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에 또 오라는 스님 말 한마디에 인생 다 바쳤죠”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장애인 불자 모임 보리수아래 대표이자 시인 최명숙 씨.  누군가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라도 할라치면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지게 만드는 환한 웃음으로 답하는 그녀다.

뇌성마비 장애 앓았지만
남들과 다르단 생각안해

청량사와 인연맺으며 
2005년  보리수아래 창립

문화 공연, 시집 발간 등
페이스북 통해 소통하며
시로 따뜻한 위로 전해

그녀는 엄마 뱃속에서 열 달을 채 못 채우고 나왔다. 변변한 병원 하나 없었던 강원도 춘천 시골 마을에서 한 달이나 앞서 나온 ‘9삭둥이’. 출산 과정에서 생긴 뇌손상은 치명적이었다. 뇌성마비 후유증으로 근육과 힘줄이 쪼그라들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 말이라도 할라치면 발음이 자꾸 뭉개져 나왔다. 그래도 장애가 얼마나 큰 불행이자 불편인지는 잘 모르고 살았다. 은연중에도 원망 한번 안하며 살았던 건 오롯이 그녀의 엄마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제게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 것 같은 일은 하지마라’, ‘남이 양보하기 전에 네가 먼저 양보해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셨어요. 잘 걷지도 못하는 딸한테 말이죠. 걸음이 이상하다고 아이들이 놀리든 말든 사람 많은 장소에 가면 시선이 집중되든 말든, ‘장애가 있으니 좀 봐달라’는 식의 이야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으셨죠. 남들과 똑같이 대하셨어요. 그러니 그냥 저도 자연스레 ‘장애’라는 것이 어떤 건지 사실 잘 모르고 컸던 것 같아요.”

학교에 들어가 등하교를 시작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 네 발로 걸을 수 있어야 나중에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말을 기도처럼 읊조리고 했다던 어머니였다. 그런 어머니 손을 잡고 최 대표는 불편한 걸음으로 어린 시절부터 절에 여러 번 오르내렸다.

“우리 어머니만 유일한 불자였거든요. 가족들이 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었어요. 지금도 우리 이모 아들은 목사고 큰 삼촌은 교회를 해요. 재미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 저는 교회에 가고 싶은 생각이 안 들더라구요. 어린 시절 엄마 손을 잡고 절에 다닌 기억 때문인지, 그냥 저한텐 불교가 더 자연스럽고 편하고 끌리고 그래요.”

절에 갈 때마다 이리 뛰고 저리 뛰며 부처님 얼굴 한번 만지겠다고 덤비는 탓에 엄마 속도 많이 썩였다는 그녀가 불교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건 2002년 때의 일이었다. “저와 똑같이 장애를 가진 옆 동네 친구랑 기차여행을 하다가 안동역에 내렸는데 문득 청량사 생각이 나는 거에요.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이야 교통이 좀 편해졌지만 그때만 해도 사찰까지 들어가는 게 쉽지 않았거든요. 친구는 힘들어서 못가고 혼자 택시타고 무작정 청량사로 갔죠.”

인연이었다. 어스름한 저녁, 불편한 몸으로 비탈을 오르는 최 대표 모습이 당시 청량사 주지였던 지현스님 눈에 띄었다. “스님 한분이 밖에 나와 내려다보고 있더라구요. 뭐 저런 보살이 다 있나 했겠지. 어둡기도 했고 내가 힘들게도 올라갔으니. 그게 첫 만남이었어요. 신기하지요? 법당에 가서 부처님 전에 삼배를 올리고 스님하고 이야기를 좀 나눴는데 꼭 다시 오라고 하시더라고. 그 때 그 말 한마디가 큰 힘이 됐던 것 같아요.”

최명숙 대표 활동 사진.

그날부터 한 달에 한번 봉화 청량산을 올랐다. 장애를 갖고 있지 않은 다부진 체격의 사람도 하기 힘든 3000배도 그 때 했다. 오기로 절을 하다 1000배가 넘으면 잠시 쉬고, 힘이 좀 난다 싶으면 또 절을 하고 그렇게 밤을 새워 기도를 했다. 살아갈 힘도 얻었다. 스님과 인연도 맺었다. 마음의 안정을 찾아갈 때 쯤 지현스님이 생각지 못한 제안을 내놨다. 

“장애인 불자 모임 한번 만들어 보는 거 어때요?” 처음엔 손사래를 쳤다. 농담이라도 그런 말 하지 마시라 웃어 넘겼다. “스님 마음대로 하세요. 저는 몰라요”하며 내리 3년을 버텼다. 지현스님도 끈질겼다. “진짜 안 만들거에요?”라는 스님 말에 결국 최 대표가 졌다. 장애인 불자 모임 보리수아래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맨 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뛰었다.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거치며 체계적인 장애인 포교 시스템을 갖춰온 다른 종교단체들과는 뭔가 달라도 달라야 했다. “가만히 앉아 부처님 말씀만 듣자고는 했다간 안될 것 같아 고민을 많이 했어요. 그러다 생각해 낸 것이 공연과 시집 발간이에요. 장애인들이 스스로 즐길 수 있고 직접 참여할 수 있는 매개체를 만들어보자 하며 시작했지요. 받지만 말고 우리도 뭔가 줄 수 있는 존재라는 인식을 심어주면 나름의 긍지가 생기거든요.” 

한국뇌성마비복지회에서 홍보팀장으로 근무한 경력도 보탬이 됐다. 2005년 창립 후부터 해마다 장애인 불자와 후원자를 끌어 모았다. 처음부터 잘될 리 없었다. 처음엔 2명이 모이고 그러다 한 명이 더 오고, 그렇게 지내온 13년이다. 보리수아래 회원은 현재 150여 명. 모두 서울, 충청 등 전국에서 모인 뇌성마비, 소아마비 장애인 불자들이다. 

인원이 적든 말든 후원금이 많이 모이든 말든, 월1회 정기모임과 연1회 정기공연도 꾸준히 했다. 문학작품집 발간과 음반제작도 때마다 냈다. 음반 <봄길 위의 동행> <그가 내게로 오다>, 시집 <보리수 아래 그를 만나다> 10주년 기념으로 발간한 <단 하나의 이유> 등이 그 결과물이다. 조계종 포교사로 활동하며 받은 장애인의날대통령표창, 대한민국장애인문화예술 대상 등 수상 이력도 화려하다. 

“우리 같은 장애인들은 원래 뭐 하나를 하려고 해도 남들보다 몇 배의 힘이 들어요. 버스 하나를 타려고 해도 그래요. 마음대로 몸이 안 따라주니 참 답답할 때가 많지요. 그래도 심각한 문제라 생각한 적 없어요. 그냥 이렇게 생겼으니 생긴대로 살면 돼요.” 

지난해 25년 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둔 최 대표는 요즘 제 살 깍아 먹으며 산다. 퇴직금은 모임 운영비로 쓰고 카페를 전전하며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정기 후원이 거의 없고 사무실 하나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지만 절망하진 않는다. 에너지 넘치는 최 대표가 최근 주력하는 일은 장애인 불자들을 설득해 재적 사찰 등록하기, 사찰마다 장애인 고용 추진하기, 한국과 미얀마 장애인 불자들 시를 한 데 모아 ‘아시아장애인 공동시집’ 발간하기 등이다. 

“바라는 거요? 많이 없어요. 그냥 사찰에서도 장애인을 좀 반겨줬음 좋겠어요. 안타까운 시선으로만 쳐다보지 말고, 장애인이 절집에 찾아가면 스님과 신도들이 딱 한마디만 해주시면 돼요. ‘우리 절 신도로 오세요’ ‘다음에 또 오세요’라고.” 힘들고 지칠 때마다 그녀를 잡아준 그 말 한마디처럼, 마디마디 희망으로 가득 찬 최 대표 시 하나를 소개한다. 

그렇게 살 일입니다

별을 보러 가는 사람에게는 초롱한 별들이 기쁨이듯

사랑하는 사람을 보러 가는 이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이듯

일터로 출근하는 이에게는 일자리가 있다는 것이 희망이듯 

울고 있는 아이에게 어머니는 안식이듯

거칠고 힘든 세상 속에서

우리 서로가 그렇게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희망과 위안이 되어 만날 일입니다


깊은 어둠의 길 위에서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빛처럼 

우리 그렇게 그것들과 악수를 나눌 일입니다

기뻐하며 행복해 할 일, 사랑하며 희망을 향해 나아갈 일

지금 좌절하면 더 많은 날을 아파해야 할지도 

지금 서로를 다독이지 않으면 

새벽이 돋는 봄날을 기대하지 못할지도 모르기에 

굳건하게 희망을 지켜 나갈 일입니다


오늘도 삶은 언제나 밝음을 향해 나아갈 길을 준비하고 

올 한 해 그렇게 밝음을 향해서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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