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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기 2562 (2018).12.10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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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화실에서 법을 청하다> 조계종 원로의원 철웅스님“지금 있는 자리에서 열심히 사는 게 부처님 법이야”
조계종 원로의원 철웅스님은 언제 어디든지 간에 지금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했다.

“허허 서울에서 아침 일찍 내려오느라 고생했어. 안으로 들어와 차 한 잔 해.” 넉넉한 웃음을 보이며 건넨 조계종 원로의원 철웅스님의 첫 인사에 긴장됐던 마음이 편안히 풀렸다.

스님은 “할 얘기도 많이 없을 텐데”라며 걱정했지만, 미리 보낸 질문지는 이미 글자로 가득 채워있었다. 꼼꼼하지만 친근한 스님의 매력은 대화 내내 이어졌다.

폐사지나 다름없던 광덕사
원력세우고 사격일신 이뤄
어려움 닥칠때마다 간절한
‘기도 정진’ 힘으로 이겨내

마곡사 주지·중앙종회의원
소임 맡으며 종단발전 이바지
“언제 어디서든 최선 다하라”
‘정진하는 삶’ 종도들에 전해

지난 6월15일, 철웅스님에게 법을 청하러 천안 광덕사를 찾았다. 절 입구에 들어서자 엄청난 둘레를 자랑하는 천연기념물 제398호 광덕사 호두나무가 가장 먼저 반겼다. 천안이 호두의 고장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던 시발점이 바로 이 곳이다.

고려 1290년 호두나무 묘목을 처음 심은 곳이 광덕사 경내라고 한다. 그렇게 호두나무에 눈길을 빼앗겨 있을 때쯤 멀리서 반갑게 맞이하는 철웅스님이 서 있었다. 그렇게 스님은 광덕사 호두나무와 빼닮았다.

천안 광덕사는 스님의 원력이 도량 곳곳에 스며든 곳이다. 652년(진덕여왕 6) 자장대사가 당나라에서 가져온 불치 1과와 사리 10과, 금은자 화엄경 법화경 은중경 각 2부 등을 진산스님에게 줘 도량을 만든 것이 광덕사의 유래다. 이런 유구한 역사적 가진 천년고찰인데도 불구하고 광덕사는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기 전인 1970년 초반까지 폐사지나 다름없었다고 한다.

“그 때가 아마 마곡사 재무소임을 보고 있었을 때였을 거야. 광덕사에 출장으로 처음 왔는데 딱 느꼈지. 내가 불사를 해야겠구나. 전생에 내가 광덕사에 진 빚이 많았던 것 같어. 부처님 말씀대로 그게 인연이었나 봐.”

그렇게 큰 원력을 낸 뒤 광덕사 주지로 부임했지만 스님은 막막했다. 불사다운 불사를 시작하기 위해서는 재정적인 부분 등 많은 지원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광덕사 불사를 시작한 1970년대 그 당시는 배고프고 힘든 시절이야. 꼬박 산에서 하루 종일 도토리를 주워 공양하기도 했어. 그래도 내가 세운 원을 이루게 해달라고 부처님께 간절하게 기도했지. 1000일 기도도 그 때 시작했어.”

불사가 난관에 봉착할 때마다 스님은 기도의 힘으로 이겨냈다. 신기하게도 기도를 하고 나면 귀인을 만나 일이 잘 풀렸다. “정말 신기하게 부처님이 진짜 내 원을 들어주시는지 귀인을 만나 불사가 진행됐지. 뜻을 함께하는 시주자와 화주자를 만나 불사가 원만히 회향됐지.”

1986년까지 스님은 광덕사에 머물며 사격을 지금 모습으로 완벽하게 일신했다. 대웅전 중창 불사를 비롯해 천불전, 명부전 선방 요사채 3동 지었다. 천년고찰의 명성을 완전히 회복시켜준 셈이다. 이후 스님의 꼼꼼하게 부지런한 성격은 제6교구본사 마곡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또 중앙종회의원 법규위원회 위원 등 종단 주요소임을 맡으며 종단 발전에 일조했다.

“이게 다 부처님 공덕으로 한거지. 시주자나 화주자를 만나 불사한 것도 이런 저런 일을 한 것도 날마다 부처님께 드린 간절한 기도 ‘정진’ 덕분이야. 정진이 꼭 수행하고만 연결된 게 아니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언제 어디서든 자기가 서 있는 위치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게 다 정진이지. 그게 부처님 가르침인거야.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해야지 그래야 떠나지 전 조금은 내가 원하는바 성취하고 떠나지 않겠어?”

대중교화에도 큰 관심을 쏟았던 스님이다. 초대 대전지방경찰청 경승실장을 역임하며 남다르게 포교에도 앞장섰다. “그 때 대전 둔산동으로 대전지방청을 이전해서 지었는데 법사를 맡아달라는 부탁이 있었어. 처음 법회를 열었는데 1500여 명이 가득 차 강당에 앉을 자리가 없었다니깐. 이웃종교는 차마 종교행사를 열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열기가 높았지.”

스님은 광덕사 주지 시절 불사에 신경 쓰느라 폐결핵으로 병원에 입원했을 때도 병원 내 환자들에게 불법을 전한 일화는 유명하다. 모든 병의 근원은 마음이니 마음을 비우고 편안하게 생각하라는 따뜻한 위로의 말 한마디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와 매번 50여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법회를 열었다고 한다.

친근한 미소로 인터뷰를 하는 조계종 원로의원 철웅스님 모습.

“나도 그 때 몸이 안 좋아서 염주 하나만 돌리면서 버텨냈어. 어떤 의사는 나더러 6개월밖에 못산다고도 했었지. 그때 살고 죽는 것은 관세음보살 부처님이 정해 주실 테니 마음 편하게 먹으려고 했지. 그런데 부처님 덕분에 몸이 살아나대. 내가 직접 몸으로 이겨낸 걸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려준 것 뿐이여.”

스님은 출가자 감소와 불교인구 감소 등 최근 제기되고 있는 한국불교 위기와 관련 제언도 했다. “옛날에는 배고프고 살기 어려우니깐 출가도 많이 하고 종교에 의지도 많이 했지. 그런데 요새 사람들이 잘 먹고 잘 살게 되니깐 종교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일 뿐 불교 전체 위기라고 생각은 안 해. 단지 자연스러운 사회현상인 것뿐이지. 이런 시기에 중요한 것은 스님이나 불자들이 다 같이 합심해서 다시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 올수 있을까 고민하는 거야.”

스님은 특히 전체 종도들의 한 마음으로 화합된 모습을 보이며 단결하는 것이 불교 융성의 유일한 방법이라고 강조했다.

서울로 떠나기 전 스님은 기자에게 직접 적은 원효스님의 ‘발심수행장’의 내용에 “열심히 살 것”을 덧붙인 글귀를 선물로 줬다. 아마 40여 년 전 스님이 출가수행자로 발심했을 때 가슴 속 깊이 품었던 화두는 ‘열심히 살기’였을 것이다.

40여 전 그 때 마음과 종단 최고 어른이자 대종사 법계를 품수 받은 지금의 모습이 맞닿아 있었다. 푸르른 초심의 색깔이 바래지 않고 여전히 빛나 보였다.

 

                   94년 종단개혁 법규위원 맡아 종단안정 기여 
                 

'정진' 강조한 철웅스님은?

1943년 경북 영주에서 태어난 철웅스님은 현대 한국불교 최고의 어장(魚丈)으로 존경받는 일현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1968년 마곡사에서 일현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1969년 범어사에서 석암스님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했다. 천안 광덕사 주지 소임을 맡아 사격 일신에 젊음을 바쳐 매진해 지금의 도량의 모습으로 만들었다.

광덕사 뿐만 아니라 갑사 주지 소임을 보면서 대웅전 부처님 개금불사, 종각 요사채 신축을 비롯해 갑사 주변 골칫거리였던 주차장 문제까지 해결했다. 이런 노고를 인정받아 제9대 중앙종회의원 직을 맡아 종단 발전에도 이바지했다.

무엇보다 6교구본사 마곡사 주지 소임을 맡은 이후에는 적묵당 불사와 함께 종각 박물관 신축을 진행해 사격을 높이는데 노력했다. 1994년 종단개혁 시절 법규위원회 위원을 맡아 혼란했던 종단 안정화에도 기여했으며 대전지방경찰청 초대 경승실장을 하며 전법포교에도 앞장섰다.

지난 5월 종단 최고 법계인 대종사 법계를 품수했으며 지난해 11월부터는 다시 부처님 인연이 맞닿아 있는 광덕사로 다시 돌아와 주석하고 있다. 대통령 표창장을 비롯해 공보부 장관 표창장 등을 받은 바 있다.

천안=이성진 기자  sj0478@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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