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역할이 다를 뿐 가치는 차이 없어”

지난 19일 마포 불교방송 3층 법당서 열린 대한불교진흥원 화요열린강좌에서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가 강사로 나서 나무를 통해 우리 삶의 의미를 풀어냈다. 김형주 기자

대한불교진흥원이 매월 셋째 주 개최하는 화요열린강좌는 인문학자나 문화예술가를 초청해 그들의 저서 속 깊은 이야기를 듣는 자리다. 지난 19일 마포 불교방송 3층 법당서 열린 강좌에는 <나무예찬>을 펴낸 생태사학자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를 초청해 ‘나무가 안내하는 마음공부법’을 주제로 진행했다. 강 교수는 1시간30분가량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과 우리 삶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놨다.

저는 나무에 미쳐서 나무를 학문으로 연구하는 대한민국의 첫 학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기존에 조경, 생물 쪽에서 나무를 바라보는 시각과 다른, 역사학자로서, 인문학자로서 나무를 16년 연구했고 25권정도 책을 썼다. 제가 나무를 좋아하는 이유는, 나무를 만난다는 것은 일상에서 가장 쉬운 방법으로 만나서 혁명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떤 걸 즐기려면 시간, 돈이 필요하다. 나무를 제대로 만나면 가장 가까이서 쉽게 저렴하게 누릴 수 있다.

나무를 만나는 법을 제대로 알면, 극락에서 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한다고 믿는다. 제가 좋아하는 염불이 ‘나무관세음보살’이다. 아재개그로 표현했지만, 뜯어보면 철학이 있다.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는 법당을 원통전이라고 한다. 관음전이라고도 하는데, 원통은 둥글 원자를 쓰고 통할 통자를 쓴다. 대구 파계사에 원통전이 있다. 나무도 둥글다. 둥근 모양의 나무가 이 세상의 소리를 다 듣고, 사람들이 나무를 만나서 많은 지혜를 배운다. 관세음보살에게 ‘나무’ 즉 귀의하는 것처럼 나무에게도 귀의한다면 훨씬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제가 나무를 통해 드러내고자 하는 삶은 자존(自尊)이다. 자존을 했는지 여부가 삶의 가치를, 의미를 결정한다. 자존은 하늘이 부여한 자체다. 정체성이라고도 부를 수 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애초부터 청정한 존재다. 그걸 드러낼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다. <중용> 첫 구절을 보면 “하늘이 명한 것은 인간의 본성이고 천성이다. 하늘이 주고 부모의 부모가 준 것이다. 하늘에게 받은 천성대로 사는 것을 도”라고 한다. 삶의 문제는 길의 문제고 도의 문제다. 도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고 한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결국 길을 일러주는 것이다. 천성을 드러나게 해 주는 것이다. 우리가 행복한지는 타고난 능력을 드러내느냐 하는 문제다. 어쩌면 우리는 제 능력을 드러낼 줄 몰라 헤매고 있는지 모른다.

제 고등학교 학적부를 보면 아이큐 95라고 적혀 있다. 재수를 해서 계명대 사학과에 입학했다. 졸업할 때 취업이 안 되서 대학원 진학을 결정했는데 그마저도 재수를 했다. 경북대 박사과정에 들어갈 때도 오래 걸렸다. 한 번도 제 때 들어간 적이 없다. 박사학위를 받고 처자식을 먹여 살릴 수 없는, 배수진을 쳐야 하는 시간을 만났다. 아이 머리카락을 깎아 줄 돈이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무를 만나 책을 썼다. 2002년 5월에 책이 나왔다. 첫 책부터 관심을 많이 받았고, BBS에 10개월간 출연했다. 나무를 공부해서 불교와 인연을 맺었다. 제가 책을 쓸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몰랐다. 절실한 순간을 맞아 몸부림치는 과정에서 제 능력을 깨달았다. 여러분 몸속에도 무한 잠재능력이 있어, 그 종자가 빛과 물을 기다리고 있다.

인간이 태어나면서 가진 무한한 잠재능력을 어떻게 발휘할 수 있을까. 나무를 공부하기 전에는 자존이 떨어졌다. 특히 제가 수용 못하는 것 중 하나가 얼굴, 그 중에도 돌출된 이마였다. 아버지를 닮아서 이마가 튀어나왔다고 생각하니 아버지도 마음에 안 들었다. 이마를 깎아낼 수도 없고, 콤플렉스 때문에 고민했다. 해결방법은 간단했다. 수용하면 된다. 내 모습을 완전히 인정하면 변화할 수 있다. 관상책을 쓴 동료가 관상을 봐줬다. 놀라운 반전이 있었다. 저를 이 자리에 있게 한 원동력이 바로 이마에 있다는 것이다. 본인이 가장 맘에 안 들어 하는 것, 좋지 않다고 하는 것이야 말로 자신의 장점이 될 수 있다. 근데 우리는 그걸 모르고 계속 쳐낸다. 인정해도 콤플렉스는 사라지지 않는다. 그저 내 관심을 옮기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서 떠나보내면 의미가 없어진다. 한 때 저는 제 키가 작다고 생각해서 깔창을 깔기도 하고 굽 높은 신발을 신기도 했다. 나무를 하면서 제 키를 수용했다. 제 키는 크지 않다. 오로지 제 키다. 이걸 깨닫는데 40년이 걸렸다.

나무로 드러내고 싶은 건 ‘자존’
누구나 무한 잠재력 갖고 있어
자기수용 하면 삶이 편안해져

생태는 가치 아닌 평등을 다뤄
‘~보다’ 아닌 ‘~처럼’ 지향해야

자존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수용이다. 자존이 안 된 사람은 수용성이 떨어진다. 뭔가를 탓하고 비교한다. 비교하다보면 엄청난 비극이 시작된다. <장자>를 보면 이런 얘기가 있다. 발이 하나인 ‘기’라는 동물이 지네를 보고 부러워했다. 지네는 그러나 한번 외출하려면 반나절이 걸렸다. 발마다 신발을 신다보니 오래 걸린 것이다. 밖에 나와서 친구를 만났는데 뱀이 순식간에 자기 앞으로 다가오는 것을 보고 감탄했다. 발도 없이 빠른 뱀을 부러워하는데, 바람을 만났다. 순식간에 왔다가는 바람을 감탄했다. 하지만 바람은 마음(心)을 부러워했다. 이렇게 계속 상대를 부러워하면 어떻게 되나. 지네가 뱀을 부러워하면 발을 자르는 수밖에 없다. 남을 부러워하고 비교하다보면 자신이 가진 것을 놓치게 되는 것이다.

많은 분들이 식물을 대할 때도 비교한다. 봄철 기상캐스터가 하지 않아도 될 중 하나가 작년보다 올해 꽃이 일찍 피었다는 것이다. 매화한테 물어봤나. 매화는 한 번도 일찍 피거나 늦게 핀 적이 없다. 오로지 제 때 핀다. 전 45세에 교수가 됐다. 늦게 되지도, 일찍 되지도 않았다. 제 때 됐다. 제 능력대로 된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 누가 집을 사고 차를 샀다고 열을 낸다. 도움 준 것도 없는데 왜 열을 내나. 능력대로 한 것이다. 존재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하는데 아상을 갖고 굴절시킨다. 좋다 나쁘다 가치평가를 한다.

요새 텔레비전을 보면 ‘꽃보다 00’이란 프로그램이 있고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노래가 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보다’가 아니라 ‘처럼’으로 바꿔야 한다. 생명체를 두고 ‘보다’를 붙일 수 있나. 모든 생명은 절대가치를 갖고 있다.

‘잡초’란 노래가 유명한데, 세상에 잡초는 없다. 그냥 풀이다. 나무를 잡목이라고 하는데, 나무는 나무일뿐이다. ‘새타령’에는 상상의 새 봉황을 추켜세우고, 일반적인 새는 잡새라고 한다. 횟집 메뉴에는 잡어가 있다. 이게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인식이다. 생명체에 대해 어떻게 바라볼 것인지 이해해야 한다.

생태를 뜻하는 영어 ECO는 평등의 관계성을 말한다. 세상에서 일어난 갑을문제는 생태문제다. 생명체를 평등하게 보지 못하기 때문에 벌어진다. 역할의 차이지 가치에 차이가 있는 게 아니다. 대통령이나 여러분이나 역할이 다르지 가치의 차이가 있지 않다. 가치의 차이로 치환하면 많은 문제가 발생한다. 그런 생태의식이 없는 것을 생태맹(盲)이라고 한다. 우리가 선진국으로 가려면 생태맹이 사라져야 한다. 지금의 화두는 관계성을 회복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어야 한다.

대구 동화사의 동화는 오동나무 꽃을 의미한다. 오동나무에 꽃이 핀다고 하는 것은 오동나무에 봉황이 앉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오동나무를 심은 뜻은 큰 인물을 기다린다는 의미다. 동화사에 봉서루라는 누각이 있는데, 봉황이 깃든다는 뜻이다. 봉황은 대나무 열매만 먹는다. 그런데 동화사 갔다 온 사람 중에 오동나무 봤다는 사람이 드물다. 대나무도 있는데 알아차리질 못한다. 광서루 앞에 가면 암컷 황이 나은 알도 있다. 스토리를 완벽하게 재현했으나 알아차리지 못한다. 나무에도 문학적인 얘기가 많이 있고, 사찰을 순례할 때도 자연생태와 인문생태를 알아야만 제대로 볼 수 있다. 주변 산세와 잘 어우러졌는지, 어떤 나무가 사는지 봐야한다. 사찰 숲은 대한민국 자연생태역사이며, 불교사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관찰해야 한다.

관찰이 중요하다. 누군가는 평생, 1년 내내 애써서 피운 꽃을 순식간에 잘라버릴 수 있다. 길에 은행이 떨어져서 냄새난다고 싫어하지만 은행꽃 본 사람은 드물다. 저희 아버지가 90평생 느티나무 꽃을 본 적이 없다. 지천에 보이는 게 느티나무인데 꽃핀 걸 본 적이 없다. 관찰을 하지 않아서다. 나무를 관찰하다보면 어마어마한 상상력이 일어난다.

나무가 좋은 건 도망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무는 평등하다. 돈이 많은 사람, 땟거리가 없는 사람도 똑같은 모습으로 대해준다. 누구든 직접 가서 봐야한다. 멀리 가서 볼 필요도 없다. 집 앞에만 나가도 나무가 있다. 나무이름을 하나 가져보라. 제 이름은 ‘쥐똥나무’고 큰 아이는 ‘은행나무’ 작은 아이는 ‘느티’다. 나무이름을 불러주면 물아일체가 된다. 길을 걷다가 은행나무 느티나무를 보면 사진을 찍어 보내준다. 너를 만났다고. 우리나라 사람은 만나면 남을 헐뜯고 비난한다. 나무를 만나서 얘기하면 욕할 일이 없다. 선한 기운이 내 몸에 축적된다. 호연지기가 절로 느껴진다. 내 몸에 있는 의가 밖으로 드러나면 다른 사람에게 좋은 기운을 줄 수 있다. 나무를 만나러 떠나면, 그 자체가 행복하다. 만난 얘기를 다른 사람에게 해주고 들려주면 어떨까. 나무 한그루를 통해 여러분 스스로 가진 무한한 잠재력을 발휘해 극락에서 지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불교신문3403호/2018년6월27일자]

저작권자 © 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0 / 400
댓글 정렬
BEST댓글
BEST 댓글 답글과 추천수를 합산하여 자동으로 노출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수정
댓글 수정은 작성 후 1분내에만 가능합니다.
/ 400
내 댓글 모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