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상심이 도’ 가르침 전파한 ‘강릉단오제 주신’ (道)

마조도일-염관제안 법 잇고 
16년만에 귀국 백달산 수행
명주도독 요청으로 강릉에 
사굴산문 열어 큰 영향 끼쳐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고도
하지 말라” 돈오사상 천명 

대관령 길목 성황당에 모셔 
‘민중들 희망과 안식처’ 돼
문하 ‘10철’ 거론 제자 번성 
고려 보조국사 지눌도 문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것으로 알려진 사굴산문 굴산사지 당간지주.

사굴산문(闍崛山門)을 찾아가는 겨울날, 그 초입에서 자동차 바퀴가 펑크 나서 고생을 엄청 했다. 하지만 이 산문을 생각하면 그마저도 행복이다. 나말여초 산문 가운데, 먼 후대까지 내려온 산문은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이며, 강원도와 경상도 해안 일대가 사굴산문의 영향이 미쳤던 멋진 산문이기 때문이다.

통효 범일(通曉梵日, 810~889년)은 품일(品日)이라고도 하며, 성주산 무염선사와 더불어 당나라까지 그의 수행력이 알려져 있었다. 범일은 계림의 호족인 김 씨로, 그의 조부는 벼슬이 명주도독에까지 이르렀는데 매우 청렴하고 너그러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범일은 태어날 때 부처님처럼 나계(螺髻)가 있는 특수한 자태를 가지고 있었으며 15세에 출가했다.

무애자재 … ‘동방의 보살’ 

범일은 <능가경>을 읽다가 입당(入唐)을 결심하고, 헌덕왕 6년(831년)에 당나라로 건너가 염관 제안(鹽官齊安, ?~842년)을 만났다. 범일은 염관 문하에 6년간을 머물렀다. 그러던 어느 날, 염관과 선문답을 나누었는데, 그 일화가 <조당집> 17권에 전한다.

염관이 먼저 물었다.
“수좌는 어디서 왔는가?”
“동국에서 왔습니다.”
“수로로 왔는가? 육로로 왔는가?”
“두 가지 모두 밟지 않고 왔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기에 이르렀는가?”
“해와 달에게 동쪽과 서쪽이 무슨 장애가 되겠습니까?”
“그대는 동방의 보살이로다.”
선사가 ‘해와 달이 동서에 걸림이 없다’고 한 것은 범일이 무애자재한 경지에 이르렀음을 뜻한다. 범일은 스승에게서 찬사를 받으며, 심인(心印)을 얻어 법을 받았다. 염관은 마조의 제자 중 독자적인 선풍을 전개한 인물이다. 강소성 사람으로 왕실의 후예이기도 한 그는 마조가 남강의 공공산에서 법을 펴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조를 찾아갔다.

사굴산문 범일국사 부도탑(보물85호).

마조는 ‘처음 보자마자, 염관이 법기(法器)임을 알았다’는 기록이 <전등록>에 전한다. 염관은 마조가 입적할 때까지 그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마조 입멸 후 여러 곳을 행각하다가 절강성 해창에 머물러 선풍을 펼쳤다. 당시 사방에서 제자들이 몰려왔고, 당시 ‘북에는 분주무업이 있고, 남에는 염관제안이 있다’고 할 정도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염관은 90여 세로 입적했는데, 후에 선종(846~859 재위)이 오공선사(悟空禪師)라는 시호를 내렸다.

범일은 염관에게서 법을 받은 뒤, 그의 문하를 떠나 석두 희천의 제자인 약산 유엄(751~834년)을 만나 선문답을 나누기도 했다. 845년 무종의 법난(회창파불)이 일어나자, 범일은 섬서성 상산의 산속에 숨어 지내나가 광동성 소관으로 가서 혜능대사 진신상에 참배하고, 847년에 귀국했다.

16년만이었다. 범일은 충남 대덕 백달산에서 수행하던 중, 명주(溟州) 도독 김공의 요청으로 강릉 사굴산에 산문을 열었다. 이때가 문성왕 12년(851년)의 일이다. 그는 굴산사에서 40여 년을 보냈으며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의 부름을 받았지만, 왕실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열반에 들 무렵, 제자들에게 “나는 이제 먼 길을 떠나려고 한다. 그대들과 작별을 해야 할 때가 왔구나. 세속의 감정으로 너무 슬퍼하지 말라. 그대들은 오직 스스로 마음을 잘 닦아 내 종지(宗旨)를 무너뜨리지 말라”는 유게를 남기고 세연 71세로 열반에 들었다.

시호는 통효(通曉), 탑명은 연미(延徽)이다.

조사선 우위 ‘진귀조사설’ 

범일의 대표적인 선사상은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다. 이 진귀조사설은 우리나라 조사선의 독특한 특징 중의 하나이다. 이 설은 <선문보장록>과 <선교석>에 전하고 있으며, <조당집>에는 그의 전기가 상술되어 있다.

진귀조사설은 석가가 설산에서 깨달았지만, 지극한 진성(眞性)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 수행, 설산의 석가에게 정법안장을 전해주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던 진귀조사(문수보살의 화신)를 만나서야 석가모니가 심인을 받고 종지를 증득했다는 설이다. 이는 조사선의 경지라고 하여, 여래선보다 조사선의 우월함을 주장하는 사상이다. 이 설은 우리나라에만 존재하는 사상이다. 당시 신라에 선종이 유입되어 보급되어 가는 시기에 그의 조사선 우위 사상은 절실히 필요했던 선사상 정립이라고 볼 수 있다.

범일은 할아버지뻘 스승인 마조의 가르침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선사상을 신라에 적극적으로 펼친 대표 선사이다.

한 제자가 범일에게 물었다.
“어떻게 수행해야 부처가 될 수 있습니까?”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더럽히지만 말라. 부처라는 견해, 보살이라는 견해를 갖지 말라(莫作佛菩薩見). 평상심이 바로 도다.”
어떤 이가 물었다.
“어떤 것이 조사의 뜻입니까?”
“6대에도 잃은 적이 없느니라.”
“어느 것이 대장부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
“부처의 계급을 밟지 말고, 남을 따라 깨달으려고도 하지 말라.”(<조당집> 17권)

6조 혜능은 게송에서 ‘본래 한 물건도 없다(本來無一物)’고 했고, 남악회향은 ‘오염시키지 말라(不汚染)’고 했으며, 마조는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道不用修)’고 했다. 곧 중생이 원래 부처와 똑같은 본 성품을 구족(具足)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도를 닦을 필요가 없는 돈오사상을 천명한 것이다. 범일도 스승들과 마찬가지로 점차적인 수행(漸修)이 아니라 돈오사상을 천명했다고 볼 수 있다.

구산선문 가운데 가장 번성 

영동 지방의 강릉단오제는 대표적인 문화제 가운데 하나이다. 이 단오제의 주신(主神)은 사굴산문의 범일이다. 당시 사굴산문은 굴산사(현 강릉)를 중심으로, 그 일대에 범일의 문중이 형성되었다.

즉 고성의 건봉사에서부터 양양의 낙산사, 평창의 월정사, 동해의 삼화사, 삼척의 영은사, 그리고 울진과 평해 지역까지 이른다. 범일선사 입적 후, 당시 강릉지역 사람들은 범일을 추앙했는데, 대관령 길목 성황당에 범일선사를 모시면서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된 것이다.

이런 점으로 보아 신라 말기부터 고려에 이르기까지 사굴산문은 영동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쳐서 불교라는 테두리로 문화권을 형성했던 것으로 추론된다. 자력적인 수행의 선사가 타력적인 기도의 주신으로 섬겨진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달마도를 수맥차단용으로 많이 모시는 것과 유사한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불교가 민중들에게 희망과 삶의 안식처가 된다는 점에 마음이 따스해진다. 범일의 문하(門下)에는 10철(十哲)이라고 하여 많은 제자가 있었으나 현재 전기가 전하는 이는 행적과 개청뿐이다.

당시에 구산선문 가운데 사굴산문이 가장 번성했으며, 범일의 제자들은 후대에까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큰 영향력을 끼쳤다. 개청(開淸, 835∼930년)은 범일이 입적한 후 사굴산문을 지켰으나 여러 차례 위험한 상황이 발생했다.

이런 가운데 선사는 강릉 보현사로 옮겼으며, 명주군수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다. 개청은 스승 범일과는 다르게 경애왕의 초빙에 응했으며, 국사가 됐다. 이후 왕순식의 연결로 왕건과도 인연이 있었다. 행적(行寂, 832∼916년)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경저(石霜慶諸)의 법을 받아 헌강왕 11년(885년)에 귀국했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 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 신덕왕은 그를 국사로 임명하고, 실제사에 머물도록 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했는데, 늘 제자들에게 “일심을 잘 지켜라”, 혹은 “한 번 지켜서 잃지 말라”고 당부했다. 고려 때 보조 지눌(1158~1210년)국사도 사굴산문의 승려이다. 

[불교신문3395호/2018년5월26일자] 

정운스님 동국대 선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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