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움으로 미움 그칠 수 없어
싸울 일이지만 자비로 임하고
욕심을 베풂으로 임하는 것이
불교 가치 빛내고 거룩케 해

스님들이 계율을 어겼니 말았니로 세상사람들에게 시비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사실 여부를 떠나 매우 민망한 일이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험한 말로 싸잡아 비난하는 기사나 댓글을 볼 때마다 맥이 탁 풀린다. 재가불자인 나도 이렇듯 부끄럽고 참담한데 스님들은 오죽할까. 

언론에 회자되었던 아니던 간에 우리는 불교공동체 안에 비윤리적 관행이 온존함을 안다. 불교를 불교답지 않게 만드는 악습이자 폐단은 사라져야 하고, 사회적 범죄행위는 엄중하게 처벌 받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폐청산과 같은 치우친 주장에는 선뜻 동의할 수가 없다. 그런 움직임이 교단을 청정하게, 거룩하게 만들 것인가 라고 묻다보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기 때문이다. 

붓다는 고구정녕하게 거듭 거듭 설했다. 미움은 미움으로 그쳐지지 않는다. 다툼은 다툼으로 그쳐지지 않는다고. 이 말이 무슨 뜻인가? 세 살 먹은 아이도 누군가 제 것을 빼앗으려 하면 움켜쥐고 저항한다. 누가 특별히 시키지 않아도 미워하고 화를 낸다. 미움을 미움으로, 원한을 원한으로, 다툼을 다툼으로 되갚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저절로 나오는 윤회의 방식, 세간의 방식이다. 불교는 윤회의 방식이 아니라 해탈열반의 방식과 태도를 추구하는 종교다. 빼앗기지 않으려고 움켜쥐지도 말고, 내 것을 빼앗으려고 덤비는 이에게조차 맞서 다투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친다. 틀림없이 싸울 일인데 자비로 임하고, 틀림없이 욕심낼 일인데 베풂으로 임할 때 그 때 불교의 존재가치는 빛난다. 만약 불교인들이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의 태도로 문제를 다룬다면 그것은 불교 스스로 존재 이유를 허무는 것이다. 세상과 별반 차이 없는 불교가 굳이 존재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나쁜 놈이니 쫓겨나야 해. 너 같은 나쁜 놈을 가만 두는 종단도 없어져 마땅해”라는 감정이 일어남은 세간적 기준으로 비난받을 일만은 아니다. 하지만 불교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극복해야 할 악습에 불과하다. 하물며 정의를 표방한 일조차 그러할 진데, 상대의 허물을 들춰내어 대중들의 미움과 증오를 일으키는데 골몰하거나, 제 편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성을 내며 공동체 전체를 불태우려 하거나, 독한 비난을 줄기차게 해대면서도 ‘내 입에 재갈을 풀어달라’고 볼멘소리를 하는 것이 어찌 불교인다운 삶의 방식이라 할 수 있겠는가. 

종단 안에 팽배한 무관심과 무책임도 붓다의 방식과는 너무 거리가 멀다. 종단 상황을 포기하지 말고 반보라도 변화시키자고 건넸더니, 대부분은 손사래를 친다. 시궁창 같은 권력의 방패막이 역할을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제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주인이라는 이가 ‘형편없는 집구석 무너질 줄 알았다’고 뒷짐 지고 혀만 끌끌 찬다면, 그 집은 바로 무너지게 되어 있다. 그렇게 해서 종단이란 집이 무너지면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붓다는 살해와 협박, 모함과 음모 앞에서도 미움을 사랑으로, 분노를 이해로 되받으셨다. 전심전력을 다해 치열하게 문제를 다루되 평화로운 삶의 태도와 방식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붓다가 평생 보여주었던 해탈 열반의 방식, 불교다운 방식으로 우리 문제를 다루어야 한다. 어렵더라도 그 참된 길을 누군가는 가야 한다. 거기서 불교의 거룩함은 비롯된다. 

[불교신문3406호/2018년7월7일자] 

정웅기 논설위원·생명평화대학 운영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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