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독립만세’ 깃발 세우고 5천 군중과 궐기

1919년 4월4일 표충사 스님들이 주민들과 함께 만세운동을 전개한 단장면 태룡리 장터의 현재 모습. 1959년 9월 사라 태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우사와 밭으로 바뀌었다. 제방 왼쪽은 단장천이다.

표충사 스님들 장날 기해 거사 
태극기 나눠 주며 시위 ‘주도’
주재소 파괴…일제 간담 ‘서늘’
사라 태풍으로 장터는 사라져

1919년 4월4일 경남 밀양군(지금의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단장면 태룡장이 서는 날이었다. 단장천 옆에 자리한 장터에 밀양 각지의 상인과 주민이 모여 들었다. 3ㆍ1만세운동의 열기가 전국적으로 번져가는 시기였기에 일제 당국은 주민들을 예의주시했다. 장터에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이때 표충사 스님들이 앞장 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조선독립만세 …” 3ㆍ1만세 운동의 불길이 밀양 단장면 태룡장터를 뒤흔들었다.

태룡리 장터 만세운동은 표충사의 이장엄(李章玉), 이찰수(李刹修), 오학성(吳學成), 김성흡(金性洽), 구연운(具蓮耘), 오응석(吳應石)스님 등이 주도했다. 장석준(張碩俊) 등 표충학원 학생들도 주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며 동조했다. 임진왜란 당시 누란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분연히 일어선 사명대사를 모신 표충사의 의연한 기개를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스님들의 선창에 고무된 주민들도 소리 높여 ‘만세’를 부르며 함께 했다. 표충사 스님들은 태룡리 장터 한복판에 태극기와 깃발을 높이 세웠다. 깃발에는 ‘조선독립만세’라고 적혀 있었다. 나라를 되찾고자 하는 스님들과 주민들의 열망이 봇물처럼 터진 것이다. 깜짝 놀란 일본 경찰이 부랴부랴 대응에 나섰다. 하지만 독립을 간절히 원하는 조선인들의 견고한 뜻을 꺾기에 그들의 힘은 부족했다. 대열을 이룬 군중이 일본 경찰을 압박했다. 한껏 고조된 군중은 나라를 빼앗은 일제의 첨병인 헌병들이 머무는 주재소를 무너뜨렸다. 시위 군중의 투석으로 유리창은 물론 지붕과 벽이 전차(全破)되었다고 한다. 

사명대사의 충절을 기리는 밀양 표충사 전경.

총칼로 시위 대열을 위협한 일본 경찰은 얼마 지나지 않아 무기를 사용했다. 밀양읍에 머물던 헌병분견대(憲兵分遣隊)가 급히 도착해 무자비한 진압을 시작했다. 비무장 상태의 스님들과 주민들은 무력 앞에 행진을 멈추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일본 경찰은 닥치는 대로 스님과 주민들을 연행했다. 일경(日警)의 발포로 오후1시30분 종료됐다. 그들은 시위 참가자를 잡는다며 집집마다 들이닥쳐 군홧발로 짓밟았다. 연행자는 346명, 검찰에 송치된 이는 71명에 이르렀다. 시위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본 경찰을 피해 낮에는 재약산에 숨어야 했고, 밤이 돼서야 돌아오기를 반복했다고 한다. 이장옥스님은 징역 5년, 오학성·손영식스님은 징역 3년, 이찰수·김성흡스님은 징역 2년형을 구형받아 옥고를 치렀다.

스님과 주민들이 대거 참여한 태룡리 장터. 지금은 우사(牛舍)와 밭으로 변했다. 1959년 9월 사상 최대 규모의 사라호 태풍이 휩쓸 당시 단장천이 범람해 사라지고 만 것이다.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국내독립운동, 국사수호 사적지’에 기록된 태룡장터의 주소는 ‘밀양시 단장면 용회길 52-38(태룡리 190)’이다. 독립기념관은 “지적원도에 시장 표시가 되어 있어 이를 현재의 지적도와 상호 비교하여 위치를 확정했다”고 밝혔다. 

표충사 스님들의 궐기는 서울에서 전개된 3ㆍ1운동 소식을 접한 통도사 스님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1919년 3월20일 통도사 스님 50명이 표충사 스님들을 비밀리에 만나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결의했다. 거사 날짜는 주민이 많이 모이는 4월4일 태룡리 장날로 정했던 것이다.

이에 앞서 밀양에서는 서울의 3·1운동에 참가하고 돌아온 윤세주, 윤치형이 3월13일 밀양 장날을 맞아 시위를 전개했다. 3월14일에는 밀양보통학교 학생들이 뒤를 이었고, 4월2일에는 밀양소년단원들이 독립만세를 외쳤다. 또한 이장석 밀양군 부내면장 김찬규 상남면장, 박병휘 하동면장, 손승창 단양면장을 비롯해 김명규·정인설 밀양군청 서기(書記)가 독립만세운동에 동조하는 뜻으로 사표를 던졌다.

밀양문화원이 발간한 <밀양의 독립운동사>에 따르면 “1919년 3월13일부터 4월10일까지 밀양에서 9차례에 걸쳐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등 당시 대부분의 밀양인들이 만세시위에 참여했다”고 한다. 

일제 당국은 1919년 3월과 4월에 밀양 지역에서 벌어진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선량한 스님과 주민을 폭도로 매도하고, 정당한 만세운동을 ‘소요’로 왜곡하고 있지만 당시 상황을 확인하는 중요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일본 경찰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1960년대 표충사 모습.

“3월13일 읍내에서 1000의 군중이 시위운동을 개시하였다. (밀양)군에 있어서 소요의 시초이다. 이튿날인 14일과 4월2일에도 이곳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다음 4일에 단장면 태룡동(태룡리)에서 일어난 소요는 승려 및 농민으로 이루어진 약 1500명의 폭민(暴民)이 불온선언서를 살포하여 부민(府民)을 선동하고, 이 곳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여 투석하였으며, 곤봉을 휘둘러 주재소를 파괴하였으므로 마침내 발포하여 이를 해산시켰다. 동월 6일에는 부북면(府北面), 동 10일에는 청도면(淸道面)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이로써 초발(初發)이래 소요는 6회, 4개소에 이른다.” 태룡리 장터 만세운동 참여 인원을 1500명으로 축소하고, 독립선언문을 불온선언서라 지칭하고, 스님들과 주민들을 ‘폭민’으로 기록했다. 

일제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밀양 지역의 만세운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표충사 스님들이 주도한 태룡리 장터 만세운동에 이어 4월6일에는 부북면 계성학교 김내봉 교장이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600여 명의 농민과 함께 시위를 전개했다.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에는 4ㆍ4만세운동에 참여한 표충사 스님 가운데 김성흡스님의 자료가 기록되어 있다. 속명은 김기봉(金奇鳳)으로 1894년 12월9일 경북 청도군 청도읍 내호리에서 출생했다. 2016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수여 받았는데 공적 사항은 다음과 같다. “김기봉은 이명이 김성흡(金性洽). 그는 1919년 4월4일 경남 밀양군 단양면 태룡동 시장에서 표충사 승려로 만세운동에 참여하여 1500여명의 군중과 함께 독립만세를 고창하다 붙잡혀 징역 2년형을 받았다.” 스님은 1939년 1월16일 입적했다. 

밀양읍에서 동쪽으로 약 28km 떨어진 재약산 기슭에 자리한 표충사(表忠寺)는 임진왜란 당시 나라를 구한 사명대사와 인연이 깊은 호국도량이다. 비록 불교를 홀대하던 조선시대였지만 밀양 지역의 관료와 주민들은 표충사를 ‘구국의 성지’로 여기는 자부심이 강했다. 이러한 역사적 의식을 지닌 표충사 스님들이 주민들과 함께 ‘조선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밀양문화원이 지난 2005년 단장면 행정복지센터 앞에 건립한 ‘태룡장터 만세운동비’.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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