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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한국禪사상사] <19> 수미산문 이엄 등 사무외대사 (여엄, 형미, 경유)‘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사람들’ 선풍 펼쳐
  •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 승인 2018.06.28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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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율론 ‘삼장’ 통달 이엄 선사
사형 없는 자비로운 국정 건의
왕건 명으로 해주 광조사 건립

구산선문 유일 조동종 계열 
수미산문 개산 ‘계율’ 중시해 

사교입선 眞空 진작 ‘대경여엄’ 
운거도응 심인 전수 ‘선각형미’ 
사자산문 ‘법경경유’와 함께

‘두려울 게 없는 경지 4현’으로
오룡사 ‘보조혜광탑비’에 전해

수미산문 개산조 이엄 진철대사탑비. 해주 광조사에 있다(문화재청 자료).

나말여초에 형성된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늦게 열린 산문은 수미산문(須彌山門)이다. 이 산문은 고려 초기에 성립됐다. 신라 말기부터 개산된 여러 산문이 마조계 계열 법맥인데, 수미산문만 유일하게 조동종 계열이다. 

수미산문을 개산한 스님은 이엄(利嚴, 870˜936년)이다. 이엄의 조상은 계림(현 경주)이었으나 선사는 세산군 태안지방인 소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12세에 가야산 갑사(岬寺)의 덕양(德良)선사를 따라 출가, 이엄은 일찍이 경율론 삼장에 통달했다. 도견(道堅)에게 구족계를 받은 뒤 특히 계율을 중시했으며 896년 입절사(入浙使) 최예희를 만나 당나라에 함께 들어갈 수 있었다. 

선사는 석두계의 법맥을 받은 운거 도응(雲居 道膺, 846˜902년) 문하에 입실해 6년 만에 법을 받았다. 이후 발초첨풍(撥草瞻風)하면서 여러 곳의 선지식을 찾아다니며 행각하다가 911년(효공왕 15년), 15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선사는 김해부 지군부사 소율희의 후원으로 광산(光山)에서 12년을 머무르다 922년 성주산문의 심광이 주석했던 충북 영동 영각산사(靈覺山寺)로 옮겨갔다. 다시 923년 선사는 왕건의 요청으로 태흥사에 초청되어 사나내원(舍那內院)으로 옮겨 궁중에 거주했다. 

왕건이 선사에게 국정에 대해 묻자, ‘제왕과 필부의 닦을 바가 다름’을 제시했다. 또한 선사는 ‘백성을 아들로 여겨 무고한 사람을 죽이지 말고, 가능한 죄인에게 사형을 내리지 않는 자비로운 군왕’으로서의 모습 등을 건의했다. 선사는 사나내원에 머문 지 9년 만에 태조에게 산속으로 돌아갈 것을 요청해 태조는 932년(태조 15년) 해주 수미산에 광조사(廣照寺)를 짓고 선사가 머물도록 했다. 즉 이엄은 왕명에 의해 황해도 해주군 은산면에 광조사 산문을 개산한 셈이다. 수미산문은 왕명 이외 황보 씨 호족들의 도움으로 개창됐다. 선사가 광조사에서 선풍을 떨칠 때, 수미산문에 승려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성주산문 대경대사 여엄 탑비. 양평 보리사지에 있다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선사는 광조사에 머문 지 4년 만에 서울로 나왔다가 오룡사(五龍寺)에서 입적했다. 이엄은 제자들에게 ‘부처님의 간곡한 말씀인 계율을 엄하게 지키며 수행할 것’을 당부한 뒤 ‘앉은 채로 입적(坐脫)’했다. 시호는 진철(眞徹), 탑호는 보월승공(寶月乘空)이다(‘광조사 진철대사 보월승공탑비’). 이엄의 제자로는 처광, 도인, 경숭, 현조 등이 있다. 수미산문은 2세에 의해 선풍이 전개되었으나 얼마 안 되어 단멸된 것으로 사료된다. 

‘만리동풍’ 이엄 여엄 형미 경유

그러면 이엄과 비슷한 시대에 선풍을 펼쳤던 여엄, 형미, 경유 선사의 행적을 보자. 대경대사(大鏡大師) 여엄(麗嚴, 862〜930년)은 성주산문 무염의 제자이다. 여엄의 선조는 귀족으로, 관직을 따라 낙향한 호족이었다. 여엄은 9세에 무량수사(無量壽寺) 주종(住宗)에게 출가해 화엄을 공부했다. 헌강왕 6년(880년), 19세 때 구족계를 받고, 계율을 철저히 지켰다. 여엄은 교(敎)가 최상승이 아님을 깨닫고 선(禪)으로 돌아섰다(捨敎入禪). 여엄은 무염을 찾아가 그 문하에서 수년간 정진했다. 무염이 입적한 뒤에는 사형인 심광(深光) 문하에서 선을 공부했다. 이후 선사는 입당사(入唐使)를 따라 당나라로 유학 가서 운거를 만났다. 운거는 여엄에게 “그대와 이별한 지가 멀지 않은데 여기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구나. 내가 여기 있을 때 찾아와서 다행”이라며 진심으로 법을 전해주었다. 이후 여엄이 귀국하려고 하자, 운거는 “그대가 나면서 있어야 할 곳은 고국이니, 속히 돌아가라. 내가 바라는 것은 진공(眞空)을 진작하여 우리 선종을 빛나게 하며, 법요를 잘 보존하는 것이다. 책임이 그대에게 있으니 잘 명심하라. 그리고 시기를 놓치지 말라”고 당부했다. 

여엄이 909년 49세에 귀국해 충주 월악산과 경북 영주에 머물다가 소백산으로 들어갔다. 이후 풍기의 호족인 강훤의 귀의를 받고, 고려 태조의 초청을 받아 왕궁에 나아가 법을 설했다. 태조는 선사에게 경기도 지평(현 양평) 연수리 보리사에 거주토록 했다. 선사는 이곳에서 69세에 입적했다. 태조는 선사에게 ‘대경(大鏡)’ 시호와 함께 ‘현기(玄機)’라는 탑호를 내렸다(‘지평 보리사 대경대사탑비’). 제자로는 흔정, 연육, 정법 등 재가자를 포함해 500여 명이다. 

선각대사(先覺大師) 형미(逈微, 864〜917년)는 가지산문의 3조인 보조 체징의 제자이다. 법맥은 도의-염거-체징-형미스님으로 이어진다. 형미의 본 조상은 중국인으로 신라에 사신으로 왔다가 신라에 머물렀다. 형미가 출가 후 수행의 열망을 품고, 장흥 보림사의 체징을 찾아갔다. 체징은 형미에게 “비록 처음 만났지만 오래전부터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다. 옛날 서로 이별한 지 오래되었는데, 왜 이렇게 늦게 왔는가?”라고 반기며 입실을 허락했다. 형미는 19세 때 화엄사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이후 도륜산 융견(融堅) 장로로부터 당(唐) 유학을 권유받은 선사는 891년 입당해 운거도응 문하에 들어갔다. 운거는 형미를 만나자마자 “그대가 돌아왔으니 미리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대가 법을 펴고자 하니 법의 보배가 감추어져 있는 곳을 알려주겠다”고 했다. 이후 운거 아래서 심인(心印)을 얻어 법을 받았다. 

강진 무위사에 있는 가지산문 선각대사 형미의 탑비(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형미는 905년, 42세 때 귀국해 무위(無爲)의 갑사(甲寺)에 주석하며 선풍을 펼쳤다. 고려 태조의 청을 받고 개경에 나아가 법을 설했다. 형미는 갑사에서 8년간을 머물며 중창불사를 했다. 54세에 입적했는데, 선사의 입적 원인이 정확하지 않다. 다만 선사는 화(禍)가 미침을 알고 ‘상신(商臣)과 같은 악당에 참여하기보다는 입적할 때가 되었다’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궁예에게 죽음을 당한 것으로 추측한다. 형미의 문하인 한준, 백화 등이 탑을 세우고, 정종 원년(946)에 탑을 건립했다(‘강진 무위사 선각대사탑비’). 

법경대사(法鏡大師) 경유(慶猷, 871〜921년)는 사자산문 3조에 해당한다. 법맥은 도윤-절중-경유로 내려온다. 경유의 조상은 본래 중국 한족 사람으로, 당진 지역의 호족으로 성장했다. 경유는 15세 때 훈종(訓宗)에게 출가해 18세 때 근도사(近度寺) 영종율사(靈宗律師)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경유는 선을 배우기 위해 입당사를 따라 당나라에 들어가 운거 문하에 들어갔다. 얼마 후 운거는 “경유, 한 사람만이 능히 내 마음을 열었구나”라며 경유에게 심인을 전했다. 

908년 38세 때 무주의 회진(會津)으로 귀국했다. 이후 전란을 피해 산속에 묻혀 살았으나 고려 태조가 선사를 왕사로 모셨다. 태조는 경유에게 백성을 다스릴 훈계를 물었고, 경유는 이에 맞는 법을 설해주었다. 921년 선사는 일월사(日月寺)에서 입적해 다음 해에 법구가 용암산(踊岩山)으로 옮겨졌다. 문하에 정○, 장현 등이 있다. 선사 입적 후, 70여 년인 994년 황해북도 개풍군 영남면 오룡사에 탑비(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가 세워졌다. 

앞에서 언급한 수미산문의 이엄, 여엄, 형미, 경유 선사가 모두 891년에서 896년 사이, 운거 도응의 법을 받았다. 이 네 선사를 사무외대사(四無畏大士)라고 한다. 사무외대사란 “두려울 게 없는 경지에 이른 네 분의 스님”이라는 뜻이다. ‘사무외대사’ 명칭은 중국이 아닌 고려에서 불려졌는데, 언제부터 명명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다만 그 유래는 경유의 탑비(오룡사 법경대사 보조혜광탑비)에 전하는 다음 내용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사자산문 법경대사 경유선사의 탑비. 개풍군 영남면 오룡사지에 있다(문화재청 자료).

“이엄, 여엄, 형미, 경유를 모두 사무외대사라고 했다. 운거 선사가 말하기를 ‘말을 걸어보면 선비임을 알고,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만리에 동풍(同風)이요, 천년에 한번 만날 수 있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이들 사현(四賢)은 마음으로 흠모하면서 불경을 배우고, 감개하면서 개당하여 이후 선풍을 펼쳤다.”

대경대사 여엄의 비문을 통해 볼 때, 사무외대사 가운데 형미와 여엄은 공(空)사상을 근간으로 선풍을 전개했고, 이엄과 경유는 심법의 본성을 깨쳐 일상적인 선(禪)에 근거해 법을 펼쳤다. 

네 분의 대사들은 공통적으로 조동종 운거 도응의 법을 받았으며, 귀국해 고려에서 왕성한 활동을 펼친 인물들이다. 사무외대사에 관한 내용이 경유의 탑비에만 언급된 것은 <경덕전등록>에 이름이 전하는 사람이 경유뿐이며, 당시 선문(禪門) 가운데 가장 중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사무외대사는 태조 왕건과 인연이 되면서 정치적인 연맥도 얽혔을 것으로 사료된다. 태조 왕건 입장에서는 민생 안정을 위해 선사들의 법연이 필요하고, 선사들 입장에서는 혼란한 시기에 권력층과 민중의 정신적인 안정도모가 중생을 향한 자비의 방편이 되었을 것이라고 추론해본다.

[불교신문3404호/2018년6월30일]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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