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현관문을 열면 커다란 목련이 한 그루 있다. 그늘에 가려진 탓으로 매년 이 나무는 양지의 목련들보다 꽃이 늦다. 다른 꽃들이 다 떨어질 때에야 겨우 하얀 고추 같은 봉오리를 드러낸다. 어제 그 꽃잎마저 다 떨어진 걸 알았다. 꽃이 피는지 지는지도 모른 채 두어 달 분주하게 살았다. 지난 밤, 현관문을 열고 서서 꽃잎이 무심히 떨어진 자리를 마주하고선 봄은 왜 가느냐고, 너는 왜 떨어졌느냐고, 이유를 물었다. 

“…선배, 나는 사람들과 쉽게 안녕하고 헤어졌으면 좋겠어요. 사람 사이 헤어질 수 있잖아요. 당신이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러저러해서. 잘 사세요. 안녕…. 나는요…, 선배의 모습에서 자꾸 내 모습을 봐요.” 어느 날 시를 쓰는 후배의 메일을 받은 후부터다. 그래서였을 거다. 문장 사이마다 찍어놓은 무수한 말줄임표 사이에서 나는 삶속에 마주하는 수많은 ‘안녕’에 관해 생각했다. 

꽃잎이 떨어지고 그 자리에 연한 초록의 잎이 돋아난 것을 보면서 녀석의 말이 맞다고 생각했다. 그래, 어쩌면 우리는 그래야했는지도 모른다. 좀 더 가볍게 “안녕!”하고 헤어져야 하는 것, 그것 말이다. 우리가 좀 더 가볍게 ‘안녕’을 했다면, ‘안녕’하지 않고 어색한 관계보다 산뜻해 질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 

사람은 살면서 많은 이별을 경험한다. 그리고 온전히 그 무게를 감당하며 살아간다. 스쳐가는 많은 사람과 만나 이별하고, 세상을 떠도는 어제의 무수한 햇살과 바람과 이야기들과 이별한다. 그리고 서서히 제 청춘 젊음과도 이별한다. 어쩌면 삶은 끊임없이 헤어지고 놓아야만 하는 연습이었다는 것을 목련이 진 자리에서 생각했다. 

이 땅을 떠나는 마지막 날, 가장 큰 이별을 준비하기 위해 더 많이 연습하고 있는 거라고 나는 그 밤 일기장 구석에 적어 넣었다. 제대로 연습하지 않았을 때 나는 더 살아야한다고 울지 않겠는가. 결국 삶에 연결된 모든 끈을 놓지 않는 것은 욕심이다. 무서운 건 그 지점에서 집착의 싹이 튼다는 점이다.

마침내는 멈추고 ‘안녕’을 고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를 놓치면 안 된다. 돈에 ‘안녕’을 고해야 할 때 하지 못하면 돈의 노예가 되고, 명예와 높은 자리에 ‘안녕’을 하지 못하면 위선이 따르고, 인연이 다한 이에게 제대로 ‘안녕’ 하지 못하면 결국 그 사랑은 파국에 이른다. 집착은 결코 이별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를 떠나는 많은 것과 좀 더 자주, 좀 더 가볍게 작별을 고해야겠다. 굳이 ‘안녕’의 이유를 물을 필요는 없다. 

[불교신문3401호/2018년6월20일자] 

전은숙 동화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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