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명주옷·솜옷 입지 않고 ‘두타행’ 일관

 

학문으로 경전탐독하는 이에
늘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하고
禪수행자엔 공부하도록 조력 

내외경계 모든 번뇌 조복받고
6바라밀 실천…‘뛰어난 면모’

토속신앙 불교적으로 해석해
유교 도교 융합…한국禪 추구
민중지향적인 보살행 드러나 

경북 문경 희양산 봉암사 산문.

봉암사는 1982년 조계종 총무원에서 조계종 특별선원, 1984년 종립선원으로 지정한 사찰이다. 이 봉암사는 역대 청담, 성철, 자운, 향곡, 법전스님 등 30여 명의 스님들이 의기투합해 함께 정진하고 철저히 계율을 지키며, ‘부처님 법대로 살자’는 취지의 결사가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1970년대 이후 향곡스님을 조실로 모셨고, 1980년대 서암스님이 정식으로 태고선원 조실로 모셔지면서 수많은 납자들의 수행요람으로 발돋움했다. 이후 범룡, 진제스님 등 대선사들이 조실로 추대돼 한국불교 선(禪)의 정점을 이루는 곳이라고 하면 맞을 듯하다. 조계종의 자존심과 긍지가 서린 곳이다. 

 희양산문 개산조 법맥

7세기 최초로 신라에 선(禪)을 전한 승려는 법랑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선 전래자 법랑(法朗)은 4조 도신(四祖 道信, 580˜651년)의 법을 받았다. 이어서 제자로 신행(神行, 704˜779년)은 북종선(北宗禪)을 신라에 전했다. 다시 신행의 문하에서 준범(遵範)이 나오고, 준범은 혜은(惠隱)에게 법을 전했으며, 다시 도헌(道憲)으로 이어졌다. 이 산문이 바로 희양산문이다. 

‘지증대사적조탑비(智證大師寂照塔碑)’에 의하면, 희양산문의 개산조 지증 도헌(智證 道憲, 824˜882년)은 일찍이 출가해 부석사 화엄종의 범체(梵體) 대덕에게 화엄을 배우고,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혜은에게서 선(禪)을 배웠다. 법맥을 보면, 도신-법랑-신행-준범-혜은-도헌-양부-긍양 등으로 이어진다. 

그런데 희양산문의 법맥에 있어 기록에 약간 차이가 있다. 긍양의 비문(靜眞國師碑, 도헌의 손제자)에 의하면, 마조(馬祖)의 제자인 창주 신감으로부터 법을 받은 혜소(쌍계산문 眞鑑慧昭, 774〜850년)가 신라에 귀국해 도헌에게 법을 전했고, 도헌이 양부에게, 양부가 긍양에게 법을 전했다. 즉 마조-신감-혜소-도헌-양부-긍양으로 법맥이 이어진다. 법맥이 뒤바뀐 상황이다. 왜 법맥에 있어서 두 비문이 차이가 나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희양산문을 중흥시킨 긍양이 활동하고 입적하던 당시는 조사선 마조계 선풍이 풍미하던 때다. 도헌의 법맥을 마조계로 편입시킴으로써 희양산문을 ‘조사선의 정통적인 법맥으로 연결시키고자 했던 시대적인 요청이 아니었을까’로 추측해본다. 필자는 전자를 따르기로 한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도헌이 희양산문의 개산조인 것만은 분명하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

도헌은 속성이 김 씨로 경주 사람이요, 자(字)가 지선(智詵)이다. ‘도헌’보다는 ‘지선’을 써서 희양산문을 ‘지선문’을 이라고 칭하는 학자도 있다. 도헌의 어머니 꿈에 거인이 와서 “나는 승견불(勝見佛) 시대의 승려인데, 자주 분심(忿心)을 일으켜 그 과보로 용(龍)이 되었다. 그런데 이제 과보도 끝나서 사람으로 태어나 다시 승려가 되기를 원한다. 그러니 나를 받아 달라”는 간청의 태몽 꿈을 꾸었다. 모친은 태몽을 꾸고, 400일 만인 824년 부처님오신날에 태어났다. 아기는 태어난 지 며칠 밤이 지나도록 젖을 먹지 않고 젖을 먹이려고 하면, 더 크게 울었다. 하루는 홀연히 한 도인이 지나다 모친에게 ‘가능한 비린 것이나 마늘, 파 등을 먹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가 그 말대로 하니 아이는 아무런 탈이 없이 자랐다.

도헌이 9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출가하기를 간청했으나 허락하지 않아 몰래 부석사로 출가해 범체 대덕의 제자가 되었다. 도헌은 어느 날 모친이 병이 났다는 소식을 접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모친의 병이 낫자, 이번에는 도헌이 중병에 걸렸다. 모친은 아들의 재출가를 부처님께 발원함으로써 선사의 병이 낫는 이변이 발생했다. 도헌은 다시 출가해 경의(瓊儀)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이후 열심히 정진해 혜은 선사의 선법을 받았다. 

도헌은 경문왕 4년(864년)에 경문왕의 여동생 단의장(端儀長) 옹주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를 보시해 그곳에 잠시 상주, 자신을 승적에 넣어준 고한찬(故韓粲) 김억훈(金熏)을 위해서 장육현금상(丈六玄金像)을 만들기도 했다. 경문왕 7년(867년)에는 단의장 옹주가 다시 안락사에 농장과 노비의 문서를 보내주고, 도헌도 자신의 가산을 정리해 안락사에 보시해 사찰을 크게 일으켰다. 이후 심충(沈忠)이 희양산의 봉암용곡(鳳巖龍谷)을 보시하자, 도헌은 헌강왕 7년(881년) 봉암사를 짓고, 산문을 개산(開山)했다. 헌강왕은 선사에게 산에서 나와 줄 것을 요청해 선원사(禪院寺)에 머물게 한 뒤, 월지궁(月池宮)으로 초빙해 법의 심요(心要)를 들었다. 선사는 다시 봉암사로 돌아와 머물다가 882년 세속 나이 59세, 법랍 43년에 입적했다.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비.

도헌은 젊은 시절, 어느 나무꾼으로부터 “먼저 깨달은 사람이 뒤의 후배를 깨우치도록 해야 하건만 어찌 허깨비 같은 몸뚱이를 아끼려고 하느냐?”는 힐난을 듣고, 배움을 받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누구에게나 진리를 전했다고 한다. 또한 학문으로 경전을 탐독하는 사람에게는 늘 자신을 돌아보도록 권했으며, 선(禪)을 하는 사람에게는 적극적으로 공부하도록 밀어주었다. 

최치원은 비문에서 도헌의 일생에 대해 “그의 행적은 너무 많으나 다 서술할 수 없다. 다만 여섯 가지 신이한 행적(六異)과 여섯 가지 옳은 행적(六是)이 있다”는 식의 서술형태를 띠고 있다. 여섯 가지 신통스런 행적을 보자. 첫째 모친이 임신하고 400여 일 동안 부처님께 기도하고 꿈속에 계명을 받고 탄생한 것, 둘째 산모가 무탈하고, 모친이 아기를 신중하게 포육한 일, 셋째 9세 때 부친상을 당하고 편모슬하에서 출가를 서원해 무상진리를 깨닫고자 한 것이다. 넷째는 17세에 구족계를 받은 후 일체중생이 육도만행을 닦아 나가되 항상 배고픈 자는 배부르게 하고, 술에 취해 넘어진 사람이 깨우치도록 권장한 것, 다섯째 고행을 극복하는 정진 자세와 철저한 지계 정신, 여섯째 선사가 거역하는 일을 하면 화를 만나고, 훌륭한 일을 하면 반드시 상서로운 일이 발생하는 일 등이다. 이같은 이적(異蹟)의 진위여부를 떠나 신이한 행적을 탑비에 기록했다는 점을 볼 때, 도헌의 사상이 당시 신라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음을 추론해볼 수 있다. 

선사는 평생 명주옷이나 솜옷을 입지 않았고, 두타행으로 일관했다. 또한 생김새가 우람하고 건장했으며 말소리가 크고 맑아 ‘위엄이 있으면서도 자비스런 면모를 갖춘 인물’로 평가받았다. 헌강왕(875˜885년 재위)은 ‘지증(智證)’이라는 시호를 내렸으며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렸다. 지증대사적조탑비(四山碑銘 중 하나)의 문장은 고운 최치원이 기록하고, 83세 고령의 분황사 승려 혜강(慧江)이 새겼다. 2009년 보물에서 국보 제315호로 승격 지정됐다.   

지증도헌선사의 사상 

‘긍양의 스승’ 양부선사가 상주했던 충남 공주의 서혈원. 사진=문화콘덴츠닷컴

첫째, 당시 구산선문 가운데 여덟 산문의 개조(開祖)가 모두 입당하여 법을 받아왔으나 도헌만은 당나라에 들어가지 않고 오롯이 신라 땅에서 공부해 산문을 열었다. 마치 원효대사가 입당하지 않고 신라 땅에서 공부해 해탈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본다. 도헌이 수행하던 당시, 신라도 한국적인 조사선의 선풍이 크게 진작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기두 선생의 말씀을 빌리자면, ‘선사는 경계에 부동(不動)하는 일심(一心)의 능력이 있어 육마(六魔)를 항복시키고, 밖으로 육폐(六弊)를 제거하며 육도만행(六度萬行)을 실천하고, 좌증육통(坐證六通)하는 인물’이라며 선사를 추켜세운다. 곧 도헌은 내외 경계의 모든 번뇌를 조복 받고, 6바라밀을 실천하였으며, 6신통을 투득할 정도로 선사로서의 뛰어난 면모를 갖추었음을 묘사하고 있다. 

둘째, 도헌은 한국적인 선을 구축했다. 민간 토속신앙을 불교적으로 해석하고 유교, 도교와 관계를 지으며 불교와 융합을 꾀하였다는 점이다. 곧 도헌은 한국적인 토양이 깃든 선을 지향했다는 점이다. 도헌은 희양산 중복(中服) 봉암용곡(鳳岩龍谷)에 선궁(禪宮)을 만들 구상을 하였다. 토속신앙에 산신을 활용하고 있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런 정황으로 볼 때, 희양산문은 순수한 조사선 선풍이 진작되지 않았을 것으로 사료되며, 학자에 따라 도헌의 선이 수행 차원에서 정통성이 결여됐다고 보는 경향도 없지 않다. 하지만 한국적인 선풍을 전개하고자 분투했던 그의 사상은 한국선의 한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 도헌의 민중지향적인 보살행이 드러나 있다. 원래 희양산은 호족의 착취로 산속에 숨어 들어간 유망민(도적)들의 소굴이었다. 선사는 그들을 잘 교화하여 좋은 길로 인도해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선사는 왕의 초청으로 궁궐에 갈 때도 왕이 하사한 가마를 절대 타지 않았고, 말이나 소를 타지 않았다. 

최치원은 도헌의 입적에 ‘오호라! 별은 하늘로 돌아갔고, 달은 큰 바다에 빠졌다(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며, 선사를 높이 칭송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대로 도헌은 인간적인 면모와 선사로서의 수행력을 모두 갖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교신문3400호/2018년6월16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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