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신앙까지 포용 ‘민중교화의 끈’ 놓지 않다

봉암사 조사전의 정진국사 긍양 진영.

 

唐 구법순례 25년 만에 ‘귀국’
능가경 화엄경 등 가까이 하며
선교융합 개산조 선풍 이어가 

불에 탄 봉암사 중창 후학지도 
고려 태조 혜종 정종 광종 등
귀의했지만 왕에 기대지 않아

‘중생들과 함께’ 민중지향 특징
정진국사 시호…산문 번창시켜

희양산문 개산은 도헌선사가 했지만 크게 번창하지는 않았다. 산문을 발전시키고, 선풍을 크게 진작시킨 선사는 도헌의 손제자에 해당하는 긍양이다. 

긍양(兢讓, 878˜956년)선사는 공주에서 출생, 일찍이 남혈원(南穴院) 여해(如解) 선사에게 출가했다. 효공왕 1년(897년) 계룡산 보현정사에서 구족계를 받은 후 서혈원(西穴院)의 양부(揚孚, ?˜917년) 선사를 참문하고 법을 받았다. 양부선사에 대해서는 긍양의 비문에 스승으로 등장할 뿐이다. 긍양은 899년(효공왕 3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석상경저(石霜慶諸, 807˜888년)의 제자인 곡산도연(谷山道緣)을 찾아갔다. 긍양이 ‘석상의 종지(宗旨)’에 대해 물었는데 “대대로 일찍이 계승되지 않았다”는 곡산의 대답에 크게 깨달았다. 이렇게 긍양은 청원계, 곧 석두-약산-도오원지-석상경저-곡산도연 등으로 이어지는 조동종계의 법맥을 받았다. 

나말여초 우리나라 선사이야기에 석상경저(石霜慶諸, 807˜888년) 선사가 자주 등장한다. 사굴산문 2조 행적(行寂, 832〜916년)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경저(石霜慶諸)의 법을 받았다. 그는 강서성(江西省) 청강현(淸江縣) 출신으로 13세 때 출가, 만행하며 선지식을 찾아다니다 위산영우의 문하에 입실해 수년을 수행했다. 위산의 문하를 떠나서는 석두희천의 손자인 도오원지(道吾園智, 769˜835년)의 문하로 들어갔는데 머문 지 얼마 안 돼 깨달음의 인가를 받고 그의 법을 이었다.

지증도헌 선사에 의해 개창된 희양산문은 손자뻘인 정진긍양 국사에 이르러 크게 번창했다. 사진은 봉암사 경내 희양산문 태고선원.

이후 경저는 호남성(湖南省) 류양현(瀏陽縣) 석상산으로 가서 숭승선림(崇勝禪林)을 창건하고 20여 년을 주석하면서 선풍을 드날렸다. 석상사(石霜寺)에 주석하면서 산문 출입을 삼가고 장좌불와하며 참선정진에 몰두, 한때는 승려가 1000여 명이나 됐다. 그 중 800여 명이 장좌불와를 했다고 전해졌으며, 오래된 나무처럼 한 자리에 앉아 수행한다고 해서 석상사 선풍을 고목선(枯木禪)이라고도 불렀다. 경저도 임제나 덕산처럼 제자들을 지도함에 소리를 지르거나(喝) 몽둥이를 드는 일(棒)을 서슴치 않았다. 석상사의 선풍은 중국에서 근대까지 진작되어 수행자의 요람터였다. 필자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석상산 전체가 도량이었으며, 산기슭 곳곳마다 선사들의 부도가 있었다. 선종사찰로서 석상사의 면모가 어떠한지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번은 긍양이 문수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산서성(山西省) 오대산(五台山)으로 가는 도중 관음사에 머물렀는데, 갑자기 얼굴에 독창이 생겨 치료가 불가능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했다. 할 수 없이 홀로 열반당(涅槃堂)에 머물면서 일심으로 ‘관음보살’을 염하는데, 한 노승이 나타났다. 그 노승이 ‘숙원을 가진 사람의 원한이 사무쳐서 그런 것’이라며 정성껏 씻겨주었는데 독창이 거짓말같이 깨끗이 나았다. 이후 긍양은 중원 땅 운개(雲蓋), 동산(洞山), 조계산 등 여러 곳을 행각하며 스승을 찾아다녔다. 

고국을 떠난 지 25년 만인 924년(태조 7년) 긍양이 귀국해 강주(康州, 현 경남 진주) 백암사(伯巖寺)에 머물면서 선풍(禪風)을 드날렸다. 경애왕이 그의 덕을 찬탄하여 서신과 함께 봉종대사(奉宗大師)라는 시호를 내려주었다. 이후 긍양은 태조 18년(935년), 화재로 불에 탄 희양산 봉암사를 중창하여 양부의 뒤를 이어 선풍을 떨치며, 후학을 지도했다. 고려 초 태조, 혜종, 정종, 광종의 귀의를 받았다. 특히 광종은 그를 청하여 궁중에서 재(齋)를 베풀고 자문을 얻고자 개경의 사나선원(舍那禪院)에 머물게 하고, 증공대사(證空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긍양은 2년 동안 개경에 머물다가 다시 봉암사로 돌아와 79세에 입적했다. 시호는 정진국사(靜眞國師), 탑명은 원오(圓悟)이다. 문경 봉암사에 ‘정진대사원오탑비’가 있다. 

정진국사원오탑(보물 171호).

긍양선사 사상의 핵심은… 

여기서 한 가지 꼭 염두에 둘 부분이 있다. 긍양이 당시 왕들의 귀의를 받았지만 왕권에 기탁하거나 큰 결연을 맺지 않았다는 점이다. 게다가 지방 호족들과도 연결되어 있지도 않았다. 경애왕(924〜926년 재위)의 부름도 사양했다. 당시 사굴산문의 개청(開淸, 835〜930년)도 경애왕의 부름을 받았으나 왕실과 연결되지는 않았으며, 봉림산문의 2조인 심희(審希, 854˜923년)선사도 왕권과의 인연이 드러나지 않았다. 심희의 탑비(眞鏡大師碑)에도, “진성여왕이 갑자기 왕실에 머물러 달라고 했다. 대사는 비록 왕언을 받들어야겠지만, 오히려 조업(祖業)을 게을리 함으로써 도를 닦는데 막힘이 있을까 염려되어 표를 올려 사양했다”고 새겨져 있다(김두진, ‘왕건의 승려결합과 그 의도’ 참고). 동리산문의 경보(慶甫, 868˜948년, 도선의 제자)를 제외하고, 그 당시 선종 산문이 왕권이나 호족과의 연결이 없어도 어느 정도 자립할 수 있었으며, 선사들의 수행정신 또한 견고함을 엿볼 수 있다. 

긍양의 사상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선교융합(禪敎融合)이다. 긍양은 “색과 공이 다르지 아니하고, 말과 침묵이 같은 것(色空無異 語默猶同)”이라고 했는데, 단순히 선만을 지향하지 않고 <능가경>, <화엄경> 등 경전을 가까이 하며, 교와의 융합을 꾀했다. 둘째, 민간신앙까지 포섭하는 융선적(融禪的)인 측면이 있다. 물론 할아버지 도헌과 유사하게 선풍을 펼치면서 민중교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는 점이다. 

긍양의 제자로는 형초(逈超, 1171˜1221년)가 있으나 행적이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형초의 제자로는 지종(智宗, 930˜1018년)이 있는데, 지종은 법안종(法眼宗)의 선을 전래했다. 고려 광종이 청원계 제자인 영명연수(永明延壽, 904˜975년)의 <만선동귀집(萬善同歸集)>을 읽고 감동을 받아 36명의 승려를 송나라에 유학 보냈는데, 지종은 이때 다녀왔다. 또한 지종은 국청사(國淸寺, 절강성 천태현의 천태종 종찰)에서 천태 12조 정광존자(淨光尊者) 의적(義寂) 문하에서 <대정혜론(大定慧論)>으로 천태교학을 수학하고, 968년 천태산 전교원(傳敎院)에서 <대정혜론>과 <법화경>을 강의하며 명성을 떨쳤다. 귀국 후, 현종 때 왕사에 임명됐는데, 79세로 입적, 원공국사(圓空國師)로 추증됐다. 

희양산문 두 가지 특징

원오탑비.

희양산문 특징은 크게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 희양산문 최초의 조사는 우리나라 최초의 선 전래자인 법랑이다. 또한 법랑의 제자 신행은 북종선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년) - 보적(普寂, 651˜739년) - 지공(志空)의 법맥을 전래했으며, 도헌은 순수 한국적인 선풍을 전개했다. 도헌의 손자인 긍양은 석두계 조동종계의 법맥을 받았으며, 긍양의 손제자뻘인 지종으로부터 법안종(法眼宗)과 천태사상이 전래됐다는 점이다. 

둘째, 희양산문은 다른 산문에 비해 한국적인 토양이 깃들어 있다는 점이다. 어느 나라이든 불교는 그 나라의 민족성이나 전통과 결부지어 있어 발전된 측면이 있다. 일본불교도 민속 신앙인 신도(神道)와 떼려야 뗄 수 없다. 초기불교의 표본이라고 하는 미얀마도 민속신앙과 결부된 점이 있다. 중국은 <삼국지>에 등장하는 관우장군을, 특히 남방지방 사찰에서는 신장으로 모시며, 불교사상도 노장사상의 영향을 받았다. 중국의 선은 인도와는 다르게 중국적인 문화 토양과 결부되어 발전됐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희양산문은 선교 일치적인 융합적인 선풍에다 한국적인 문화가 결부되어 있다. 또한 민중지향적인 측면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함께 하였다는 점도 놓칠 수 없다. 

1982년 이후 희양산 봉암사는 일반인들의 출입이 통제된 곳이다. 몇 년 전 봉암사에 갔는데, 당연히 산문 앞에서 제지받았으나 원주 스님께 사정 애기를 하고 어렵게 산문에 들어갈 수 있었다. 이전에 중국의 선종 사찰을 순례할 때, 사진 촬영이 어려운 경우는 담당하는 스님에게 떼를 써가면서 찍었다. 지금은 어렵지만, 10년 전 만해도 가능했다. 봉암사 도량은 내 생에 마지막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당우 도량, 탑과 탑비, 우람한 나무들, 풀 한 포기에도 애정 어린 눈길을 보냈다.

[불교신문3402호/2018년6월23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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