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연은 실체 없어…만법은 하나로 돌아가”

 

唐 소산광인과 법거량을 할
‘유일의 해동인’ 경보선사 
견훤도 귀의…옥룡사서 선풍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 상주
고려 혜종·정종·광종도 귀의
봉림산문 3조 찬유…‘원종’

사분율 여는데 신심ㆍ실천병행 
성주산문 3조 현휘 ‘법경대사’ 
충주 정토사 주석, 선풍 드날려

경보·찬유·현휘 세 선사에게 법을 전한 중국 운거도응 선사 사리탑(강서성 운거산 진여사).

고려 초기 ‘사무외대사’, 이엄·여엄·형미·경유 네 선사에게 법을 전해준 스승은 운거 도응(雲居 道膺, 846˜902년)이다. 우리나라 승려 운주·혜○ 선사도 도응의 법을 받았다. 그만큼 도응은 한국선과 밀접하다. 도응은 중국 강서성(江西省) 영수현(永水縣) 운거산(雲居山) 진여사(眞如寺)에서 열반할 때까지 30여 년을 머물렀다. 도응은 어려서 출가해 여러 곳을 편력하면서 취미무학(翠微無學)에게 참학하고 동산양개(洞山良价, 807˜869년)의 제자가 됐다. 청원행사-석두희천-약산유엄-운암담성-동산양개로 내려오는 법맥을 이었다. 동산은 많은 대중들에게 “도응을 우습게보지 말라. 훗날, 천만인도 당해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칭찬했다.

어느 날 여러 날이 지나도 도응이 암자에 있으면서 법당에 내려오지 않았다. 하루는 스승 동산이 도응을 불러 물었다. “너는 왜 법당에 내려오지 않느냐?” “천신(天神)이 밥을 보내오기 때문에 굳이 법당에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너를 쓸 만한 인재로 보았더니, 그런 망상만 하고 있었구나. 도응아! 선(善)도 생각하지 말고 악(惡)도 생각하지 말라. 이것이 무엇이냐?” 도응이 스승의 언질을 듣고 암자로 돌아와 여러 날 정진한 후, 다시는 천신이 찾아오지 않았다. 이후 동산의 법을 얻은 도응이 진여사에 주석하자, 1500여 명의 수행자가 모여들었다. 도응은 제자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지옥은 괴롭다고 할 수 없다. 대장부가 출가하여 대사(大事)를 밝히지 못한 것이 천하에 가장 괴로운 지옥이다.” 

동리산문 경보 선사가 선풍을 펼치던 광양 옥룡사지(문화재청 자료).

도응과 사형사제인 조산본적(曹山本寂, 840˜901년)의 법맥은 단명했으나 도응의 선풍은 지금까지 묵조선 법맥으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조동종도 운거도응에서 내려온 법맥이다. 도응이 상주했던 진여사는 당나라 때 운거선원(雲居禪院)으로 불리었으며, 역대로 백거이·소동파·왕안석 등 문인과 선사들의 발길이 잦은 곳이다. 1950년대에 허운(虛雲, 1840˜1959년) 선사가 머물다 열반한 곳이기도 하다. 현재도 운거사는 납자들의 요람으로 불리며, 농선병행의 청규정신이 지켜지는 선방으로 알려져 있다. 강서성 남창에서 이틀이 걸릴 정도로 깊은 산골에 위치해 있다. 

8세기 중반˜10세기에 걸쳐 발달했던 조사선은 마조계만이 아니라 석두계의 선(禪)까지 아우른다. 하지만 조사선이 시작되는 8세기에는 마조와 마조계 제자들의 선풍이 천하를 풍미했고, 석두계는 매우 미미했다. 당연히 우리나라 선사들도 신라 말기에는 마조계 선풍이 주류를 이루었다. 석두계가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조동종이 처음 열리게 되는 9세기 중기부터이며, 이때부터 조동종이 발전했다. 당연히 우리나라 승려들이 조동종 선사들에게 법맥을 받아오게 되는데, 고려 초기에 해당한다. 경보·찬유·현휘 등이 석두계·조동종의 심인을 받은 선사들이다. 

 석두계·조동종 선사들

고대 한국 선사상 풍미 ‘반증 ’
그 구도 열망 조계종 역사로… 

여주 고달사지의 봉림산문 3인 찬유 원종대사혜진탑.

경보(慶甫, 869˜948년)는 동리산문 선사로 부인산사(夫仁山寺)에서 출가했다. 어느 날 꿈에 부처가 나타나 이곳을 떠나라고 하자, 그 즉시 행장을 꾸려 수행길을 떠나 도선의 제자가 됐다. 885년 월유산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고, 성주산문 무염과 사굴산문의 범일을 찾아가 법을 구했다. 선사는 26세 때인 진성왕 6년(892년)에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조동종 동산양개의 제자 소산광인(疎山匡仁, 837˜909년, 석두-약산-운암-동산-광인)을 만났다. 광인은 경보에게 ‘그대는 바다의 용과 같구나’라며 입실을 허락했다. 이후 경보가 심인을 증득하자, 소산광인이 기뻐하면서 ‘해동인으로서 법거량을 할 자가 그대뿐이구나’라고 하며 인가했다. 이후 경보는 당나라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알한 뒤 고국을 떠난 지 28년만인 921년, 54세에 귀국했다. 견훤의 귀의를 받아 전주 남복선원(南福禪院)에 주석하다 옥룡사(玉龍寺)로 옮겨가 선풍을 펼쳤다. 이곳에서 입적했는데, 정종은 ‘동진(洞眞) 대사’라는 시호를 내리고, 탑호를 ‘보운(寶雲)’이라 했다(옥룡사 동진대사 탑비). 

찬유(璨幽, 869˜958년)는 봉림산문(현욱-심희-찬유)의 3조에 해당한다. 찬유는 삼랑사(三郞寺) 융제 선사를 찾아가 출가했다. 융제의 스승이자, 봉림산문 2조인 심희(審希)에게 찾아가 깨달음을 얻었다. 찬유는 진성왕 6년(892년) 당나라로 들어가, 석두계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년, 석두-단하천연-취미무학-대동)선사로부터 법을 받았다. 찬유는 29년만인 태조 4년(921년)에 귀국해 왕건의 청으로 혜목산에 상주했다. 고려 혜종·정종·광종의 귀의를 받았다. 제자에는 흔홍(昕弘), 동광(同光) 등 500여 명에 이를 만큼 찬유의 선풍이 천하에 풍미를 이루었다. 고려 광종으로부터 ‘증진(證眞) 대사’ 시호를 받았으며, 탑명은 ‘원종(元宗)’ 대사이다(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현휘(玄暉, 879〜941년)는 성주산문(무염-심광-현휘) 3조에 해당한다. 성은 이(李)씨. 그의 선조는 노자의 후손으로 당나라가 요동지역으로 군사 원정을 할 때, 그의 조상이 종군했다가 전주 남원에 정착했다. 1월1일 출생한 현휘는 어려서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였다. 비문에 “선사는 선천적으로 성자(聖恣)를 갖고 태어나 어려서부터 장난도 치지 않았다. 불상이나 어른을 보면 합장하고, 앉을 때는 가부좌를 했다. 땅이나 벽에는 불상과 탑형을 그렸고, 물고기나 벌레들을 함부로 살상하지 않았다”고 새겨져 있다. 출가할 때 그의 부친은 ‘속히 불지(佛地)에 올라 삼계의 도사(導師)가 되고 사생(四生)의 자부(慈父)가 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출가해 영각산사(靈覺山寺) 심광의 문하에서 구족계를 받은 이후 선사의 행적에 대해 비문에 이렇게 전한다. “계(戒)의 구슬이 더욱 청정해지고, 위의가 더욱 엄중해졌다. 여래의 선(禪)을 닦되, 마음은 부동하고, 문수의 지혜에 계합하여 경계를 비추되 무위(無爲)의 경지였다. 삼장(三藏)의 글을 부연함에 지혜와 수행이 상응했으며, 사분율(四分律)을 여는데 있어 신심과 실천을 병행했다.” 

스승 심광 문하에 머문 지 얼마 안 되어 스승은 “앞으로 나의 도를 전개할 사람이 바로 그대로다!”라며 현휘에게 심인을 전했다. 이후 현휘는 후삼국이 다투는 혼란한 시기에 무주와 남해지역을 다니다 906년에 입당(入唐)해 사천성(四川省) 구봉산(九峰山) 도건(道乾)을 만났다. 도건이 선사에게 물었다. “그대는 머리가 희군” “저는 아무리 보아도 저 자신을 알 수 없습니다” “무엇을 알지 못한다고 하는가?” “저의 머리가 희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추억을 더듬어보니, 그대와 이별한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여기서 또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충주 정토사지에 있는 성주산문 현휘 법경대사 자등탑비(문화재청 자료).

이렇게 선문답을 주고받은 후 입실을 허락받은 현위는 도건의 문하에 든 지 10일 만에 심인을 얻었다(석두-약산-도오-석상-도건). 이후 현휘는 여러 지역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수행했다. 마침 고국에 전쟁이 끝났다는 말을 듣고, 입당한지 18년 만인 924년 고국에 돌아왔다. 그가 귀국하자, 태조 왕건은 특사를 보내어 선사를 궁궐로 초청해 국사로 모셨다. 이때 현휘는 다음과 같은 법을 설했다. “모든 인연이란 그 실체가 없고, 만법은 마침내 하나로 돌아간다. 마치 신비로운 약과 독초가 함께 숲속에 공존하고, 감로의 샘물과 수렁의 탁한 물이 땅속에서 함께 솟아오르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 이치를 잘 분별하여 미혹하지 말라.”

현휘는 태조의 청으로 충주 정토사에 머물며, 선풍을 드날렸다. 이곳에서의 선사의 모습을 비문에서는 이렇게 전한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어려워 하다가 후에는 얻어가는 것이 있어 안개처럼 모였다가 구름같이 돌아갔다. 진리는 깊고 미묘하며, 말씀은 간결하고, 관찰력이 예리해 뜻이 깊어서 육도(六道)의 모범이며, 인천의 사표(師表)가 되었다.” 선사는 제자들에게 “가고 머무는 것은 때가 있으나 오고 감은 머묾이 없다”는 말을 남기고 입적했다. 문하에는 300여 명의 제자가 있었으나 특정 제자에게 법을 부촉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태조는 시호를 ‘법경(法鏡) 대사’, 탑명을 ‘자등(慈燈)’이라고 했다(충주 정토사지 법경대사탑비). 

신라 말기에는 마조계 선풍이 주류를 이루었으나 고려 초기로 들어와서는 석두계 조동종 선풍이 전개됐다. 바로 이점은 고대 우리나라에 풍성하게 선사상이 전개되었다는 반증이다. 또한 나말여초 선사들의 구도 열망은 현 조계종의 역사이다.

[불교신문3406호/2018년7월7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