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때 이미 무념경계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무상검’을 터득해, 최고수의 검술이라는 ‘신묘검’ 경지까지 이른 양익스님은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할 만큼 문무(文武)를 두루 갖춘 장부였다.

 

법화경 화엄경 안반수의경서
무술 본질 ‘무심경계’ 깨닫고 

禪敎겸수 관법수행…금강영관 
대금강승문·관선무 체계화
‘한국불교무도 대가’로 불려 

“무도는 어디까지나 수행방편”
수행정신 강조…청련암 불사때
사회 기술자 인력도 쓰지 않아

동산스님 따라 불교정화 나서 
봉은사 망실재산 환수 큰기여 

청호당(靑昊堂) 양익(兩翼, 1934~2006)대선사는 무도(武道)를 수행과 교화의 방편으로 삼았다. 금강영관(金剛靈觀)이라 이름붙인 양익스님의 수행법은 몸과 마음을 고루 단련하여 불도(佛道)의 성취에 이르는 특출한 수행법이다. 스님의 이러한 수행은 우리 종단에서는 일찍이 볼 수 없었던 당신만의 독창성을 지닌 것이다. 

금강영관은 금강과 같은 자성(自性)을 찾으려 수행하는 방편이다. 금강과 같이 견고한 신체단련과 자성 추구의 마음 즉 신체와 심령을 함께 닦아가는 수행이다. 양익스님의 이런 수행은 선무도(禪武道), 선관무(禪觀武), 불무도(佛武道)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무도를 단지 신체단련의 방법으로만 여기지 않고 마음을 닦는 수행과 결부시켜 몸과 마음을 함께 닦아 나아가 부처님의 경지에 이르게 하는 수행이다. 

스님의 금강영관은 직계제자만이 아니라 사회인들도 큰 관심을 갖고 수련하여 지금은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스님이 머물던 범어사 청련암이 그 본거지이고 경주 골굴사, 부산 해운대 원각사를 비롯하여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등 세계 각국에 퍼져 있다. 

18세 ‘무념경계’ 자유자재 

양익스님은 1934년 9월25일 강원도 홍천군 내촌면 답풍리에서 김해 허씨 수봉(樹鳳)옹과 밀양 박씨 용(龍)여사 사이 3남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릴 적 이름은 남익(南翊). 법호는 ‘청호’이며 법명은 ‘양익’이다.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무술을 연마했다. 차차 내공이 증진되어 18세 때에는 홍천강 경신평 작은 초막에서 무념경계로 자유자재할 수 있는 무상검(無想劒)을 터득했고 나아가서는 최고수의 검술이라는 신묘검(神妙劒)마저 달인의 경지에 이르렀다. 스님은 무술에만 빼어난 게 아니라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여 문무(文武)를 두루 갖춘 장부였다. 

1962년 29세 되던 해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1964년 구족계를 받아 지녔다. 스승 동산스님을 따라 불교정화에 나선 스님은 서울 봉은사, 대구 동화사, 경주 불국사 등을 잡음 없이 정화했다. 1965년 스승이 입적한 후 봉은사에 온 스님은 주지 광덕스님, 흥교스님과 함께 봉은사 망실재산 환수와 사찰위상 제고에 크게 기여했다. 

서울을 떠나 본사 범어사에 머물게 된 스님은 선(禪)과 교(敎)를 아울러 정진에 몰두했다. <법화경>, <화엄경> <안반수의경(安般守意經)> 등의 내용에 무심경계에서 작용하는 무술(武術)의 본질이 담겨 있음을 홀연히 깨닫고 이를 바탕으로 관법수행의 금강영관과 대금강승문(大金剛承門) 관선무(觀禪武)를 체계화, 한국불교무도의 대가(大家)가 됐다. 

1971년 범어사 극락암에 수련원을 설립하고 1978년 청련암에 금강영관 수련원을 개설, 승속을 불문하고 불교무도를 본격적으로 지도했다. 당시 스님의 결가부좌 공중부양(결과부좌를 하고 공중에 부웅 뜨는 것)과 일주문을 뛰어넘는 심신일여(心身一如)의 경공술(輕功術)은 많은 무술 고수들의 존경의 대상이 됐다. 

그러나 스님이 이렇게 스스로의 경지를 드러내 보이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당신의 무도는 어디까지나 수행의 방편이라 여겨 수행정신을 더 강조했다. 스님은 청련암 도량을 이루는데 사회의 기술자나 건설인력을 쓰지 않았다. 오로지 당신과 제자들의 힘으로 거창한 도량을 일구었다. 지장보살상을 거대하게 세울 때 스님의 말씀은 이러했다. “전생에 복 지은 것은 적고 악업은 많이 쌓은 사람들이 절에 와서 죄업을 씻으려 해도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이 멀리서나마 바라다보고 합장 한 번만이라도 정성들여 한다면 그것으로도 그들이 크나큰 위안을 받지 않겠느냐. 불사한다고 시주를 강요하지 마라. 우리들끼리 힘을 모아서 불사를 이뤄야 한다.” 

양익스님은 이렇듯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을 헤아리는 대자비심으로 불사를 진행했다. 자고나면 운력에 진력을 다해야 하는 제자들은 그런 스승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고 투덜대기도 했단다. 그럴 수밖에, 철근 용접도 직접 해야 하고 시멘트를 버무리고 바르고 하는 것도 맨손으로 다 해야 했으니 오죽했겠는가. 

청련암 양익스님 하면 제자들에게 먼저 떠오르는 말을 ‘운력’이다. 스승에게는 운력이 당신의 지도방법이었다. 제자들은 말한다. ‘내일 아침엔 꼭 도망가야지’ 했다가도 날이 새면 또 종일 운력했다고. 30여명의 대중 가운데 제 발로 달아난 사람이 없었단다. 그만큼 스승의 가르침을 믿고 따른 것이다. 양익스님은 2000년부터 당신의 은사인 동산스님의 생가복원과 강원도 홍천에 시방원(十方院) 창건불사를 진행했다. 

금강 같이 견고한 신체단련과 ‘자성’ 추구
심신 함께 닦아 ‘부처님 경지 이르는 수행’
선무도 선관무 불무도 이름으로 널리 전파

2006년 입적을 예견한 듯 조용히 상좌를 불러 후일을 당부하고 사월초파일 적멸보궁을 참배한 후 다음날 새벽 1시20분께 청련암에서 단정히 앉아 원적하니 법랍 45년, 세수 73세였다. 스님의 장례는 5월10일(음력4월13일) 선찰대본산 범어사 보제루에서 ‘범어사 원로 청호당 양익대선사 산중장(山中葬)’으로 엄수됐다. 스님 입적 후 2010년 문도들이 스님의 비를 세웠다. 비문을 범어사 전계대화상 서해(瑞海) 흥교(興敎)스님이 짓고 글은 수원시립서예박물관장 근당(槿堂) 양택동(梁澤東)이 썼다. 

‘언제 어디서든 네 마음을 관(觀)해라’ ‘열심히 수행해라’ 스승의 가르침은 늘 이러했다고 한다. 소박한 성품에 명예나 재물에 대한 욕심은 아예 떠난 스님. 암자에 머물고 있는 스님에게 본사 주지를 하라고 하니 ‘나는 능력 없다’고 물리친 스님. 평생 당신을 드러내려 하지 않고 온화한 성정(性情)으로 산 스님이다. 그러나 직계제자나 연수생들에게는 추상같은 경책을 내렸다. 신도나 당신을 찾아온 사람들에게는 봄바람같이 대하는 스승이 왜 제자들에게는 그렇듯 혹독하게 지도했는지. 제자들은 이제 스승생전에 그토록 운력만 시키고 혹독하게 몰아치던 그 의중을 알 것 같다고 한다.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던 수행자로서의 위의를 잃지 않고 의연히 살 수 있는 그 힘이 바로 스승의 그 혹독한 지도였다는 것을.

 제자에 당부한 4가지 

첫째, 예불 빼먹지 마라. 둘째, 불사금을 따로 받지 마라. 셋째, 신도회 만들지 마라. 넷째, 사표를 쓰려면 뒤돌아보지 말고 바로 나와라. 이 네 가지 스승의 가르침을 평생 수행의 좌우명으로 삼고 사는 제자는 스승의 그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애쓴다. ‘일일부작(一日不作) 일일불식(一日不食)’ 일하지 않으면 먹지 말라. 절집의 큰 가르침이다. 이를 몸소 실천하는 스승에게 제자들의 불만은 컸다. 그러나 드러내놓고 말하지는 않았다. 

불사에 동참금 안 받고 어찌 하나? 그 답은 오로지 근검절약이었다. 신도들의 기도비와 재 지내는데 받은 돈으로 불사를 했다. 인부를 안 쓰니 인건비 들지 않은 것 물론이다. 편히 잠자고 잘 먹으려는 생각은 아예 멀리 떠나보냈다. 일어나면 일이요 조금의 실수에도 불호령이었던 시절. 그 시절을 잊지 못하는 제자들은 스승의 말씀이 더욱 그리워진다. 

“집을 지어도 내가 살겠다는 마음으로 지어서는 안 된다. 후대를 생각해야 한다”던 스님. 대학에 공부하러 간다하니 마뜩찮아 하시다가 은근히 학비를 대 주신 스님. 스승은 그러셨단다. 무술을 연마하여 제 딴에는 고단자가 됐는데 스님의 명성을 듣고 찾아온 젊은이가 있었다. 

스님은 그에게 말했다. “너 일개 체육관장으로 만족하며 살 거냐? 아니면 더 큰 지도자로 살 거냐?” 스님의 말을 새겨들은 그 젊은이는 출가하여 양익스님의 제자가 되었고 스님의 불무도를 세계에 널리 전하는 지도자가 되었다. 범어사 청련암 입구, 작은 개울을 건너는 돌다리 왼쪽 기둥엔 ‘안반수의(安般守意)’가 새겨져 있다. 불자라 해도 생소하다. 

양익스님은 <안반수의경>에 의거하여 금강영관법을 창출했다. 금강영관 수행법은 부처님의 수행법 지관(止觀)수행을 근본으로 한다. 지관수행은 선정과 지혜를 균등하게 담는 수행법이다. 지(止)는 멈추어 모든 번뇌를 그치는 것이고 관(觀)은 자신의 본래마음을 관찰하고 사물의 본성을 꿰뚫어보는 것을 말한다. 

■ 도움말 : 인걸스님(불교금강영관 관주) 정산스님(부산 황련사) 무구스님(금정총림 범어사
                      청련암) 목종스님(부산 대광명사) 적운스님(경주 골굴사) 안도스님(부산 원각사)
■ 자    료 : 청호당 양익대선사 비문. 

[불교신문3400호/2018년6월16일자] 

 

이진두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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