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 잃은 백성 위한 불보살들의 따뜻한 미소

관촉사 미륵보살상 입상을 바라보고 왼쪽에 있는 산신각으로 오르면 거대한 미륵보살상과 같은 높이에서 감상할수 있다. 관촉사 전경 또한 시원하게 펼쳐진다.

936년 고려 태조 왕건은 일리천(一利天, 경상북도 선산 동쪽) 견훤의 아들인 신검(神劍)의 후백제 군대를 격파하고 논산 쪽으로 달아나는 후백제군을 추격하여 황산벌에서 최종적으로 후백제의 항복을 받음으로써 통일을 완성한다. 지역의 후백제 유민들에게 고려의 승리를 알리고 통제하기 위해 황산벌에 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뜻으로 개태사(開泰寺) 착공하고 4년 만인 940년에 낙성 화엄법회를 봉행한다. 동시에 개태사에 석조삼존불입상(보물 219호)을 조성하게 된다. 

고려의 시작 알리는 미소 

①태조 왕건이 후삼국의 통일을 이룬 후 태평의 시대를 연다는 개태사를 중창하고 조성한 개태사지 석조삼존불입상

지난 5월30일 논산 개태사를 찾았다. 일주문 역할을 하는 신종루(神鐘樓)를 지나 계단을 올라서니 개태사 전경이 들어온다. 정면에 정법궁이 왼편에 석조여래삼존입상이 모셔져 있는 극락대보전이 자리하고 있다. 

1000년 넘게 제 자리를 지켜온 삼존여래불을 친견하기 위해 극락대보전으로 들어섰다. 

참배를 마치고 찬찬히 한 분 한 분 불보살과 인사를 한다. 본존불은 넓은 연꽃위에 4.15m 크기로 서 있다. 4등신 정도의 큰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가 가득하다. 양 옆의 협시보살 입상도 3.5m, 3.21m로 서 있고 보살님들 또한 온화한 미소로 인사를 건넨다. 

태조 왕건은 940년 개태사 낙성법회의 화엄법회소를 직접 썼다. “이제 이미 공사를 마쳐 보찰을 일신하였으니, 우러러 하늘의 도우심을 받들고 엎드려 여러 신들의 도움에 힘입어 세상을 맑게 하고 나라를 태평하게 하고자 합니다. 그런 까닭에 산의 이름을 천호(天護)라 하고 절의 이름을 개태(開泰)라고 하였습니다.” 부처와 산신령을 동격으로 보는 의식이다. 

왕건은 나라를 안정시키는 데에 있어서 불교와 토속신앙의 두 세력을 모두 끌어안는 것이 현실의 요청으로 받아들여졌다. 고려초 거대불들이 조성된 연유를 학자들은 왕즉불(王卽佛, 왕이 곧 부처) 인식을 심어주기 위해서라는 견해를 밝힌다. 패전지역의 유민들은 아마도 집중관리대상이였을 것이다. 군을 통한 무력이 아니라 거대한 불상을 세움으로서 부처 또는 왕이 당신들을 지켜보고 있다고 생각이 들도록 한 것이 아닐까. 

앙증맞은 세분의 화불 

③논산 신평리 마애불. 3.5m 규모의 불상의 광배에는 3분의 앙증맞은 화불이 조각돼 있다.

개태사에서 관촉사로 향하는 길, 시간적 여유가 있어 샛길로 빠져본다. 계백장군 묘가 있는 탑정호를 바라보는 나즈막한 고정산(高井山) 정상에 있는 바위 위에는 충청남도 시도유형문화재 제54호 신풍리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20분 정도 발품을 팔아 도착한 부처님은 다소곳이 양손을 모으고 방문객을 맞는다. 이 또한 고려시대 조성된 마애불로 두광이 새겨 질 곳에 세분의 화불(化佛)이 모셔져 있다. 작고 풍화작용으로 자세한 상호는 볼 수 없지만 미소 짓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대나무 숲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 바람소리가 시원하다. 

개태사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관촉사에는 지난 4월20일 국보로 지정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있다. ‘은진미륵(恩津彌勒)’이라고 불리는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은 높이가 18.12m로 현재까지 전해지는 불상 중 가장 큰 불상으로 알려져 있다. 반야산관촉사(般若山灌燭寺)가 적힌 일주문 앞에 서도 나무에 많이 가려지긴 했지만 멀리서 미륵보살의 원통형 보관과 사각형 보개가 눈에 들어온다. 사천왕문을 지나 계단을 올라서는데 아기 오리들이 줄을 지어 계단을 가로 질러 간다. 빨리 간 어미 오리를 따라갈려는지 뒤뚱뒤뚱 바쁘게 지나간다. 하지만 아기 오리들은 계단 옆 작은 턱에서 난간에 부딪힌다. 깡충깡충 몇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턱을 넘어 숲으로 사라진다. 답사 중에 반가운 선물을 받은 듯 기분이 좋아진다. 

국보로 지정된 국내 최대불 

②지난 4월20일 국보 323호로 지정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

경내에 들어서니 은진 미륵이 우측으로 보인다. 국내 최대 규모답게 보는 이를 압도 한다. 종무소 앞에서 초를 구입해 미륵보살 앞에서 촛불을 켠다. 거대한 부처님 앞이라서 그런지 나도 왠지 큰 마음을 내본다, 한반도 평화를 생각하며 삼배를 올린다. 관촉사사적비에서는 조정에서 혜명스님을 천거해 사찰을 짓도록 하고 장인 100명을 보냈고, 970년 착공해 36년만인 1006년 불사를 회향했다고 전해진다. 고려왕실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아 불사가 이뤄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미륵보살 좌편 산기슭에 산신각과 명부전이 자리하고 있는데 명부전까지 오르면 미륵보살과 거의 같은 눈높이에 다다른다. 거대한 손에 비해 너무 앙증맞은 철제연꽃, 매혹적인 붉은 입술, 어깨에 닿을 것만 같은 귓불 등 미륵보살의 모습을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빠르게 시간이 흐른다. 

큰 얼굴 작고 섬세한 이목구비

④솔숲을 배경으로 서 있는 대조사 석조미륵입상.

논산에서 약간 떨어진 부여에는 백제시대부터 전략상 주요기지였던 성흥산성이 있다. 그 바로 아래 9.45m의 자비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대조사 석조미륵입상(보물 제217호)이 서 있다. 

주차장에서 많은 계단을 올라서야 경내로 들어가는데 멀리서도 소나무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미륵보살상이 보인다. 경내에 오르면 삼층석탑과 원통보전이 눈에 들어온다. 대불은 그 뒤 석축이 쌓인 한 층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관촉사 미륵보살이 너른 공간에 솟아오르듯이 우뚝 서 있고 이목구비가 선명한 남성적이라면 대조사 미륵보살은 숲속에 서 있고 눈, 코, 잎이 작고 섬세히 묘사되어 있어 보다 차분하게 느껴지며 여성적이란 느낌을 받는다. 

백제 때 창건된 대조사지만 미륵보살상은 10세기 중반 고려 초에 조성된 것이라고 한다. 조성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정확하진 않지만 관촉사 미륵보살상보다 약간 빠른 10세기 중반으로 추정하는 학자들의 견해가 있다. 안타까운 점은 부여군에서 만든 안내판 내용이다. ‘크기에 비해 세부 묘사가 없으며, 조각 기법이 세련되지 않은 점과 신체 비례가 어울리지 않는 점 등이 관촉사 미륵보살상과 비슷하다’ 틀린 내용이라고 볼 수는 없지만 무언가 부족하다. 

대조사 미륵보살상과 비슷하다는 관촉사 미륵보살상은 왕실의 지원으로 37년 동안 조성된 불상인데 과연 당시 조각기술이 부족해서 신체 비례나 세련된 조각 기법을 발휘하지 않았을까? 당시 전쟁에 패한 백제 유민들에게 과연 세련되고 화려한 불상을 보여 주는 것이 좋았을까? 이런 생각을 해보니 오늘 친견한 네 곳의 불보살님들은 크기는 거대하지만 석굴암 부처님처럼 근엄함 같은 느낌은 느껴지지 않는다. 자비롭고 온화한 표정 그리고 너무나도 친근한 모습으로 1000년 넘게 중생들을 만나왔다. 

돌아가는 길, 바위에 새겨진 미소가 떠오르며 가슴을 점점 따뜻하게 한다.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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