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1월19일자 1면 머리기사로 ‘천만불자의 소원, 4·8공휴일 마침내 제정’이라는 기사를 내보낸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

1945년 기독탄신일 제정 
불교는 30년 늦은 1975년
이마저도 석가탄신일 명칭

공휴일 제정 성과에 가려
석가탄신일로 42년 보내
2017년에 ‘부처님오신날’

사월 초파일, 그동안 달력에 석가탄신일로 표기되던 부처님오신날이 올해부터 부처님오신날로 명기됐다. 지난해 10월10일 정부가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법적인 명칭이 석가탄신일에서 부처님오신날로 변경됐다. 1975년 석가탄신일이라는 명칭으로 공휴일 제정이 이뤄진지 42년만의 일이다. 

불교계에서 부처님오신날이라는 명칭을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68년부터다. 이 해 3월 부처님오신날을 앞두고 조계종 총무원과 신행단체 대표들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봉축 준비회의에서 부처님오신날로 명칭을 정했다.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하기 위해 활발한 논의와 작업들이 진행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명칭을 통일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이라는 명칭으로 통일되기까지의 과정은 지난했다. 그 전에는 사월초파일, 부처님탄일, 부처님탄신일, 석탄일, 석탄절, 석가세존탄일 등 제각각으로 표기됐다. 명칭 보다 공휴일 제정 문제가 더 절실했던 당시 상황에서 명칭을 통일한 것은 공휴일 제정 운동을 보다 체계적으로 진행하려는 의도였다.

앞서 조계종은 부처님탄일과 사월초파일이라는 명칭을 사용해왔다. 해방 이후부터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있었지만 제정 운동으로 번지지는 않았다. 통합종단 출범 직후인 1963년 본격적인 제정 운동이 시작됐는데, 조계종 총무원이 ‘부처님탄일 공휴일 제정’ 건의문건을 정부에 발송한 것이 시발점이 됐다. 통합종단 체계가 확립되지 않았던 시기 부처님탄일이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같은 해 ‘사월초파일’ 명칭을 사용하기도 했다. 조계종 총무원의 건의문건에 대한 정부의 답변은 불교계의 공분을 샀다. 정부는 “특정한 국교가 없이 신앙의 자유인 우리나라에서는 특정종교의 기념일을 공휴일로 제정할 수 없다. 크리스마스 공휴일 제정은 범세계적인 것으로 대내외적으로 유기적 연관을 가진 현 사회 실정에 비추어 공휴일로 제정한 것이다”라는 답변을 보내온 것이다. 이를 계기로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하기 위한 움직임이 본격화됐다. 이에 총무원은 교구본사 주지와 중앙종회의원이 결합한 합동연석회의를 열어 ‘사월초파일’을 공휴일로 제정하는 서명운동 등을 전개할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같은 과정을 거쳐 불교계를 중심으로 부처님오신날로 명칭이 통일됐으나 공휴일 제정의 결과물을 얻기까지 1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불교계 내부의 의견차가 발목을 잡는 일이 발생했다. 조계종과 신행단체들이 부처님오신날을 공휴일로 제정하기 위한 운동을 시작한 이후 1964년에는 원불교와 진각종 등이 참여하며 범불교적인 운동으로 확산됐다. 하지만 일부 종단에서 양력 4월8일을 주장하고 나섬에 따라 제정 운동의 동력이 현저히 떨어지게 됐다. 이는 1년여의 여론 수렴과정을 거치며 1965년 음력을 기준으로 결정함으로써 일단락됐다. 

제정 운동의 전기는 의외에서 나왔다. 불교계의 제정 운동이 청원서와 건의문 등의 방식으로 진행되고 있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하던 상황이었다. 1966년 동국대 대학원 법학과 석사과정에 있던 김선흥 씨가 서울고등법원에 ‘관공서 공휴일에 관한 건 중 기독교 성탄절의 무효확인 소송’을 제기하면서 양상이 달라졌다. 이 소송은 청구취지와 방향의 오류로 패소했지만, 국회의원들이 제정 운동에 가담하고 이어 용태영 변호사가 서울고등법원에 ‘석가탄신일 공휴권 등 확인청구의 소’를 제기하는 등 제정 운동의 저변이 넓어졌다. 조계종을 비롯한 불교계에서는 1968년부터 부처님오신날로 명칭을 통일했지만, 이 때까지도 부처님오신날이란 표현이 사회 전반에 확산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공휴일로 제정된 후 맞은 첫 부처님오신날 봉축법회는 동국대 운동장에서 성대히 열렸다.

용태영 변호사가 주도한 소송은 불교신문(당시 대한불교)이 사설과 기사를 통해 소개하면서 불자들의 적극적인 참여로 이어졌다. 1973년 10월31일 3차 심리가 진행될 때에는 서울고등법원은 전국에서 모여든 불자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 해 12월5일 4차 심리 때는 전국에서 서울로 향하는 불자들의 버스를 경찰이 고속도로상에서 가로막는 일까지 발생했다. 이 소송 역시 ‘행정부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신청을 한 뒤 그 신청이 기각됐을 때 재판을 청구해야 소송이 성립된다’는 이유로 1974년 10월30일 패소했다. 

하지만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에 대한 전국민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했다. 1974년 11월28일 주무부처인 심흥선 총무처장관이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 석상에서 “불교계가 요청하고 있는 석가탄신일의 공휴일 지정을 신중히 검토 중에 있다”고 밝혔다. 총무원은 그 해 12월20일 국무총리, 법무부장관, 문공부장관 등에 부처님오신날 공휴일 제정 청원서를 제출해 정부를 압박했다. 이에 문공부는 ‘소관부처에서 처리중’이라는 답변을 내놓았고, 해를 넘겨 1월14일 국무회의에서 부처님오신날은 마침내 공휴일로 제정됐다. 조계종을 비롯한 범종단적 역량과 모든 불자들의 원력이 힘을 합쳐 일궈낸 감격의 순간이었다. 

당시 조계종 종정 서옹스님은 제정 직후인 1월15일 ‘5000만 전 민족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부처님오신날이 국가 공휴일로 제정된데 대해 정부와 그동안 성원을 보내준 전 국민에게 감사드리고 이 기쁨을 함께 하고자 한다. 비록 때늦은 감이 없지 않으나 이로써 민족문화사에 새로운 계기가 이룩될 것임을 우리는 확신한다. 부처님오신날을 국가의 명절로 정하여 온 민족이 함께 경축하게 된 것은 1000만 불교도와 5000만 민족의 숙원이 이룩된 것이다. 우리 1000만 불교도는 부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뜻을 받들어 국가와 민족을 위해 더욱 봉사하여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달성하는데 이바지하고자 한다.” 이같은 성과에도 불구하고 명칭이 석가탄신일로 정해져 숙제로 남았다. 

애당초 공휴일 지정 문제는 해방 후 임시정부를 앞세운 미군정의 실책에서 비롯됐다. 당시 미군정의 조사로는 한국내 기독교 신자는 1%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1945년부터 기독탄신일을 공휴일로 제정했다. 우리 민족문화와 민족정신에 이르기까지 불교가 근간을 이뤄왔음에도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를 바로 잡는데 30년이 걸린 셈이다. 또한 한번 정해진 석가탄신일 명칭을 부처님오신날로 바꾸는데 42년의 세월을 보냈다. 결국 72년만에 제자리를 찾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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