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 여름호 기획 다뤄 불교사상 신앙 및 제도 검토

숭유억불로 대변되는 조선시대, 정치이념과 시대사조가 유교로 전환되던 이 시기 불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앞서 3차례에 걸쳐 ‘조선 건국 다시 보기’ 기획을 통해 조선 건국기 쟁점을 다루고 있는 계간지 <역사비평>이 최근 발간한 여름호에서 불교를 화두로 삼았다. ‘불교, 유불교체의 파고를 넘다’를 주제로 이 시기 불교의 사상과 신앙, 제도가 어떻게 연속되고 있는지 집중 조명했다.

이번 호에는 기존의 통념과 다른 ‘승단’의 사회적 실체에 접근하면서 불교정책의 연속성을 고찰한 양혜원 서울대 강사의 논문이 주목된다. <태조실록>에 따르면, 태조 즉위 사흘째인 1392년 7월20일, 사헌부가 급히 개혁해야 할 열 가지를 건의했는데 그 중 하나가 승니(僧尼)를 물리치라는 내용이었다. 

여기서 승니는 비구, 비구니 스님들로, 저자는 “흔히들 승려라고 하는데 이는 우리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용어가 아니라 일본식 용어”라며 “조선왕조실록에 3차례 정도 등장하는 승려의 용례는 모두 일본에서 올린 글을 인용한 것들”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출가자 혹은 출가자 무리로 승 또는 승도(僧徒)를 사용해 왔음을 토대로 조선시대 승에 대해 고찰했다.

그렇다면 개국 3일차에 왜 사헌부는 승니를 물리쳐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저자는 “조선시대 승은 억압과 천대를 받는 소수의 존재로 이해되는 경우가 많으나 이는 숭유억불의 조선이란 통설에 기댄 추정에 가깝다”고 말했다. 실상을 보면 조선초 스님의 수는 “민의 3할”에 달했다고 한다. 성종 대까지도 50~60만 혹은 40만은 될 것으로 추정할 정도로 스님은 많았다. 

출세간 법을 따르는 스님의 숫자가 많아지면서, 나라에서는 세간의 법으로 승도를 통제하려는 시도를 한다. 바로 도승제를 두고 도첩을 줘 스님을 관리하려고 했던 것이다. 도첩은 16세기 후반 명종 대까지 150여 년에 운영된다. 스님은 군역과 같은 세속적 의무와 무관한 존재였음을 위정자들도 인지한 상태에서 도첩이 발급됐다는 의미는 도첩이 없는 스님도 있음을 의미한다.

조선왕조가 첫 번째 간행한 법전인 <경제육전>을 보면, “양반 자제 중에 스스로 승이 되기를 원하고-부모나 친족의 허락을 얻어 승록사에 신고하면-예조에 보고해 왕의 허락을 얻고-정전 오승포 백필을 납부하면-도첩을 춰 출가를 허용”했다고 한다. 여기서 핵심은 도승 대상을 양반 자제로 한정한 것이다. 환속하는 규정도 있는데, 환속하면 초입사례를 면제해주고, 지냈던 승직에 준해 관리로 서용하도록 하는 조문도 있다.

양혜원 박사는 “상대적으로 높은 신분과 경제력 등이 복합적으로 결합된 도승제와 승직 선발, 환속자 등에 대한 규정들은 우리가 상상하듯 천대받는 조선 후기 승의 이미지와 매우 다르다”며 고려적 분위기의 연장선상으로 봤다. 또 “사상교체의 결과로 불교를 억압했다기보다 현실의 압도적인 문제적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강력한 정치사상적 명분이 필요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이밖에도 김용태 동국대 불교학술원 HK교수는 사상과 신앙에 대해, 박광연 동국대 불교문화연구원HK연구교수는 불교정책과 종단운영 측면에서 살펴봤다. 손성필 한국고전번역원 선임연구원은 15세기 서적 간행을 재검토해 유교화를 합리화라고 이해하는 기존 관행을 비판하면서, 불교 제도와 전통의 연속성이라는 측면을 강조했다.

[불교신문3401호/2018년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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