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세기 백제조각 우수함 대변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환수추진

100년 만에 공개된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은 7세기 백제시대를 대표하는 보살상으로 백제의 미소가 가장 잘 표현됐다. 사진=문화유산회복재단

이치다 지로 소장 일본 반출
출토 100년 만에 모습 공개
문화유산회복재단 환수 추진

1907년 부여 규암면에서 출토돼 일본으로 반출된 이후 종적을 감춘 백제시대 금동관음보살입상이 국내로 돌아올 수 있을까. 문화유산회복재단(이사장 이상근)은 “지난 12월 한 기업인이 도쿄를 방문한 최응천 동국대 교수와 정은우 동아대 교수에게 불상을 공개해 7세기 백제시대를 대표하는보살상임이 판명됐다”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과 문화재청이 환수를 타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문화유산회복재단이 공개한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높이 26.5cm크기로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 올려 머리에 삼면 보관을 쓰고 있다. 보관 중앙에 화불이 있어 관음보살임을 알 수 있다. 오른쪽 다리를 살짝 구부리고 왼쪽 허리를 살짝 튼 삼곡(三曲)자세를 하고 섰다. 오른손은 허리 높이로 올려 손등이 바깥을 향하고 있으며 왼손에는 정명을 들었다. 

천의 자락은 부드럽게 흘러내리는데 왼쪽 어깨에서 오른쪽 어깨를 잇는 ‘U’자형 주름이 자연스럽다. 가슴과 다리 앞에는 영락장식이 둘러 있다. 특히 관음보살의 상호는 오똑한 코에 자비로운 미소를 하고 있어 백제시대 보살상의 아름다움의 정수를 보여준다.

지난 해 12월 실견하고 돌아온 최응천 동국대 교수는 “가슴 쪽 천의 띠문양을 보면 구름과 당초문이 있는데 백제금동대향로 문양과 같다”며 “국보 293호 보살상보다 크기도 크고 상호도 뛰어나 백제미술의 전성기인 7세기 전반에서 중엽사이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또 대개 삼국시대 불상이 뒷면을 거칠게 마무리하는 것과 달리 옷자락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왼손에 든 정병 또한 뛰어나다. 정은우 동아대 교수는 ‘의견서’에서 “소위 ‘백제의 미소’가 가장 잘 표현됐다. 자연스러운 제사와 부드러운 천의 완벽한 제작기법 등에서 백제 7세기의 우수한 조형성과 우아함, 세련미를 대변하는 불상”이라고 평가했다.

보살상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07년 규암면 규암리에서다. 당시 쇠솥에 보살상 2위(位)가 담겨 있었는데 국보 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과 이번에 공개된 보살상이다. 규암면출토 관음보살상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경매에 출품돼 일본인 니와세 히로아키에게 입찰됐다. 니와세는 1922년이 금동보살입상을 대구의 이치다 지로에게 팔았다. 

이치다 지로는 대구에 거주하던 의원으로, 삼국시대 금속공예품, 도자기, 불상 등을 수집한 고미술 수장자였다. 한국전쟁 전 많은 문화재를 일본으로 가져갔다고 전한다. 1929년 대구에서 신라예술품전람회‘를 개최했는데 135건 302점에 달하는 수집품을 공개했다. 당시에도 규암면출토 관음보살입상은 공개하지 않았는데, 이 보살상만큼은 출품이나 팔지 말라고 했을 정도로 아꼈다고 한다. 이번에 관음상을 공개한 기업인은 1970년경 이치다 지로에게 구입했다.

이상근 이사장은 “현 소장자가 장고 끝에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공개를 허락했기 때문에 지금이 환수해올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오는 6월말 소장자를 만나 의견을 나눌 계획인데 부여군민의 간절한 염원을 담아 보살상이 돌아올 수 있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좌측상반신 사진=문화유산회복재단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좌후면. 뒷면 옷자락까지 완벽하게 표현했다. 사진=문화유산회복재단
조선미술사에 수록된 규암면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 사진

[불교신문3398호/2018년6월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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