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자유민족이며 자유국의 국민이다”

변상태 등 경남 애국지사 
옥천사서 만세운동 ‘논의’
신화수 한봉진 스님 투쟁
김상옥 의사 사건도 연루

조선 영조 21년(1745년) 건립된 옥천사 대웅전 내부. 신화수, 한봉진 등 옥천사 스님들이 조선독립을 발원했을 것이다.

경남 고성 자리한 옥천사(玉泉寺), ‘옥처럼 귀한 샘물이 솟는 절’이란 의미로 신라 문무왕 16년(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는 설화를 간직한 고찰이다. 구한말까지 100~200여 명이 스님이 주석했다고 전해지는 대찰(大刹)이다. 임진왜란 당시 의승병이 활동한 호국사찰로 임란 후에도 옥천사 스님들은 수행과 국방을 병행했다. 

대웅전 맞은편 자방루(滋芳樓)와 그 앞의 넓은 마당에선 고된 훈련을 감내한 승병들의 자취가 느껴진다. 호국의 전통은 일제강점기에도 변함없이 이어졌다. 99년 전 서울에서 촉발된 독립만세운동의 불길이 전국 각지로 거세게 번지는 가운데 옥천사가 있는 경남 고성도 예외는 아니었다. 

진흙에서도 꽃을 피워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에서 유래한 연화산(蓮花山) 자락에 옥천사는 자리하고 있다. 어림잡아 100년은 넘을 법한 노송(老松)과 대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나무와 이름 모를 풀로 한 여름 연화산은 밀림 같다. 옥천사는 지리적 환경과 사찰이라는 특수성 때문에 일본경찰의 눈을 피해 애국지사들이 모이기에 적합한 장소였다. 나라와 백성을 구하는 호국의 전통을 계승한 옥천사 스님들은 일제의 강탈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3·1운동의 기세가 경향 각지로 번지던 1919년 봄. 옥천사에 주석하고 있던 신화수(申華秀)·한봉진(韓奉眞)스님도 바람 앞에 촛불처럼 꺼져가는 조국을 살리는 데 신명을 바쳤다. 우선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애국지사 변상태(卞相泰)와 이주현(李周賢) 등에게 잠자리와 음식을 제공했다. 비밀리에 거사를 논의하도록 옥천사에서 편의를 제공한 것이다. 자칫 이같은 사실이 일본 경찰의 귀에 들어가 발각이라도 되면 고초를 겪을 것은 불을 보듯 뻔했다. 
 

일제강점기 경남지역 애국지사들이 비밀리에 모여 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한 경남 고성 옥천사. 사진은 ‘연화산 옥천사’라고 쓴 편액이 걸린 일주문.

하지만 신화수ㆍ 한봉진스님 등 옥천사 스님들은 망설이지 않고 애국지사들에게 편의를 제공했다. 나라 찾는 일에 힘을 보탠 것이다. 두 스님 외에도 당시 옥천사에 주석하고 있는 대중 스님들이 암암리에 독립만세운동에 동조하지 않았으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옥천사에서 거사를 논의한 변상태(1889~1963)는 1910년 나라를 강제로 빼앗기자 최기백, 성학년 등과 대붕회(大鵬會)를 조직해 항일투쟁에 나섰다. 1915년 국내외 독립운동세력이 연대한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결성한데 이어, 1917년 비밀결사조직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을 만들었다. 부산과 마산 등 경남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한 독립투사들이다. 

1919년 3월28일 고현 장(場), 4월2일 양촌리 토지 개간 장(場)에서의 만세운동에 이어 4월3일에는 삼진(진전면, 진북면, 진동면)의거를 주도했다. 당시 변상태는 주민들에게 “오늘부터 우리는 자유민족(自由民族)이며 자유국(自由國)의 국민(國民)이다. 일본의 간여는 추호라도 받아서는 안 된다”면서 “최후의 1인까지 최후의 1각까지 독립을 지키기 위해 우리는 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화수스님. 1923년 3월15일 동아일보가 종로경찰서에 폭탄 투척 후 순국한 김상옥 의사 사건을 보도한 기사에 실린 사진이다.

신화수스님은 3·1운동 이후 보다 조직적이고 전국적인 독립운동을 펼치기 위해 동지들과 뜻을 모았다. 1921년 제2차 독립만세운동을 일으켜 “우리 손으로 독립을 만들겠다”고 각오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사전에 발각돼 경상남도 경찰부와 진주경찰서 합동수사대에 체포됐다. 1921년 동아일보 보도에 따르면 신화수스님의 당시 나이는 25세였다. 

이때 사건에 함께 연루됐지만 소재 불명으로 나온 통도사의 박치오(朴致悟, 26세)스님은 한용운스님의 지시를 받아 독립선언문을 배포하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나선 박민오(朴玟悟)스님일 가능성이 있다. 박민오스님은 중국 상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또 다른 이름은 박노영(朴魯英)이다. 

신화수스님은 훗날 종로경찰서에 폭탄을 투척한 김상옥(金相玉) 의사를 비롯한 지사들과 혁신단(革新團)을 만들었다. <혁신공보(革新公報)>를 발행해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나갔다. 미국 국회의원들이 1920년 8월 조선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은 신화수스님은 김상옥, 김동순(金東淳), 윤익중(尹益重), 서대순(徐大淳) 등과 거사를 모의했다. 의원단이 서울에 도착하면 환영식장에서 사이토 조선총독을 비롯한 일본 고관을 한 번에 암살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해 5월부터 준비에 들어갔으나 사전에 들통 나고 말았다. 거사를 주도한 김상옥은 같은 해 10월 상해임시정부로 몸을 피했다 1923년 압록강 철교를 넘어 서울에 잠입했다. 일본 총독을 암살하기에 앞서, 독립지사들을 체포해 갖은 고문을 자행한 종로경찰서를 폭파했다. 이때 김상옥 의사에게 군자금 1000원을 제공한 혐의로 신화수스님은 또 다시 체포됐다. 

신화수스님은 일본 경찰에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1923년 10월10일 경성복심법원 판결문을 통해 신화수(申華秀)스님의 행적을 다소 나마 가늠할 수 있다. 당시 나이는 27세, 거주지는 ‘경성부 당주동 16번지’였다. 당주동 16번지는 서울시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뒤편으로,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 8번 출구 건너편에 해당한다. 

경성복심법원에서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강도’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강도’라는 죄목은 임시정부 군자금을 모아 김상옥 의사에게 전달했기 때문에 붙은 것이다. 일제는 나라를 되찾기 위해 자금을 모으는 조선인의 정당한 모금을 ‘강도’라고 폄훼했다. 당시 재판부는 “조선독립을 목적으로 조직된 의열단의 폭탄 은닉을 응하고 독립운동자금 제공, 독립선전문 배포 등 치안을 방해하는데 방조했다”는 혐의를 적용했다.

이에 앞서 신화수스님은 1921년 11월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 살인예비, 대정8년 제령 제7호 위반, 출판법위반, 총포화약류 취체령(取締令)위반, 사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았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판결문에는 신화수스님의 신분을 승려(僧侶), 불교학원(佛敎學院) 학생(學生), 무직(無職) 등으로 표기하고 있다. 

1921년 한봉진스님 판결문. 오른쪽에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북평리 옥천사 승려 한봉진 50세’라고 적혀 있다. 출처=국가기록원

한편 신화수스님과 함께 옥천사에 주석하고 있던 한봉진스님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군자금을 국내에서 모아 전달하는 책임을 맡아 활동했다. 1919년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입해 임시정부의 명에 따라 국내에 들어온 윤영백(尹永伯)과 함께 옥천사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1921년 5월12일 일본 육군성(陸軍省)이 내각 총리에게 보낸 ‘1919년~1921년 조선소요사건관계서류’을 통해 신화수ㆍ한봉진스님의 활약상을 가늠할 수 있다. 앞서 밝힌 대로 “변상태, 이주현, 곽인협, 이조협, 순우협 등 애국지사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소식을 전하는 밀사(密使)도 자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록 다른 지역처럼 군중이 참여한 만세운동을 전개하지는 못했지만 경남지역 항일운동의 후견인 역할에 이어 직접 투쟁의 전면에 나선 옥천사 신화수ㆍ한봉진스님의 애국혼은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진주 ‘이달의 현충시설’

진주보훈지청은 2015년 8월 고성 옥천사를 ‘이달의 현충시설’로 선정했다. 옥천사 스님들이 항일운동에 참여한 사실을 기록한 현충시설 안내판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20년대 경남지역 독립운동의 근거지 가운데 한 곳이다. 3·1운동 전후 경남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변상태와 이주현 등은 옥천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였다. 옥천사 승려 신화수와 한봉진도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신화수는 1919년 4월 독립사상을 고취하기 위한 비밀결사 혁신단을 조직하였고, 1920년 김상옥, 한훈 등과 의열투쟁을 전개하였다. 한봉진은 1920년 윤영백과 함께 옥천사를 거점으로 군자금 모집 활동을 벌였다.”

참고자료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 국사편찬위원회 ‘일제침략하 한국36년사’, <동아일보>, <고성독립운동사>, 국가기록원 ‘독립운동 관련 판결문’, <경남신문>, <일제하 불교계의 항일운동>. 

[불교신문3407호/2018년7월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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