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마지막 공주가 새겼을까?

제천 덕주사 마애불

제천 덕주사는 신라 진평왕 대에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사찰을 창건한 덕주부인의 이름을 따서 덕주사라고 이름지었다고 기록돼 있다. 일설에는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딸인 덕주공주가 창건했다고 한다. 경순왕이 고려에 항복하기로 결정한 것에 반대해 금강산으로 향하던 덕주공주와 마의태자가 제천을 지나다 사찰을 창건하고 마애불을 새겼다는 것이다. 태자는 금강산에 들어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며 살았고, 공주는 절에서 살며 태자를 그리워했다고 전한다.

덕주사에 대한 가장 이른 기록은 고려시대 수좌(首座)를 지낸 관오(觀奧, 1096~1158)스님의 묘지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수좌는 국사나 왕사가 될 수 있는 스님으로, 고려 교종 스님들이 받을 수 있는 가장 높은 법계다. 관오스님은 고려 중기 때 법상종을 대표하는 스님 중 한 명으로, 예종, 인종, 의종 세 임금으로부터 인정받았다. 특히 스님은 안성에 바라밀사를 창건한 뒤 왕으로부터 십육나한상을 시주받아 법당에 봉안했다. 묘지명에는 스님이 왕의 후원에 감사하며 “원당(願堂)인 충주(忠州) 덕주사(德周寺)의 산승(山僧)을 소집해 축성도량(祝聖道場)을 상설했다. 주지로 있던 사찰과 현화사(玄化寺), 안성원(安性院), 머무르던 사찰의 법당에서 친히 제자들을 거느리고, 아침저녁으로 향을 사르며 정성껏 법회를 열고 불공을 올려 임금을 축복했다”고 전해진다. 덕주사가 고려 중기 왕을 축복하는 원당이었음을 알 수 있다. 1206년 제작된 덕주사 금고에는 상(上)덕주사라는 기록이 있어, 고려 후기 덕주사가 상하로 구분되는 대찰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현재 덕주사는 6.25전쟁 당시 국군에 의해 소각된 뒤 새롭게 불사한 도량이다.

보물 406호 덕주사 마애불은 마의태자에 얽힌 설화와 달리 고려 전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체 높이가 13m에 달하는 마애대불인데, 관촉사나 대조사 보살상처럼 괴체적이다. 소발에 육계가 솟아 있고 좁은 이마 중앙에는 백호가 새겨져 있다. 얼굴은 망형에 가까운데 이목구비가 크고 뚜렷하다. 눈은 가늘고 옆으로 길게 트였으며, 코는 넓고 두툼하다. 입술과 턱 사이 간격이 넓은데, 바위에 난 금이 턱주름처럼 보인다. 불두가 새겨진 바위가 도드라져 있고, 몸체는 안쪽을 더 깎은 뒤 선으로 새겨 입체감을 더했다. 얼굴과 어깨가 붙어 있다시피 해 목은 거의 표현되지 않았고, 목걸이처럼 삼도를 새겼다. 손은 가양 손은 가슴까지 올렸는데 오른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왼손은 손등을 바깥으로 향한 채 살짝 구부렸다. 수인이 아미타 구품인을 연상시킨다.

양쪽 어깨를 덮은 법의 주름은 형식적이다. 어깨에서 다리까지 흘러내리는 옷 주름은 직선에 가깝고 허리와 무릎 부근까지 법의 앞자락은 타원형 주름을 새겼다. 연화대좌를 밟고 선 양발은 좌우로 넓게 벌린 형태인데, 발가락이 길고 투박하다. 불상의 양쪽 어깨 위부분에는 보호각을 세웠던 흔적이 남아 있다.

마애불은 11~12세기 조성됐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불두를 제외한 신체가 비율이나 입체감을 주는 대신 한 덩어리처럼 표현된 모습이 고려 전중기 때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불교신문3401호/2018년6월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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