각각 보물 1649호, 1650호로 지정돼 있다. 복장에서는 1274년 중간대사가 쓴 발원문과 <화엄경> 사경, ‘보살본행품’ 사경 및 <화엄경>과 <영보경> 인쇄본 등 고려시대 전적과 조선시대 <화엄경> <아미타경> 인쇄본과 다라니 등 41건 58점이 수습됐다.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높이 115.8cm이며 무릎 폭이 92cm 크기다. 고개를 약간 숙인 자세를 하고 있으며 오른손은 손바닥을 바깥으로 향해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으며, 왼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댄 하품중생인을 하고 있다. 불두는 나발에 육계가 넓게 표현돼 있으며, 중계주가 있다. 눈썹 사이에는 백호가 비교적 크게 있으며, 눈은 가늘고 길게 뜬 상태로 눈동자는 아래를 향하고 있다. 볼살이 많아 얼굴이 전체적으로 동그랗다.

목에는 삼도가 뚜렷하며 양쪽 어깨를 덮은 대의를 입고 있다. 왼쪽 어깨는 대의자락을 겹쳐 주름지게 표현했고 오른쪽 어깨는 뒤러 넘어간 옷자락을 앞으로 끌어와 덮은 형상이다. 가슴 아래로는 내의자락이 곡선을 이루고 있다. 다리는 결가부좌를 하고 있는데 왼쪽 무릎에 얹은 오른쪽 발가락은 왼손에서 흘러내린 옷주름으로 덮여 보이지 않는다. 발목부문에는 5개 주름이 잡혀 있으며 무릎과 무릎 사이 대의자락이 부채꼴로 주름을 잡아 펼쳐놓았다.

개운사 목조아미타여래좌상은 조성시기가 명확치 않고 어느 사찰에서 조성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다. 복장에서 발견된 중간대사 발원문과 1322년 작성된 최춘의 복장조성문, 같은 해 쓴 천정혜홍스님 발원문을 토대로 중수역사를 짐작할 다름이다. 중간대사 발원문이 1274년 작성된 것으로 미뤄보아 이 불상은 1274년 이전에 조성돼 1274년, 1322년에 각각 중수됐다.

중간대사 발원문에는 ‘고려국 동심접(東深接) 대사(大師) 중간원(中幹願)’이란 문장이 나온다. 이에 대해 최성은 덕성여대 교수는 <고려시대 불교조각 연구>에서 “동심접의 위치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이 없는데 아산 동심산 일대로 추정할 수 있다”며 “동심접은 동심산 혹은 그 산에 있는 동심사를 중심으로 조직된 신앙조직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자신의 말을 팔아서 아미타불상을 개금한 중간대사는 이 조직을 이끄는 중심인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했다. 또 천정혜홍스님 발원문에는 ‘취봉사 의지도인(鷲峰寺 依止道人) 천정혜홍’이란 구절을 확인할 수 있어 취봉사 스님들이 중수에 동참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반면 정은우 동아대 교수는 <고려의 성물, 불복장>에서 “동심사에 있어서 단언하기 어렵다”는 주장을 폈다. 중간대사가 ‘고사(古寺)의 훼손된 무량수불’을 중수했다는 기록을 토대로 고사에 주목한 것이다. 정 교수는 “중수처로 아산 취봉사와 동심사가 지목되기도 했지만 훼손된 ‘고사’의 아미타불을 중수했다는 표현, 동림사가 인근에 위치하면서 신라시대부터 이름난 고찰이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중수처는 동림사일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문명대 동국대 명예교수는 일찌감치 이 불상과 봉림사상의 연관성을 지적한 바 있다. ‘고려 13세기 조각양식과 개운사장 취봉사목아미타불상의 연구’에서 “이 손의 수인은 봉림사상, 문수사상, 부여박물관상 등 고려 후기 아미타불상 수인과 유사하지만 특히 봉림사불상 수인과 거의 흡사하다”며 “왼 무릎에 옷자락이 구불구불 삼각형을 이루면서 내려오고 가슴아래 승각기는 곡선을 이루는 데 띠매듭이 없는 등 전체적인 형태는 봉림사상과 거의 동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어 주목된다.

[불교신문3409호/2018년7월18일자]

어현경 기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