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리 후 익산 동북측면

백제 무왕 40년(639)에 건립된 국보11호 익산 미륵사지 석탑이 해체수리에 착수한 지 20 여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소장 김종덕)는 지난 20일 익산 미륵사지 현장에서 석탑을 공개하고, 주변정비를 끝낸 뒤 탑이 건립된 지 1380주년이 되는 해인 내년 3월12일 준공 예정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국내 문화재 수리역사상 단일 문화재 중으로 가장 오래된 수리기간을 기록하게 됐다.

미륵사지 석탑은 동아시아에서 가장 큰 석탑으로 꼽힌다. 높이 14.5m, 폭 12.5m 크기에, 부재가 1625개, 무게는 1830톤에 가깝다. 석조부재로 목탑양식을 구현했는데, 기둥과 평방이 짜맞춤 구조다. 목탑에서 보이는 기둥 안쏠림과 귀솟음도 보인다. 한국 불탑이 목탑에서 석탑으로 변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사료다. 이후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경주 감은사와 불국사 삼층석탑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백제시대 세워진 탑은 통일신라시대 지진에 영향을 받았고, 후백제 때 수리된 것으로 전해진다. 18세기경 무렵에도 7층까지 남아있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림은 남아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1910년 촬영한 사진에야 비로소 6층까지가 확인된다. 1915년 일본인 세키노 타다시가 추축이 돼 긴급보수를 진행했다. 기둥 부재를 새롭게 추가하고, 탑 외부 붕괴된 면을 콘크리트로 덧발라 흉물스런 모습으로 1990년대 후반까지 남아 있었다.

전라북도와 국립문화재연구소는 지난 20년 동안 미륵사지 석탑 해체조립, 보존처리, 학술 및 기술연구조사를 진행했다. 사업비만 약 230억 원에 달한다. 본격적인 해체는 2002년에 시작됐다. 목조로 된 비계를 석탑주변에 설치해 해체에 들어갔다. 외벽을 막았던 콘크리트를 제거하는 일은 오로지 사람이 할 수밖에 없었다. 콘크리트가 오래 돼 부식됐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여전히 단단했다. 일일이 정으로 깨고, 치과 기계를 사용해 정밀하게 제거했다. 3년간 185톤을 걷어냈을 정도의 대장정이었다.

원래 남아 있던 6층까지 보수
옛 돌 80% 재사용해 전통유지
단일문화재 중 최장수리기간
2019년 3월12일 준공식 예정

확보한 석재는 모두 3D스캐닝을 해서 형상정보를 축적했다. 탑 구조를 스캔한 결과 탑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심주석이 4° 정도 기울었음이 확인됐다. 목조건축양식을 재현했기 때문에 옥개석 모서리 부분이 높이 솟아 있는데, 석재 간격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탑이 워낙 거대해, 돌들이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기운 것이다.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심주석들을 바로 세우기 위해 1층까지 해체가 결정됐다.

그 과정에서 2009년 사리장엄구가 출토됐다. “심주 밑에 GPR탐사를 해서 사리장엄구가 묻혔는지 확인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해체과정에서 심초석 사리공에 사리장엄구가 발견됐다. 심초석과 두 번째 심주석 사이에는 회를 발라 봉해있었고, 중심에는 백제시대 때 그은 먹선이 그대로 살아 있었다.” 

배병선 미륵사지석탑보수정비단장은 백제시대 불교미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동시에 고대사를 뒤바꿀만한 사료를 제공한 미륵사지석탑 사리장엄구 당시를 이렇게 설명했다. 한 변이 25cm, 깊이 26.5cm 크기의 사리공 안에서 유물 1만 점이 수습됐다. 백제 사택왕후의 보시로 639년 탑이 봉안됐음을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와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등은 지난 4월 보물로 지정예고되기도 했다.

미륵사지석탑 기단 아래 땅도 일부 절개해 조사했다. 탑을 세우기 전 땅을 파내 돌과 흙을 켜켜이 쌓아 기초를 단단히 다진 게 확인됐다. 대형석탑을 조성하기에 단단하게 땅을 다져 안전을 확보하려 했던 백제 장인들의 기술력이 드러났던 순간이다.

미륵사지 석탑 해체 후 가장 큰 문제는 어디까지 쌓을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동탑처럼 완전하게 세우려고 해도 근거가 없었다. 자료라고는 세키노 타다시가 촬영한 1910년대 사진이 유일했기 때문이다. 남아 있는 부재로만 쌓을 수 있는 탑 높이는 한정돼 있고, 옛 돌들이 무게를 견뎌낼지 의문이었다. 

새 돌을 깎아 쓰자니 부재 재사용률이 40%에 불과해 백제탑이라 부를 수 없을 것 같았다. 7층 이상은 어떤 모양이었는지, 상륜부는 어땠는지 확인할 길도 없었다. 추정만으로 탑을 세울 수 없다고 결론이 모아졌다. 기존 6층까지만 보수하고 탑의 안전성을 높이기 위해 석재들을 보강하기로 했다.

부재마다 풍화정도를 등급으로 매겨서 교체하거나 다시 붙이거나 새로 만들어 끼워 넣었다. 부재 재사용률을 80%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다양한 기술을 모색했다. 부서진 돌들이 하중을 견뎌낼 수 있는 접합기술을 적용해, 티타늄봉을 사이에 넣고 붙였다. 보통 석탑에서 화강암 부재 사이를 매우기 위해 흙을 넣는데, 미륵사지석탑에서는 산화마그네슘 모래 등을 사용한 무기질재료를 넣어 유실되지 않고 화강암 부재들이 맞물려 무게를 버틸 수 있게 했다.

본격적인 탑 쌓기는 2015년에야 비로소 이뤄졌다. 심초석 사리공에는 기존에 출토된 사리장엄구를 복제해 사리와 함께 다시 봉안했다. 2층까지 옥개석을 재현하고, 나머지는 층을 드러낼 수 있는 정도로 부재를 쌓았다. 지난 20년간 미륵사지 현장을 지켜온 김현용 국립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는 미륵사지 석탑 수리가 완료된 것을 지켜보며 남다른 소감을 전했다. 

“보수공사를 왜 이렇게 오래하냐고 현장에 와 욕을 하는 시민도 있었고, 열악한 환경에 힘들어하던 연구자들이 떠나고 건축전공자는 저 혼자라 힘들 때도 있었다”며 “각 분야 전문가들이 오랜 시간 숙고하고 고생한 끝에 완성한 만큼 수백년 아니 1000년은 거뜬히 서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주 불국사 다보탑, 경주 감은사지 삼층석탑 해체보수를 주도했던 배병선 단장도 자부심이 대단했다. “체계적인 학술조사와 해체수리과정을 충실히 이행한 석조문화재 수리의 선도적 사례”라며 “원래 부재를 최대한 재사용해 문화재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과학적인 연구를 통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최종덕 국립문화재연구소장은 “추정에 의한 복원을 지양하고 6층까지만 복원했다”며 “그 과정에서 5건 특허를 획득해, 문화재 기술사적으로 한 획을 그었다”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한편 국립문화재연구소는 6월까지만 탑을 일반에게 공개한다. 12월까지 가설시설을 철거하고, 2019년 1월에는 국제학술심포지엄도 개최한다.

새롭게 수리된 익산 미륵사지 석탑의 모습. 상층 기단 위를 덮은 돌은 이번에 새롭게 보강된 부재들이다. 문화재연구소는 석탑 안으로 빗물이 들어가는 것을 막기 위해 유실됐던 상층기단 갑석 전체를 새로 만들어 쌓았다. 하층 기단 갑석도 절반은 이번에 새로 조성됐다.
일제강점기 때 시멘트를 부어 보강했던 남측면의 모습. 석재를 쌓아서 마무리했다.
미륵사지석탑은 석재를 활용해 목탑양식으로 조성됐다.
1910년 촬영한 미륵사지 석탑
1910년대 촬영한 서측면
수리전 동측면
수리 후 남측면

[불교신문3304호/2018년6월2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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