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누비며 나물 뜯어 판 돈
절에 연등 다는 할머니 보고
시주의 무거움 뼈저리게 느껴

중생들 피눈물 속에 살고 있는
본분 잊으면 그 업보를 어찌…

옛날 북평(北平, 지금의 북경) 백운관(白雲館)의 주련(柱聯) 글귀 중에 “세상에 수행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없고, 천하에 밥 먹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은 없느니라(世間莫若修行好 天下無如吃飯難)”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수행의 좋음은 알거니와, 밥 얻어 먹는 것의 어려움은 모르는 듯 하다.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자리(自利)만 알뿐이지, 하화중생(下化衆生)의 이타(利他)를 모르는 것과 같다. 

매일 아침 KBS ‘인간극장‘을 보는 재미에 살고 있다. 출세간의 수행자에게 세상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가 주는 묘한 감동과 때로는 내 머리를 깨트리는 죽비와 같은 경책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일전에 방송된 ‘칠갑산 여왕벌 우여사‘편에서는 90이 넘은 나이에 칠갑산으로 다래순 나물을 따러가는 주인공 우여사가 “이리 고생해서 나물 뜯으면 어디다 쓸거예요?”라는 질문을 받고 “절에 가서 부처님께 연등 달려고요!”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왔다. 그 순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격했다. “우리가 과연 그런 연등값을 받아도 되는가?” 부처님오신날이면 늘 ‘빈자일등(貧者一燈)’ 이야기를 되뇌이면서 실상은 우리 또한 차별과 하대(下待)를 하지는 않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다. 한 등 5만원 하는 일년등을 여섯 식구 전부 달려면 한 달은 온 산을 헤매며 나물을 뜯어다 팔아야 한다. 더 없이 소중하고 무거운 시은(施恩)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온 몸에 털이 나고 머리에 뿔을 인채(皮毛戴角), 단월가에 소가 되어 갚는(異類中行) 과보를 짊어져야할 것이다. 

수 많은 중생의 피눈물과 하소연 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한 톨의 쌀과 연등마다 서린 중생의 비원(悲願)을 결코 가벼이 여겨서는 안된다. 우리의 님은 부처가 아니라 응당 중생이어야만 한다! 훗날 안광낙지시(眼光落地時)에 염라대왕 앞에 가서 어찌 밥값을 내려 하는가? 그때 가서 후회해본들 아무 소용이 없는 노릇이다. 부디 살아 생전에 부지런히 정진하여 밥값을 해야 한다. 그저 중생의 시은으로 소비만 할 것이 아니라, 세상과 중생을 위한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한다. 우리네 이웃이 불보살의 화현이고 그들의 삶이 바로 경전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 사람들의 눈물과 웃음의 삶으로 인해 그래도 우리 사는 이 세상이 살만한가 보다. 그런 까닭에 그들과 그들의 삶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요즘 스님들에 관한 이런 저런 이야기가 나도는 것에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참회한다. 중생의 의지처와 복전(福田)이 되어도 모자랄 판에 근심거리가 되어서야 되겠는가! 우중(雨中)에 연등회에 참석한 불자님들과 부처님오신날에 정성껏 연등을 단 수많은 불자님들께 진심으로 참회하며 감사드린다. 

당신들의 오롯한 신심과 원력이 있어 그나마 한국불교에 희망이 있다. 스님들이 매일 아침 살아있는 부처님들이 나오는 ‘인간극장’을 보며 우리 부모요, 형제자매이며 이웃인 그들의 삶속에 작지만 소중한 깨달음이 함께함을 느꼈으면 한다. 부디 중생의 그 은덕을 잊지말고 참회와 성찰을 통해 자정과 혁신을 이루기를! 그렇치 않다면 파울 첼란의 시구로 사사키 아타루의 책제목처럼, 차라리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이라고 말하고 싶다. 

[불교신문3402호/2018년6월23일자] 

진광스님 논설위원·조계종 교육원 교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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