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 아닌 사찰 중심으로 개인이 범종 조성 발원

    

임진왜란 직전 만든 16세기 종
전통 범종 전형 고수하고 있어

사회지식층 사대부 주축으로 
사장과 승장, 승장 집단 제작
당시 장인사회 파악 중요자료

안동 광흥사종 

안동 광흥사종은 1573년 제작됐다. 총고 60.5cm, 구경 45cm 크기다. 해학적으로 표현된 용두와 음통<아래 사진>을 휘감고 있는 몸체 등은 생동감을 보여준다.

이 가운데 광흥사종은 앞 시기 범종에서 거의 볼 수 없었던 전통형을 따른 작품이란 점에서 17세기 전형적인 전통형종으로 정착을 이루어 나가는 과도기적인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또한 16세기의 범종은 전대의 왕실 발원 범종과 달리 사찰을 중심으로 개인 구복적인 발원으로 바뀌어가는 것이 가장 두드러진 변화이다. 따라서 광흥사 범종은 이러한 시작을 알리는 첫 번째 범종이란 점에서 중요하게 평가된다. 

크기는 비록 60cm정도에 불과한 중형의 종이지만 안정감 있는 외형과 세부 문양은 단순한듯하면서 절제된 모습이다. 주조된 면도 매끄럽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우선 용뉴는 지금까지의 크고 역동감 넘친 용뉴와 달리 작으면서도 약간은 해학적으로 표현된 용두와 음통을 휘감고 있는 몸체의 세부 디테일이 살아있어 오히려 생동감이 돋보인다. 뒤에 붙은 음통은 가늘고 길며 중앙에 독특한 햇살문을 시문하였다. 음통 상단에는 고려후기에 자주 보였던 작은 보주를 첨가하여 전통형 범종을 따른 점이 뚜렷하다. 이러한 모습은 상대 위에 가지런히 둘러진 입상연판문대(立狀蓮瓣文帶) 장식에서도 느껴지며 그 아래로 뇌문 형태로 장식된 상대가 표현됐다. 

특히 범종 종신에는 크기가 축소됐지만 안정된 자세와 우아한 의습, 섬세한 보관과 얼굴을 지닌 보살입상이 4면에 새겨져 있다. 이 보살입상은 비록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의 보살입상에 비해서는 회화적 요소가 다소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보살입상의 특징을 잘 소화해낸 것으로 보인다. 상대에서 약간 밑으로 내려와 보살 입상 사이에 배치된 방형의 연곽도 새로운 변화이며 연곽에는 도식화된 당초문과 내부에 돌기된 작은 연뢰를 표현했다. 이 연곽과 보살입상의 공간을 이용하여 연점각(連點刻)으로 기록한 명문에는 ‘만력원년(萬曆元年, 1573) 계유사월 초일(癸酉 四月初日)에 하가산 수암사(下柯山 菴寺)에서 140근(一百四十斤)의 중량을 들여 만든 대종(大鍾)’이라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여기서 절의 원 소재지인 수암사(菴寺)의 위치는 아직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이 밖에 일반 사대부로 보이는 여러 인물이 시주자로 기록되었다. 아울러 종의 제작자로 보이는 주장 김자산(鑄匠 金慈山), 화원 원오비구(畵圓 元悟比丘)라는 명문을 통해 이 종이 직업 장인인 사장(私匠)과 승장(僧匠)이 함께 만든 것으로 파악된다. 하부가 약간 벌어진 종구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온 곳에 굴곡진 연당초문을 배치한 것도 새로운 모습으로서 이후 태안사 종에서도 다시 계승된다. 

이 종은 조선 시대 중기 범종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특징과 양식을 잘 구비하고 있을 뿐 아니라 조선중기 장인사회 연구에 흥미로운 자료가 된다. 이러한 중요성이 인정되어 2010년 보물 1645호로 지정되었다.

    통영 안정사종 

1580년 조성된 통영 안정사종은 높이 115cm, 구경 71cm 크기다. 당좌<아래 사진> 중앙에는 원권으로 두른 ‘만(卍)’자를 배치하고 그 주위를 ‘육자대명왕진언’으로 둥글게 감쌌다.

광흥사종보다 7년 뒤인 1580년에 제작된 종으로 현재는 통영시 안정사(安靜寺) 종각에 봉안돼 있다. 그러나 종에 새겨진 명문에 의하면 원래 전라도 담양(潭陽) 추월산(秋月山) 용천사(龍泉寺) 대종(大鍾)으로 제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재 만세루에 걸려있는 ‘진남군벽발산안정사대종연기(鎭南郡碧鉢山安靜寺大鐘緣記)’ 현판에 따르면 1908년 용추사(龍湫寺)에서 1000여 금을 주고 이 종을 구입하여 이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여기에 보이는 용추사는 용천사와 같은 절로서 <태고사법(太古寺法)> 같은 기록을 통해 1905년부터 사명이 바뀌게 된 것으로 추측된다. 종은 전체높이가 115.8cm이고, 입지름이 71cm로 16세기에 제작된 동종 가운데 비교적 대형에 속한다. 

전체적으로 짙은 검은 색조를 띤 종은 둥글고 불룩이 솟은 천판 위에 단룡(單龍)과 음통을 갖춘 용뉴가 표현되었다. 이 용뉴의 모습은 종의 크기에 비해 왜소하며 가는 목과 좌우로 뻗친 양 발은 매우 어색하다. 목 뒤에 붙은 음통은 현재 상부가 결실되었다. 천판 아래 종신의 상부에는 여의두(如意頭) 형태의 입상연판문대가 낮게 표현되었는데, 상부가 앞으로 휘어져 마치 별도의 잎을 따로 붙인 듯 입체적이다. 이 아래로 장방형으로 표현된 방형 연판문대를 촘촘히 장식한 상대가 배치되었다, 종의 외형은 둥근 반원형으로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 아래를 시작으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종신 중단까지 내려오다가 종구 쪽에서 약간 오므라진 한국 전통형 종의 외형을 따랐다. 

이 종은 광흥사종과 달리 종신에 다양한 문양을 장식한 점이 돋보인다. 우선 종신 중간을 가로지른 횡선은 조선 전기 왕실 발원 범종에 보이는 3줄의 융기선이 아닌 한 줄의 굵은 선으로서 두 틀을 합쳐 주조할 때 생긴 주물자국 바로 아래 배치됐다. 이 융기선을 기준으로 상.하로 구분되는 종신의 상단에는 긴 연판문(蓮瓣文) 상대 아래 바로 붙여 넓은 크기의 연곽을 사면에 장식하였다. 연곽의 형태는 종의 굴곡에 맞추어 사다리꼴이고, 연곽대(蓮廓帶) 안에는 당초문을 둘러 장식적인 효과를 주었다. 그리고 그 내부에 둥글고 큰 연판이 연곽 전체에 꽉 차있으나 중앙에 살짝 돌기된 9개씩의 연뢰(蓮)를 표현했다. 하단에는 4개의 당좌를 배치하였고 종구 위로는 폭이 넓은 하대와 그 안으로 유려한 모습의 연당초문(蓮唐草文)을 장식하였다. 특히 안정사 종에서 가장 주목되는 부분이 바로 당좌이다. 당좌 중앙에는 원권으로 두른 ‘만(卍)’자를 배치하고 그 주위를 둥글게 감싼 ‘육자대명왕진언(六字大明王眞言)’이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였다. 그렇지만 ‘卍’자와 진언이 뒤집혀 주조되었다. 이는 문양판을 처음부터 거꾸로 새겨야 바로 찍히는 주조의 공정을 착각한 것으로 보이지만 그대로 주조한 점에서 당시 주조 기술의 과정이나 단면을 엿보게 한다. 

또한 이 종에는 종신 상단 연곽 사이와 연곽 밑을 돌아가며 양각(陽刻) 명문이 새겨있다. 그 내용은 ‘만력8년 경진 8월일(萬曆八年庚辰八月日)에 전라도 담양부지 추월산 용천사(全羅道潭陽府地秋月山龍泉寺) 대종(大鍾)으로 100여근의 중량을 들여 제작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종의 제작자로 기록된 ‘화원계당, 진옥, 문헌(畵員戒堂,眞玉,文軒)’은 화원이란 직책과 속성 없이 법명만 기재한 점을 통해 이들의 신분을 승장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두 범종은 임진왜란 직전에 만들어진 많지 않은 16세기 범종의 귀중한 예인 동시에 갑사 동종이 중국종과 전통형의 혼합형을 보여주는 것과 달리 전통형 범종의 전형을 가장 잘 고수하고 있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동시에 이 두 점 모두 당시 사회 지식층인 사대부가 주축이 되어 한 점은 사장과 승장이 조력하여, 다른 한 점은 승장 집단이 제작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장인 사회의 일면을 파악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따라서 이 시기에 이미 전통형 종의 기법을 고수하고 계승하려는 스님 장인 집단이 있었음을 새롭게 밝힐 수 있어 17세기 이후 조선 후기 범종으로의 연결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종으로 판단된다. 안정사종은 조선시대 중기 종으로서 1m가 넘는 대형 종이면서 당좌를 비롯한 세부 문양의 장식성이 돋보이는 가치를 인정받아 광흥사종과 같은 해인 2010년 보물 1699호로 지정되었다.

[불교신문3407호/2018년7월11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