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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응천 교수의 한국범종 순례] <32> 낙산사종과 봉선사종
  •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 승인 2018.06.11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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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양양의 낙산사종(落山寺鐘, 1469)이나 남양주의 봉선사종(1469)은 장소와 크기는 조금 다르지만 흥천사종(興天寺鐘, 1462)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조선 왕실 발원 범종이란 공통점을 지녔다. 이 두 종은 공교롭게 같은 해에 만들어져 500년을 넘게 잘 보관되어 왔지만 낙산사종은 2005년 4월5일 식목일날 낙산사 산불과 함께 소실되어 그 원형을 잃고 말았다. 두 점 모두 쌍룡(雙龍)의 용뉴와 굵은 횡대로 나누어진 구획선, 종신 하단에는 파도문대를 둔 모습에서 앞서의 흥천사종을 계승한 점을 볼 수 있다. 그리고 두 종 모두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이 배치되어 있으나 낙산사 종에는 연곽과 연뢰의 표현이 생략된 점이 이채롭다. 아울러 범자문이 종신 상단에 하나의 문양대로 장식된 점에서 새로운 변화가 느껴진다.

쌍룡의 용뉴와 하단 파도문대
흥천사종 양식 계승흔적 남아
종신 상단에 보살입상 배치해
범자문도 문양대로 장식 변화

(구)보물 479호 낙산사종은 조선 1469년에 조성된 높이 158cm의 종에는 연곽과 연뢰표현이 생략돼 이채롭다. 안타깝게도 이 종은 2005년 화재로 소실됐다.

낙산사종

비록 지금은 화재로 녹아 흉물스럽게 변해버린 낙산사종이지만 이 종이 지닌 원상을 살펴 그 가치를 재조명해 보고자 한다. 낙산사종의 쌍용뉴는 종신에 비해 크게 묘사된 편인데, 하나의 몸체가 서로 뒤엉켜 머리를 반대로 두고 두 다리로는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을 굳건히 밟고 있는 모습이 용맹스럽게 묘사되었다. 천판 조금 아래의 종신 상부 면에는 네모꼴로 조금은 도식화된 연판문대를 둘렀고 이 바로 아래에 광명진언(光明眞言)으로 보이는 양각의 굵은 범자문을 둥글게 돌아가며 배치하였다. 

직선화된 종 몸체의 중단에는 3줄의 융기선 띠를 둘러 상, 하로 2분하였으며 상부 종신 면에는 우리나라 범종에 보이는 방형의 연곽과 연꽃봉우리가 전혀 표현되지 않았음이 독특하다. 대신 네 방향으로 보살입상을 1구씩 부조하였다. 이 보살입상은 조선 불화에 나타나는 도상을 충실히 따른 듯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합장한 채 두 발로 연화좌를 밟고 있는 자세이다. 머리 위에는 화관을 쓰고 뒤에는 둥근 두광이 둘러졌으며 양 어깨에 걸친 천의는 손목을 감싸며 유연하게 흘러내렸다. 

이 보살상과 보살상 사이의 여백에도 범자문이 옆으로 4자씩 양각되었다. 이 보살상과 문양의 초본을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이 명문에 기록된 화원(畵員) 김중경(金仲敬)과 이장손(李長孫)이다. 특히 이장손은 조선전기 미법(米法) 산수를 잘 그렸던 도화서(圖畵署)의 화원으로 세조의 어진을 그린 인물이었다. 그의 진품은 남아있지 않던 차에 이 보살상이야말로 이장손의 유일한 화적(畵籍)이었던 셈이어서 더욱 안타까움을 준다.

융기선 횡대 아래의 종신 하부 면에는 다음과 같은 양각 명문을 새겼다. ‘세조 12년(1466) 금강산 순행 길 중 낙산사에 이르러, 세조가 정희왕후와 세자(睿宗)와 함께 관음보살상에 예배하자 사리가 분신하고 오채가 빛나는 등의 서이(瑞異)가 일어났다. 이에 세조가 큰 서원을 내어 학열(學悅)에게 낙산사의 중창을 명하였으며 세자(睿宗)의 자복사(資福寺)로 삼아 백여 칸으로 중창하고 소용되는 것들을 갖추게 되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세조의 서원을 추념하여 낙산사에 범종을 주조하였으니(예종 1년, 1469) 이것은 곧 세조의 성덕을 예종이 이어받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이 외에도 명문의 후반부에 제작에 참여한 조각장(彫刻匠), 각자(刻字), 주성장(鑄成匠), 주장(注匠), 노야장(爐冶匠), 목수(木手), 수철장(水鐵匠)의 분업 상황과 참가자 명단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종의 주성장인 정길산(鄭吉山), 이파회(李波廻), 오춘경(吳春敬) 등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봉선사종(奉先寺鐘)을 만드는데 다시 참여하고 있다. 따라서 이 종 역시 다른 조선 초기 범종과 마찬가지로 왕실의 발원에 의한 것이지만 처음부터 사찰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다르다. 한편 종구 쪽에서 조금 위쪽으로 올라와 파도문대를 둘렀다. 이 종은 중국 종 계열을 따른 유점사종(楡岾寺鐘)처럼 연곽과 연꽃봉우리가 생략된 점이 매우 독특하지만 같은 해에 만들어진 봉선사 종에서 다시 이러한 문양이 재현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보물 397호 봉선사종은 1469년에 조성됐다. 높이 238cm 종 상단에는 보살입상이 새겨졌는데(아래 사진) 세조와 예종의 어용화사 이백련 작품으로 세련미가 낙산사종을 능가한다.

 봉선사종

경기도 남양주군 봉선사(奉先寺)에 소장된 봉선사종은 낙산사종이 만들어진 같은 해에 그보다 약 3개월 뒤에 만들어진 종이다. 그러나 원 낙산사종보다 훨씬 큰 238cm로서 앞서 만들어진 보신각종, 흥천사종에 이어 3번째로 큰 조선시대 종이다. 종명에는 ‘세조의 덕과 공로를 찬탄한 후에, 세조가 재위 14년(1468)에 돌아가심에 그 뒤를 이은 예종이 광릉(光陵)에 장사지내고 광릉 곁에 원찰인 봉선사를 세운 뒤 종을 만들기를 명하였다’는 내용을 기록하였다. 일반적인 종과 달리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종을 만들었다는 내용은 이미 통일신라의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 神鍾, 771)에서 볼 수 있다. 조선시대에 와서도 그러한 전통이 계승되어 세조의 공덕과 그를 이어받을 예종의 업적을 후세에 길이 남기기 위한다는 명문을 남기고 있다. 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왕실의 기념비적인 상징물로서 이러한 종을 만들고 종명을 쓰는 것은 낙산사 종의 명문에도 나타나 있어 조선 전기 왕실의 기반을 공고히 하려는 의지를 불사에까지 동원한 시대적 배경을 보여준다.

불룩이 솟아오른 천판 위로는 음통 없이 두 마리의 역동적인 쌍용으로 구성된 용뉴와 그 주위로는 각이 진 복판의 연화문이 상대(上帶)처럼 둘러져 있다. 그 아래의 종신 상단부분에 1줄의 횡대를 두르고 종의 몸체 중단쯤에 다시 3줄의 융기 횡대가 둘러져 상하부로 나뉘도록 구성되었다. 이를 중심으로 상부에는 사방에 9개씩의 연뢰가 장식된 연곽대와 그 사이마다 1구씩 도합 4구의 합장한 형태의 보살입상을 조각하였다. 보살상의 광배 좌우에는 각각 ‘옴’자의 범자문과 연곽대 하부마다 ‘옴마니반메훔’이라는 6자의 육자광명진언(六字光明眞言)을 양각시켰다. 일체의 죄를 소멸한다는 의미를 지닌 육자광명진언은 고려시대 오어사종(吾魚寺鐘, 1216)에서 처음 문양으로 등장되었으며 조선시대 봉선사종으로 계승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이후 만들어진 종에는 진언의 수가 점차 줄어들거나 ‘옴’ 자 한자만으로 생략되어 점차 간략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종 몸체의 중단 융기선 띠와 종구의 하단에서 약간 위로 치우쳐 하대(下帶)처럼 표현된 문양띠 사이로는 긴 내용의 명문이 양각되었다. 그 아래의 문양띠 안에는 파도문을 빽빽하게 시문하였다. 낙산사종을 만들었던 정길산, 이파회, 오춘경 등이 동일한 주조 장인으로 기록되었고 나머지 조역들도 일부 같은 인물이 보이는 점에서 낙산사종을 주조한 인력이 거의 그대로 동원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러나 화원은 이백련(李百蓮)이라는 새로운 인물로 바뀌었다. 이백련역시 세조와 예종의 어용화사(御容畵師)를 지냈던 도화서 화원이었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보살상의 모습은 낙산사종과 약간의 차이점이 느껴지며 오히려 세련미에서는 낙산사종을 능가한다. 이처럼 조선전기 왕실 발원의 종 제작에는 도화서 내의 최고의 화원들이 직접 참여한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들에게 밑그림을 맡겼다는 것은 가장 최상의 전문가 집단을 활용하여 왕실 발원을 제작하였던 당시의 시대적 상황을 잘 말해준다. 

봉선사종은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대형 범종 가운데 형태가 안정되고 세련된 문양과 보살상이 정교하게 표현된 대표적인 걸작으로 평가된다.

여음(餘音)
현재 낙산사는 복구가 이루어져 옛 모습을 어느 정도 찾아가고 있으며 원래 있던 낙산사종을 그대로 복원한 새로운 종이 걸려 있다. 외관상으로는 비록 유사할지 모르나 낙산사종이 지녔던 500년의 장구한 소리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산불이라는 천재지변에 의해 사라지고 말았지만 이 종은 임진왜란과 병자의 양난은 물론이고 6·25의 전쟁을 거치고도 굳건히 견뎌온 조선 왕실의 역사적 편린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조선 최고의 화원인 이장손의 화적도 함께 사라져 버렸다는 점에서 그 아픔은 더 절실하다. 한번 사라진 문화유산은 결코 다시 살려내기 어렵다는 것을 타 버린 낙산사종은 우리에게 교훈으로 보여주고 있다. 

[불교신문3399호/2018년6월13일자]

최응천 동국대 대학원 미술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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