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대장경판 마치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아…”

 

고려 대표유물 해인사 대장경
스님들 지금껏 보존전승 힘써

대장도감, 판각장소 모두 남해
목재조달 인원, 자금조달 용이 
대장경판수 논란도 그만둬야
국간판전 수량 확인하면 해결

디지털시대 아카이브 역할 기대

금년 말에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고려건국 1100주년 기념 특별전 ‘대고려전’이 기획되어 추진 중이라고 한다. 고려시대 이 민족이 걸어온 역사와 문화를 조명하고 선조들이 남긴 민족의 예지가 번뜩이는 역사적인 유물과 예술품이 등장하는, 그야말로 특별한 전시회가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세계무대를 향해 진취적으로 나아가는 이 시점에, 고려대장경판을 비롯한 선조들 이 창출한 뛰어난 문화유산을 한자리에서 친견할 수 있다는 것은 온 국민에게 크나큰 복이다. 고려시대는 다른 문화유산도 많지만, 대표적인 것이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이다. 이 대장경판은 몽고의 침입으로 초조대장경이 불타버리자 강화도로 천도하여 대몽항쟁을 할 때 새겨낸 국난 극복의 상징물이기도 하다. 해인사 대장경판은 단순한 종교의 산물이 아니라 우리 민족의 신령스럽고 기묘한 지혜가 빚어 낸 문화유산이다. 그리고 이 대장경판은 고려시대 왜구의 침입과 조선시대 해인사에서 7차례나 발생한 대화재에도 용케 살아남았는데, 이는 민족의 명운을 이어주는 신앙의 힘과 우주만물의 모든 기운이 대장경판을 외호하였고 해인사 스님들의 노력으로 보존·전승에 힘써왔기 때문이다. 

이번 특별전을 계기로 이 대장경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조성됐는지 살펴보는 것은, 온 국민에게 고려시대 우리 민족을 지켜준 고려대장경판에 대한 진면목을 바로 알리고자 함이다. 

이 대장경판은 1233년부터 4년 동안 수기스님 등에 의해서 초조대장경, 개보판대장경, 거란판대장경과 내용을 대교(對校)해 오류를 바로잡았다. 한편, 산에서 나무 벌채와 판각용 목판을 준비해 1237년 <대반야경>(600권)부터 시작해 1247년 <일체경음의>까지 대부분의 경판을 모두 새겼고, 1248년에는 <대장목록>을 마지막으로 새겨 대장경 판각작업을 모두 마무리했다. 

대장경의 판각 장소는 남해이고 대장경판각을 주도한 대장도감은 남해에 설치됐다. 그동안 강화도에 대장도감이 설치되고 남해 등에 분사가 설치된 것처럼 잘못 알려졌다. 당시 강화도는 고려정부의 피난시절이기 때문에 대장경을 판각할 형편이 아니었다. 반면 남해는 목재조달과 인력 동원 및 자금 조달이 용이한 곳으로 대장경을 판각할 수 있는 유일한 장소였다. 우선 몽고침입이 미치지 못하는 섬이고 지리산이 가까워 목재 조달이 용이했다. 당시 대장경 판각을 주도한 최고 권력자인 최우의 식읍지가 남해의 이웃 고을인 진양이고 그의 처남 정안이 하동 토호였기 때문이다. 

해인사 수다라장에 보관돼 있는 경판.

대장경판은 모두 대장도감에서 판각되었다. 모든 대장경판은 ‘대장도감 봉칙조조’라고 표시되어 있다. 대장도감에서 칙명을 받아 간행했다는 표시이다. 그동안 대장도감에 분사가 여러 곳에 있었다고 잘못 알려져 왔다. 간기(刊記)에 보이는 분사(分司)는 대장도감 분사가 아닌 고려국 분사였다. ‘대장도감 분사’는 한곳도 없었고, ‘고려국 대장도감 분사 봉칙조조’라는 판은 한 장도 없다. 남해에는 ‘대장도감’ 분사가 아니고 ‘고려국’ 분사인 대장도감이 설치됐던 곳이다. 유일하게 남해가 들어가 있는 간기가 있는데, ‘정미세 고려국 분사 남해 대장도감 개판(丁未歲 高麗國 分司 南海 大藏都監 開板)’이라고 되어 있다. 대장경판 판각을 위해서 남해에 대장도감을 설치하고 대장도감 운영과 지원을 위해 고려국의 분사가 남해에 설치었던 것이다. 대장도감은 대장경판을 새기고 보존 관리하는 곳이다. 

고려대장경판은 전체 6570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분사가 표시된 판은 500권 밖 에 없다. 그런데 이마저도 470권이나 ‘대장도감’을 파내고 ‘분사대장도감’으로 고친 후에 상감수법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나머지 30권만이 처음부터 ‘고려국 분사 대장도감’이라고 새겨져 있다. 당시 남해의 고려국 분사는 대장도감이 대장경 판각작업을 원활히 할 수 있도록 설치한 기관이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대장경판 판각을 완료한 이후에 남해에 고려국 분사가 설치됐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500권에 상감수법으로 분사를 새겨 넣었던 것이다. 대장도감은 대장경 판각에서 보존·관리까지 대장경에 대한 모든 일을 전담하는 기구였기에 대장도감은 대장경판과 함께 강화도로 이전됐다. 분사 표시는 남해에서 대장경을 판각한 기념으로 표시한 것이다. 대장경판 간기에 보이는 ‘분사’는 대장도감의 부속기관이 아니다.

‘왜구가 강화도를 노략질하다. 왜구가 강화를 노략질하고, 선원사(禪源寺)와 용장사(龍藏寺) 두 절에 들어가서 300여 인을 죽이고 쌀 4만여 석을 약탈하였다’는 기사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권 29) 공민왕 9년(1360) 윤5월조에 실려 있다. 그리고 <고려사절요>의 그 다음에 나오는 기사에 ‘왜구가 교동현(喬桐縣)을 불태우다’라는 내용이 등장한다. 이는 <고려사> 권39 공민왕 9년 윤5월 18일에도 동일한 내용의 기사를 볼 수 있어 왜구의 약탈과 방화는 이보다 훨씬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왜구가 강화도를 마음대로 유린하여 초토화시켰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선원사는 고려말기인 1360년 왜적의 침입을 받아 불타버렸던 곳이었고, 최근세까지 폐허로 남아 있었다. 당시 선원사의 바로 앞에는 육지와 연결해주는 강화도의 포구였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 태조 7년(1398) 5월 병진(10)일에 ‘강화 선원사에서 옮겨온 대장경을 보러 용산강에 행차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 이 기사를 본 사람들은 선원사는 최우가 창건한 사찰이고 대장경판각 역시 최우가 주도했기 때문에 고려대장경판은 최우에 의해서 선원사에서 새겨 보관하다가 옮겨온 것이라 추정했다. 그러나 대장경판은 강화성 서문 밖에 있던 대장경판당에서 이곳 선원사 포구를 출발해 용산으로 왔던 것이다. 선원사는 처음부터 대장경 판각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사찰이었다. 그런데 계속 잘못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분사 대장도감봉(分司大藏都監奉)’을 상감으로 끼워 넣은 <본사경>. 대장경 6570 권 중 분사판은 500권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470권은 전부 상감수법으로 간기를 다시 끼워넣은 것이다. 

해인사 대장경판전에는 국간판전과 사간판전이 있다. 국간판전에는 대장목록에 수록된 대장경판 1496종 6570권 7만8600장을 비롯하여 1503년 간행의 <예념미타도량참법(禮念彌陀道場懺法)> 등 보유판 15종 2739장, 그리고 1865년의 보유판 목록과 19세기에 새기거나 이 당시 봉은사 등에서 판각하여 옮겨 보관하고 있는 11종 1019장이 함께 보관되어 있다. 그리고 동서에 위치한 사간판전에는 1098년 화엄경 45권 간기판 등 사간판(寺刊板) 147종 4938장을 보관하고 있다. 

대장경판에 포함시키고자 하는 보유판 15종은 권수제(卷首題) 아래에 함차(函次)번호도 없고 마구리에도 아무런 표시가 없었던 것이었다. 그리하여 1865년 해명장웅(海冥壯雄)이라는 스님이 대장경 2부를 인출할 때 후세 사람들이 정리하기 쉽도록 보유판 마구리에 함차를 새로 새기고 목록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오히려 화근이 되었다. 최근에 대장경판에 보유판을 포함시켜야 된다는 학자도 등장했다. 대장경판에 1503년 사찰판 등도 넓은 의미에서 대장경이라고 생각하여 포함시키고 싶다는 것이다. 의천의 교장을 속장경이라고 불렀던 오류와 마찬가지로 학계에 많은 혼란을 끼치고 있다. 

10여년 전에는 해인사 사간판전에 <대방광불화엄경소(大方廣佛華嚴經疏)>라는 판의 권말에 ‘신축 5월일 가야산 하거사 조조(辛丑 五月日 伽倻山 下鋸寺雕造)’라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보고 가야산 해인사 일원에서도 대장경판을 간행했다는 기사가 보도된 적이 있다. 이런 식으로 가끔씩 각종의 학설이 나무하고 있다. <대방광불화엄경소>는 대장경에 포함되는 경전이 아니다. 

 '갑진세 고려국 대장도감 봉칙조조' 중 '대장도감' 부분을 파내고 작은 글씨로 '분사대장도(分司大藏都)'를 새겨 파낸 자리에 상감으로 거꾸로 끼워넣었다. 박 원장은 500권에 불과한 분사판을 새기기 위해 분사를 여러 곳에 설치했다는 말은 맞지 않다고 주장한다.

해인사에 봉안돼 있는 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가장 정확하고 완벽한 대장경판으로, 현재도 인쇄가 가능한 문화재다. 고려대장경판에 대해 추사 김정희는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마치 신선이 내려와 쓴 것 같다고 했다. 글씨도 그렇지만 다른 나라의 대장경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잘 새긴 대단한 수준의 판각예술품이다. 이들은 산벚나무, 돌배나무, 거제수 나무 등에 새겨져 소장돼 있다. 해인사 고려대장경판의 고판본(古版本)은 거의 대부분 일본에 소장돼 있으며, 일본의 신수대정대장경 등 중국과 대만에서 신활자로 간행된 6종의 대장경이 모두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사용했다는 것은 대단한 것이다. 고려대장경판이 불교경전의 원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는 세계에서 가장 훌륭한 대장경판을 만든 문화선진국이었고, 세계 최초로 금속 활자를 사용했고 인쇄했던 나라이다. 

고려대장경판은 해인사의 노력으로 문화유산 보존 전승이나 신앙면에서는 성공했지만, 자료 활용면에서는 갈 길이 멀다. 고려건국 1100주년 특별전 ‘대고려展’이 고려대장경판이 지니는 한계를 극복하고 활용 가능한 디지털시대의 아카이브로서 역할을 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불교신문3401호/2018년6월20일자] 

박상국 한국문화유산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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